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62화 (362/463)

362화

“비아 말입니까?!”

가을 수리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됐다.

설마 백강이 마른 비에게 연락을 취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마른 비를 불러들여야 할까 싶었지만, 그는 곧 백강이 옳은 판단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흑전대라는 놈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된 전력이 그게 전부일 리 없겠죠. 루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부족에 위기가 닥쳤으니 비아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겨울 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람을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비아의 꼬맹이 때 모습이 선해서 그토록 대단하다는 게 와닿지 않지만, 십좌급의 무장들을 이겼다면서요? 비아가 가면 큰 힘이 될 거예요.”

백강은 이견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서안으로 흘러들어간 자금이 흑전대를 움직였다면, 화음 쪽도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검지로 화음 일대를 가리켰다.

“여긴 흑상과 거래를 튼 자들이 모이는 곳이죠. 희귀하거나 가치 있는 물품의 거래가 화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 전부터 여기에 흑상의 물류 창고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타당한 추측이었다.

거대한 강줄기 덕에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며, 번화한 곳이어서 무언가를 숨기기도 용이하다.

창고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더라도 화음을 샅샅이 조사하면 무언가를 캘 수 있을 거라고 백강은 판단했다.

“역량을 총동원하여 화음을 빠져나간 물품을 파악했습니다. 배를 이용했다면 알아낼 방법이 없지만, 다행히도 강은 화음의 동쪽을 흐르죠. 운남은 남서쪽에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사들였다면 육로로 수송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백강은 처음엔 전투 물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건 수요가 너무도 많았다.

신병이기부터 기문병기, 집단전을 위한 무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투 물자들이 천하 각지로 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의 포기하던 찰나에, 백강은 누군가가 평소에 거의 유통되지 않는 품목을 대량으로 사들인 걸 발견했다.

“전투 물자가 아니어서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왠지 신경이 쓰이더군요. 뒤늦게 ‘그것’의 수송 경로를 추적했죠. 그 결과 운남으로 흘러들어간 걸 확인했습니다.”

이상한 건 백강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점이었다.

“헌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그렇게 많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대체 뭐에 쓰려고…….”

“어떤 물품을 말씀하시는…?”

가을 수리가 묻는 찰나, 백강이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부분을 고민하기보다는 이번 일의 핵심을 짚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점창파 장문인이 의심된다고 하셨죠?”

“네? 아, 네. 맞습니다. 그자가 사 년 전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죠.”

“그래서 대리 쪽의 근황을 수집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도시라고는 대리와 곤명밖에 없고,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통에 그쪽의 사정에 밝은 자가 없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개방과 하오문에서까지 정보를 사봤지만 그들도 운남에는 관심이 없더군요.”

“이런……. 그럼 누가 이 일의 배후인지 알 수가….”

가을 수리가 낙심하던 찰나였다.

그는 백강이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운남의 상황을 몇 년간 주시한 자가 있더군요.”

“그런 자가 있습니까?!”

백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남에서 사천으로 올라가는 초입부를 짚었다.

“덕창이라는 도시입니다. 운남에 진입하는 자들이 필히 거쳐야 하는 곳이죠. 험난한 산을 넘는 게 아니라면.”

백강은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단이수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어린 나이인데, 얼마 전 하오문의 덕창 분타주가 됐더군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조그만 도시인 데다가, 그 친구의 수완이 워낙 좋아서 이례적으로 임명된 모양이에요. 정보를 다루는 입장에서 눈과 귀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마른 비가 들었다면 깜짝 놀랐으리라.

운남을 나와 처음으로 거쳤던 마을.

돈을 노리는 파락호들을 소탕한 뒤에 만났던 단이수는 마른 비가 중원에 나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마른 비가 들개 패거리를 쓸어버리는 바람에 덕창의 거리를 잡게 된 단이수는 그의 염원대로 하오문에 입문한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접선했는데, 운남의 상황을 줄줄이 꿰고 있었답니다. 처음에 그는 우리 측 요원을 의심했다고 하죠. 한데 와족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태도가 바뀌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마른 비와의 인연 이후에 단이수는 더욱 운남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야수들이 날뛰는 것부터 최근 짐승 흉내를 내는 자들이 나타난 일, 심지어는 대량의 물품이 흘러들어간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허…! 하늘이 도왔군요! 그런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짐승 흉내를 내는 자들이라고요? 설마 그놈들도 저희 부족을 노리고?”

가을 수리는 물었고, 백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까진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런 자들이 운남에 나타날 이유가 와족과 점창 말고는 없겠죠.”

지금까지 늘어놓은 정보를 토대로, 백강은 결론을 내렸다.

“화음에서 빠져나간 물품이 운남으로 간 걸 우리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덕창 분타주는 그것들이 운남으로 들어간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있었죠.”

백강의 손가락이 운남에 있는 두 개의 도시 중 하나를 가리켰다.

대리. 정확히는 대리에 인접한 산이었다.

“창산. 흑상에서 구입한 물자들은 점창파로 운반됐습니다. 그리고 흑전대가 운남에 진입했죠. 확실합니다. 노사의 추측대로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흉은 공지량, 그자입니다.”

* * *

피로 물든 땅.

어지러이 널린 시체와, 부서지고 깨진 갑주의 파편들.

북원과 명이 맞붙은 분지는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크, 크아악…! 팔, 내 팔이…!”

“몸이 뭉개졌어! 기마를 들어내!”

“……잘 알리라 믿는다. 하반신이 날아갔으니 가망이 없어. 유언을 남겨라. 내가 책임지고 가족에게 전해주마.”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언덕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흘린 피 때문에 초원은 붉게 물들어 버렸다.

푸른 하늘과 피에 절은 대지.

그 극명한 대비에 마음이 아려왔다.

“이겼구나…!”

전쟁은 끝났고, 결과는 명과 메르키트 연맹의 승리였다.

하지만 북원의 힘은 서달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의 수괴들을 놓쳤다는 점이다.

바투와 무칼리를 좌우에 두고, 선두에서 참마도를 휘두르는 오스트갈은 대적할 수 없는 무적자와 같았다.

적색창기병이 옆구리를 찔렀고, 중앙에선 서달이, 우측에선 패문강이 그들을 압박했다.

종국에는 귀궁까지 달려들었음에도 놈들을 잡을 수 없었다.

따로 떨어진 아군의 고수들과 달리 하나로 똘똘 뭉친 북원의 수괴들은 절체절명의 상황을 뚫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기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들을 없애 후환을 제거하는 게 이번 전쟁의 목표였는데 결국 실패해버렸다.

그래서 명군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우리가 참전했다면 달라졌을까?”

마른 비가 별비에게 물었다.

별비는 마른 비에게 힐끗 눈을 돌렸다가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글쎄. 모르지. 놈들의 돌파력을 봤잖아. 특히 오스트갈인가 하는 그놈. 진짜 무지막지하더군.〕

초원의 혼, 천하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무장이었다.

지금 당장은 마른 비도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대체 누가 있어 패문강 같은 남자를 꺾은 건지 궁금했는데, 그의 싸움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아 너보다 몇 십 년은 더 산 인간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네가 이길 거야. 쫄지 마라.〕

자신이 주눅 들었다고 여긴 걸까?

별비는 격려를 했고, 마른 비는 웃었다.

“하하! 안 쫄았어. 오히려 나중엔 달려 내려가서 한바탕 붙어보고 싶던걸?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분지 아래에서 서달이 기마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그의 장군검은 반 토막이 났고, 갑주는 엉망으로 깨져 있었다.

북원의 수장들과 정면으로 격돌한 결과였다.

그걸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거들었다면… 놓치지 않았겠지.〕

별비도 서달을 보고 있었다.

마른 비도 같은 생각이라서 물었던 것이고,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전쟁을 여기서 끝낼 수도 있었는데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도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경 쓰지 마라. 이건 네 전쟁이 아니야. 그동안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네가 저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 까닭은 없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마른 비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미안할 일이 아니란 걸 알지만, 축 처진 서달과 침통해 하는 패문강을 보니 그러기가 힘들 뿐.

그때, 독특한 복장을 한 자들이 분지를 달려 내려갔다.

“이쪽으로! 부상자를 모아주시오! 바로 치료에 들어가겠소!”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성이었다.

백원 의원 강소성 지부에서 본 사내.

원주 화인걸의 명을 받던 장진이라는 의원이었다.

“아…! 백원 의원 사람들도 따라왔구나!”

중원을 회복하는 전쟁에서 백원 의원의 활약은 눈부셨다.

주원장이나 서달이 그런 알토란 같은 전력을 놀릴 리 없었고, 결국 이번 전쟁에도 데려온 모양이었다.

병사들이 서둘러 길을 비켰다.

의원들이 지나가자 목례하며 예의를 표하거나 존경 어린 눈으로 보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이 그동안 병사들에게 쌓은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잘됐어. 백원 의원을 노리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안심해도 되겠다.”

마른 비는 운남에서 소식이 끊겼다는 화통달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움은 자연스레 부족 식구들에게로 옮겨 갔다.

‘아버지, 할아범, 노을이……. 산이 형과 걸음이 형. 다들 잘 있겠지? 엄청 보고 싶다!’

전룡과 영령을 돕고 나면 꼭 고향에 가야겠다.

운남을 떠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거리가 멀어질수록 스스로도 놀랄 만큼 고향이 그리워진다.

부족 식구들의 웃음과 청죽림의 아름다운 전경이 마른 비의 가슴을 채웠다.

왠지 울컥해진 그가 저도 모르게 남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뒤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웬 놈이냐! 초원을 혼자 건너오다니!”

“그 수상한 행색! 북원의 첩자가 분명하렷다!”

후방을 경계하던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내에게 창을 겨눴다.

사내의 옷은 땀과 먼지에 절어 색이 바랬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장거리를 정신없이 달려온 흔적.

또한 그에게선 비범한 기운이 느껴졌다.

“첩자라니, 당치도 않소! 수왕에게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서 목숨을 걸고 장성을 넘었소이다! 그와 대면하게 해주시오! 시급을 다투는 일이란 말이외다!”

병사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됐다.

“장성을 넘었다고? 그걸 지금 자기 입으로 분 거냐?”

“정신이 나간 놈이군! 사실이라면 즉결 처형감이다! 이놈이 어디서 수작질을…!”

사내가 순순히 잡힌 이유는 하나였다.

몰래 접근해서 오해를 사기보다 소란을 일으키면 마른 비가 자신을 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른 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손가락을 모았다.

그리고 매우 익숙한 기술을 선보였다.

아직은 많이 어설픈 올빼미 사냥의 투로가 허공을 휙 스쳤다.

“어?!”

마른 비는 놀랐고, 병사들을 제지하며 황급히 다가갔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사내가 말했다.

“수왕! 루주님의 전언이요! 아, 루주님은 추단 님과 동월 님을 식구로 거둔 분이지요. 이 서신을 읽어보시길. 귀하의 식구를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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