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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63화 (363/463)

363화

남하

쐐애애액―!

풀이 튀고, 바람이 흐른다.

마른 비는 서신을 읽자마자 전선을 이탈하여 남쪽으로 달렸다.

간다는 말만 남겼을 뿐 서달, 패문강, 귀궁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른 비의 옆에는 별비와 별비의 등에 올라탄 사내가 있었다.

“으으음…….”

백강의 전언을 가져온 사내.

그는 양손으로 털을 붙잡은 채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속도에 적응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별비의 기에 눌려서 긴장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한 방에 황천으로 보낼 수 있는 야수에 올라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속도로는 마른 비를 쫓을 수 없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별비의 등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

―이놈 봐라? 인상 안 펴?

기껏 태워줬더니 인상이나 쓰고 있는 꼴이라니!

별비는 사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으름장을 놓고는 마른 비를 힐끔거렸다.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한 말이었는데 마른 비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흠, 흠. 걱정 마라, 비아야. 괜찮을 테니까. 누가 감히 그들을 해칠 수 있겠냐?〕

와족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별비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른 비와 연을 맺자마자 뛰어들었던 전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봐도 집요함과 광기가 느껴지던 인간.

서신은 원흉으로 공지량을 지목했고, 별비도 자연히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와족의 전력에 생각이 미쳤다.

그믐, 우둔한 땅, 매서운 눈……. 노을, 산, 안개걸음, 새벽 어스름과 그들의 반려수들…….

그리고, 너른 하늘과 푸른 눈.

중원에서 수많은 강자를 본 뒤에야 그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비아의 아버지와 자신의 할아버지의 조합은 말 그대로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둘이 여기에 있었다면 오스트갈인지 뭔지 하는 놈도 개 박살이 났겠지.’

심지어 내로라하는 와족의 전사들이 둘의 뒤를 받친다.

따로따로 각개격파 당한다면 모를까, 똘똘 뭉친 와족을 꺾을 수 있는 세력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별비는 마음을 놓았지만, 마른 비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왜… 뭐가 그리 걱정인 거냐, 비아야?〕

이어진 답변에, 별비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느낌……. 느낌이 안 좋아. 엄청 불길한 예감이 들어.”

〔……!〕

마른 비의 예감이 얼마나 기막히게 들어맞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별비였다.

그제야 별비도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둘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남쪽으로 달렸고, 불과 사흘 만에 거용관에 도달할 수 있었다.

* * *

“열어!”

마른 비의 외침이 장성을 흔들었다.

거용관의 수비를 책임지는 자가 성벽 위에서 소리쳤다.

“그럴 수 없소! 수왕, 아무리 당신이라도 절차를 밟아야만 하오! 막말로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온 게 아니라는 걸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관문의 책임자는 정말로 막말을 늘어놨다.

그랬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얼른 덧붙였다.

“무, 물론 당신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아오! 허나 열어줄 수 없는 내 입장을 이해해 주시오! 성문 앞에 천막을 펴고 최상의 대우를 제공하리다. 며칠만 기다려주면 가장 빠른 말을 보내서 대장군께 확인을…!”

‘빌어먹을! 돌아갈 때도 확인이 필요해?!’

마음이 급해서 무작정 달려온 게 실수였다.

그리고 설마 한 번 통과한 곳을 넘는 데 또 확인이 필요할 줄은 몰랐다.

책임자의 말은 평소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지금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걸 기다릴 수 없다는 게 문제일 뿐.

마른 비가 입술을 깨물 때, 전언을 들고 온 사내가 말했다.

“수왕. 일단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여기서 우측으로 백 리 정도 가면 성벽이 낮아지는 곳이 있다오. 내가 장성을 넘은 곳이지. 일단 거기로 가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사내는 이렇게 될 걸 예상한 듯했다.

제지를 당한 즉시 말을 꺼내는 걸 보면.

하지만 마른 비는 밤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는 관문의 책임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아니, 황제에게 보고를 올려. 그럼 이해할 테니까.”

“아…! 차라리 북경으로 사람을 보내는 게 빠를 수 있겠군. 그렇게 하겠소. 한데… 이해라니? 허가가 아니고?”

마른 비는 성문 앞으로 걸어갔고, 자세를 낮췄다.

그의 등판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그래. 허가 말고, 이해. 추궁은 없을 거야. 당신의 힘으로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 테니까.”

“자, 잠깐만! 지금 무얼 하는 거요? 서, 설마…?!”

마른 비는 눈길을 내려서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바라봤다.

초원의 전사들이 남하하는 걸 막기 위한 성문.

수십 겹의 철판을 덧대 만든 그것은 공성병기로 두드려도 뚫는 게 쉽지 않을 만큼 육중했다.

“당신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가야겠어.”

후아아악―!

자연기가 중첩되고, 마른 비의 등이 돌아갔다.

거대한 성문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작았지만, 마른 비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천하제일웅관의 성문을 가볍게 압도했다.

투콰아아앙―!

삼 중첩.

천둥바위를 세 번 연달아 펼치자, 성문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성벽에 박아 넣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뽑혀 나왔다.

“만약에 이 문제로 나를 쫓을 생각이면 그렇게 하라고 해.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마른 비가 전력을 개방하며 어깨를 내질렀다.

웅대한 힘이 솟구치고, 산을 허물 일격이 성문을 두드렸다.

푸콰아아앙―!

성문도 찌그러졌지만, 그전에 경첩이 버티질 못했다.

통째로 뽑혀 나온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인간의 육신이 성문을 날려 버리는 광경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도리어 생생했다.

“가자. 별비야.”

그건 선언이었다.

지금부터 나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깨부수겠다는.

항상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려온 마른 비가 이렇게나 저돌적인 행보를 보이는 건 그만큼 초조하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순간, 거용관의 성문을 날려버림으로써 마른 비는 온 천하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쪼, 쫓아라! 저 무도한 놈을 절대 놓치지 마!”

거용관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른 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남쪽으로 달렸다.

전서구 수십 마리가 일제히 날아오르고, 두 줄기 궤적이 평야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일만의 군사들이 그 뒤를 쫓았다.

하북에서 운남까지.

무림사의 한켠을 장식할 수왕의 남하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막아라!”

“절대 통과시키지 마! 무슨 수를 쓰든 저지하라!”

전력으로 달렸지만, 하늘을 나는 새보다 빠를 순 없었다.

그리고 거용관은 황제가 있는 북경과 지척이었다.

소오태산(小五台山)과 북경의 사이를 지날 때쯤 길게 늘어선 병사들이 마른 비를 가로막았다.

“환장하겠군. 어어어, 하는 사이에 수배자가 돼 버렸어. 이거 어떡할 거요?”

별비의 등에 올라탄 사내였다.

그는 기가 막힌 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뱉은 말이 그거였다.

“음……. 미안. 당신에게는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안전한 곳이 나오면 내려줄 테니 잠시 몸을 숨기고 있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황제와 담판을 지을 테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복면이라도 쓸 걸 그랬다.

어차피 초원에서 얼굴이 팔려서 초상화가 그려지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사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하아……. 이보쇼, 수왕.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긴 하는 거요? 즉흥적인 성격이라는 건 들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이야!”

마른 비가 미안한 눈으로 쳐다보자 사내는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뭐, 괜찮소. 가만히 생각하니 나름 재미있군. 그 유명한 백아의 등에도 타보고, 황군에게 쫓기기도 하고. 성문 부수는 걸 구경도 하고.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소. 부디 수배만 풀어주시오.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죽으면 안 되거든.”

마른 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사내를 봤다.

장성을 넘어온 시점에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배짱까지 두둑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올빼미 사냥을 전수받았다는 건 가을 수리에게든 겨울 달에게든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아닌가.

또는 그들이 몸을 의탁한 백강이라는 사내에게라도.

이름을 묻자, 사내가 말했다.

“백민. 루주님의 동생이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 형님이 좀 난 인간이거든. 지금은 하오문에게도 쫓기는 신세지만, 머지않아 비상하실 것이오. 가깝게 지내는 걸 권유 드리겠소.”

위험한 전장으로 친동생을 보냈다는 점에서 백강이 이번 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생만 봐도 그가 상당히 괜찮은 사내일 거라는 짐작이 갔다.

병사들이 가까워지자, 백민이 말했다.

“도와드릴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치적거리기만 하겠군. 난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등에 딱 붙어 있을 테니 한 수 보여주시구려. 아아~주 흥미진진해!”

별비가 인간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얘 뭐냐? 얘도 정상은 아니군. 긴장이 풀리니까 능글능글해졌어. 그건 그렇고, 죽일 거냐?〕

마른 비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명군이라면 모를 리 없는 수왕의 명성.

바짝 긴장해서 침을 삼키는 병사들의 얼굴이 확대됐다.

『비켜!』

뛰어난 무장은 모조리 초원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다.

마른 비의 야수 제어를 버틸 자는 없었다.

둘은 포승줄에 묶인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을 훌쩍 뛰어 넘었다.

“오오~! 이게 그 유명한 야수 제어로군!”

겨울 달, 가을 수리와 지낸다더니 야수 제어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쾌활하게 느물거리는 백민 덕분에 초조함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래. 맞아. 조급해하면 안 돼!’

공간 이동이라도 하지 않는 한 결국 도착하는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평정을 잃는 법.

마른 비는 백민 덕에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앗!”

하북을 넘기까지 세 번의 저지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급조한 병사들이 마른 비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고, 그는 어느덧 산서성의 경계에 다다랐다.

“이런! 강이라니…!”

뛰어넘는 게 불가능한 강줄기가 나타났다.

돌아가면 늦고, 강을 건널 배는 보이지 않는다.

마른 비가 난감해할 때, 백민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수왕! 저기로!”

수풀이 우거진 지형.

마른 비는 의아해하면서도 백민의 말을 따랐다.

시야를 가리는 덤불을 헤치자 웬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 빠르시군요! 하마터면 시간을 못 맞출 뻔했습니다!”

“……?”

백강의 수하였다.

그는 지체 없이 배를 띄웠고, 일직선으로 강을 가로질렀다.

“이틀도 안 돼서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수왕이 거용관의 성문을 박살 냈다고요. 강남에서 정사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지금 천하가 이쪽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수왕이 이러는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알려지는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두 가지.

최대한 빨리 운남으로 가는 것과, 주원장의 반응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황제가 추포령이라도 내린다면 매우 곤란해질 테니까.

“아직 관군의 대대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어쩌면 방관하기로 한 게 아닐지……. 당금의 황제는 누구보다 계산에 철저한 사람이죠.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과 비교하면 관문을 박살 낸 건 눈감아 줄 만하다고 여긴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완전히 용서한 것 같지도 않았다.

‘괜찮다.’, ‘죄를 사한다.’는 식의 말은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관군은 가만히 있더라도 엉뚱한 놈들이 꼬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엉뚱한 놈들?”

“네. 대협은 지금 엄청난 죄를 저지른 중죄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들이 덤빌 수 있죠. 만약 대협을 생포하거나 죽인다고 해도 황제는 그 역시 방관할 겁니다.”

사내는 열심히 노를 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대협을 최단시간에 운남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모든 지형을 무시하고 남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세요. 그러다가 경공을 펼치기 어려운 지형이 나오면 이걸 찾으십시오.”

하얀 무명천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배를 숨긴 수풀에도 이게 걸려 있던 것 같았다.

잠자코 듣던 백민이 말했다.

“추단 님과 동월 님은 오지 못할 거요. 본루도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서 두 분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거든. 대신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소. 부디 무운을.”

정중한 포권이었다.

마른 비도 와족식 포권을 취한 후에 답했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이렇게, 훗날 삭월이라 불릴 집단과 마른 비의 연이 이어졌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마른 비는 몸을 날렸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수왕이 그의 고향으로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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