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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64화 (364/463)

364화

진중(晉中), 태곡(太谷), 평요(平遙), 령석(靈石)…!

마른 비는 강을 건너자마자 쉬지 않고 달렸고, 순식간에 산서성의 중부를 가로질렀다.

관도든, 인적이 드문 길이든 가리지 않는다.

숲, 골짜기, 하천, 심지어는 산까지도 그대로 통과했다.

‘모든 지형을 무시하고 남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십시오.’

마른 비는 무식하리만치 배를 준비한 사내의 말을 따랐다.

높다란 산이 있다면 슬쩍 돌아가도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왠지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음…!’

실수였나?

산에 오를 때부터 이런 지형이 펼쳐질 거라고는 예상했다.

깎아지른 절벽.

곡풍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귓전을 스치고, 발아래로 드넓은 평야가 보였다.

문제는 내려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아니, 내려가려면 어떻게든 내려가겠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마른 비가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 걸 후회할 때였다.

“허…! 진짜로 오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똑바로 가라고 해도 보통 이런 지형이 나타나면 우회하지 않습니까?”

우측에 있는 숲에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희한한 생물을 대하듯 마른 비를 봤다.

명을 받고 대기하긴 했는데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절벽으로 올라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만큼은 루주의 명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정보를 취합한 것만으로 수왕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파악한 거겠지.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과연 루주는 대단한 분이다.

사내가 감탄을 삼키며 마른 비에게 말했다.

“이걸 착용하시지요.”

독특한 형태의 옷이었다.

튼튼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죽으로 짠 옷은 팔과 다리 사이에 불필요한 가죽이 이어져 있었다.

다리와 다리 사이도 마찬가지.

몸과 닿는 부분은 잠수복처럼 딱 달라붙는데, 겨드랑이 아래와 다리 사이로 펄럭이는 가죽이 축 늘어진다.

사지를 펼치니 마치 날다람쥐의 익막(翼膜)처럼 날개가 펼쳐졌다.

사내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와족은 짐승을 관찰하고 모방한 끝에 전투기술을 발전시켰다지요? 이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다람쥐가 비행하는 모습에서 착안한 물건이죠.”

그는 팔과 다리를 쭉 펴며 말했다.

“뛰세요! 그리고 이 자세로 곡풍을 받아 날아오르는 겁니다!”

“……그게 가능해?”

마른 비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묻자, 사내가 답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죠. 대협이 첫 실험자입니다. 이걸 만든 광공장(狂工匠)도 무서워서 못 뛰었대요.”

“…….”

미친 장인(匠人)이라니.

별호에 대놓고 미칠 광자가 붙는 걸로 보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독특한 인간들을 모아놓은 중원 칠대 기인 중에서도 정점의 똘끼를 자랑하는 광공장은 희한한 물건들을 만들어서 실험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스스로는 발명가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그의 발명품들은 사람 여럿 잡은 전례가 있어서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기피하는 자였다.

“이렇게 팔다리를 펴고 바람을 타세요. 그리고 몸을 틀어서 방향을 조절하는 겁니다. 잘만 하면 경공을 펼쳐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거예요.”

사내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론상으로는.”

마른 비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내 말대로만 된다면 비약적으로 시간을 줄일 수 있으리라.

마른 비는 비행의(飛行衣)를 입었고, 절벽 끝에 섰다.

“크라앙?”

―내 것도 있냐?

별비가 묻자, 마른 비가 한어로 옮겨줬다.

사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요. 백아 님은 되돌아가야죠. 네 발로 뛰어요, 그냥.”

별비가 철중구에게 배운 욕을 남발하며 산을 내려가고, 마른 비는 용감하게 몸을 날렸다.

기능하지 않을 물건이라면 백강이 준비했을 리가 없을 터.

처음엔 그대로 추락하나 싶어서 철렁했는데, 팔다리를 쫙 펴니 곡풍이 익막을 밀어 올렸다.

퍼얼럭―!

놀랍게도 바람을 받는 순간, 몸에 딱 달라붙었던 가죽이 부풀어 올랐다.

비행의는 익막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로 부력을 이용하는 물건이었다.

“와아아~!”

마른 비가 바람을 탔다.

비행이라기보다는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하강에 가깝지만, 그는 분명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할아범이 어둔 날개를 붙잡고 나는 기분이 이러려나?’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상의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날짐승이 길짐승보다 빠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른 비는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한 감각이었다.

‘깃털 날리기!’

부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기술이 생각났다.

자연기로 몸을 가볍게 하자, 하강 곡선을 그리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바람의 결.’

마른 비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바람을 헤칠 가장 빠른 길이.

와족의 기예들이 시전되는 순간, 마른 비는 새가 부럽지 않을 속도로 바람을 갈랐다.

“……!”

“…! …! ……!”

‘저건 뭐지?’

절벽 아래, 평야의 초입부에 인파가 몰려 있었다.

병장기를 든 걸로 보아 무림인 같은데, 그들은 마른 비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뭐라고 떠들던 그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고, 마른 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엉뚱한 자들이 꼬일 거라고 했지? 날 잡으러 온 건가?’

멀찌감치 따돌린 그들에게선 살기가 느껴졌다.

마른 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대호가 그들을 덮쳤다.

“크아아아앙!”

산을 내려온 별비였다.

별비가 마른 비를 향한 살기를 못 느낄 리 없었다.

적들이 포진을 풀고 등을 돌린 순간, 하얀 발톱이 그들을 덮쳤다.

제대로 싸워도 상대가 안 되는데 기습까지 당했으니 적들에겐 승산이 없었다.

평야가 피로 물들이는 걸 확인하며, 마른 비는 착지를 준비했다.

후우우욱―

얼마나 먼 거리를 날아온 걸까?

몸을 날린 절벽이 병풍 속의 그림처럼 보였다.

깃털 날리기를 추가로 발동하자 몸이 사뿐히 떠올랐다.

마른 비는 상처 하나 없이 평야의 끝에 내려설 수 있었다.

“휴우… 나중에 또 해봐야지.”

진귀한 경험이었다.

서서히 바람을 뱉는 비행의를 벗어서 적당한 곳에 던져뒀다.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알아서 찾아가겠지.

마른 비는 고개를 돌려서 뒤편을 바라봤다.

‘별비를 곤란하게 할 만한 적은 없어. 먼저 간다!’

앞을 막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저게 끝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먼저 이동하며 길을 뚫는다.

마른 비는 평야에 이어진 숲으로 몸을 날렸다.

“……?”

인기척이 감지된 건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숲을 헤치며 나아가는 마른 비의 옆으로 사람 하나가 따라붙었다.

그의 질주를 쫓아올 만큼 뛰어난 주력(走力).

상대는 적의가 없다는 걸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복면?’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익숙한 기운이다.

기억을 더듬은 끝에, 마른 비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후개?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곧바로 정체가 탄로 난 게 탐탁지 않은지 복면인이 눈썹을 씰룩였다.

후개가 신중히 주위를 살피더니 마른 비에게 따라붙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곤 곧바로 불평을 쏟아냈다.

“미친 거 아니어요? 무슨 생각으로 거용관을…! 당신이 여포라도 되는 줄 알어요? 그리고 아까 그건 뭐여요? 어디서 그런 희한한 물건을 구해가지고!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후개는 황성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상당한 고련을 거친 건 물론이고, 영약이라도 주워 먹었는지 흘러나오는 기운이 상당했다.

허나 마른 비의 진보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걸 눈치챈 후개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쳇. 나도 어딜 가든 천재소리 듣는 사람인데. 뭔 짓을 하면 이렇게 강해지어요? 어이가 없네요. 수왕, 괴물이네요.”

이상한 말투는 여전했다.

‘말 잘하잖아? 알아듣기 힘드니까 똑바로 말해!’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관뒀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왜 온 거야?”

곧바로 본론이었다.

후개도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도와줄까요?”

“……?”

의외의 순간에 튀어나온 뜻밖의 제안.

마른 비가 눈으로 묻자, 후개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정보. 필요할 것 같아서.”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운남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고, 황제의 동향도 궁금하다.

평야에서 나타난 적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마른 비가 침묵을 지키자, 후개가 말을 이었다.

“구칠 장로를 흉내 낸 마교의 주구를 잡는 데 수왕이 도움을 줬네요. 덕분에 내분을 수습하고, 방주의 자리를 굳혔어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왔네요. 냉큼 갚아버리려고.”

그게 전부는 아니리라.

마른 비가 입을 열려는 찰나, 후개가 선수를 쳤다.

“맞네요. 운남의 상황이 궁금한 거. 수왕의 부족에 대해서도. 거긴 본방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정보가 없네요.”

“그럼 거절할래. 가장 궁금한 게 운남의 상황인데 그걸 모르면 의미가 없지.”

후개가 끝까지 들어보라는 듯 말을 서둘렀다.

“천하 정세. 그리고 앞을 가로막을 적들을 따돌리는 것. 관군의 개입도 확실히 막아줄 수 있네요. 운남으로 가는 거죠? 도움을 주는 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부족하네요.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게 개방이 돕겠네요.”

딴 건 제쳐두더라도 마지막 제안은 솔깃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운남에 가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니까.

마른 비는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읊어 봐.”

“……수왕, 뭔가 변했네요. 그런 말투 아니었는데. 내가 아랫사람 아니라는 거 명심했으면 하네요.”

후개는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거용관을 박살 낸 것에서 마른 비의 심정을 유추했는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세간의 추측대로 황제는 본격적으로 숙청 작업에 돌입했네요. 곁가지는 벌써 다 쳐냈고, 개국공신들에게까지 마수가 뻗치고 있어요. 머지않아 피바람이 불 거네요. 상우춘 장군을 황제가 죽인 거 알어요?”

“알아.”

후개는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개방조차 간신히 알아낸 정보를 마른 비가 알고 있자 당황한 눈치였다.

“그걸 어떻게…! 흠흠, 아무튼 그 덕분에 수왕에게는 유리한 상황이네요. 황제는 무림에까지 눈 돌릴 틈이 없네요. 논공행상 이후에 황성에 머물며 본방은 황실의 유력 인사들과 연을 만들어 두었어요. 현 정황을 이용해 관군의 개입 정도는 확실히 막아줄 수 있네요.”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주원장이 눈 돌릴 틈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황제가 개입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리라.

백강의 수하가 말했듯이 그는 방관하려고 마음먹은 듯하니까.

개방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로 보아 자신이 고마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솔직하진 않아.’

마른 비가 후개에 대한 평을 수정할 때도 말은 이어졌다.

“정사대전이 극으로 치닫고 있네요. 앞에 말한 정황과 무림 세력의 상잔. 황제 입장에서는 개입할 이유가 없어요. 방관 속에서 투쟁은 격화되고 있죠. 점창의 주력이 전부 투입됐고, 수왕의 친구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하네요. 이번 일, 점창과 관련 있죠?”

떠보는 말투였다.

아무리 운남의 상황을 몰라도 그 정도는 벌써 캐냈을 텐데 이러는 게 슬슬 짜증이 났다.

마른 비가 인상을 쓰자, 후개는 말을 돌렸다.

“수왕을 막는 자들, 크게 두 부류네요. 수왕을 잡아서 황실에 넘기려는 자들과… 사파.”

“사파?”

앞의 부류는 이해가 된다.

자신을 잡아서 황실에 잘 보이거나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자들.

주원장이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지만.

의외인 건 사파였다.

“진시황릉. 여산에 들었을 때, 수왕이 사파에 대한 공격을 진두지휘했다는 소문이 돌았네요.”

“……들은 적 있어. 그게 대체 어디서 나온 소리야?”

초원으로 올라가다가 객잔에서 합석한 사내에게 들은 소문.

점창의 회의에서 운검이 공유립에게 했던 언급이기도 했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지금 세간엔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몰라요. 누가 퍼뜨린 건지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소문인데, 확대 재생산되고 있죠. 어이없게도 그걸 믿는 자들이 많어요.”

특히 식구들을 잃은 자들이 그랬다.

고증자의 허풍에 속은 것도 억울한데, 자파의 제자들이 몰살한 경위도 모른다.

그 와중에 퍼진 유언비어는 화를 낼 대상을 찾던 자들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복수하고 싶어도 건드릴 수가 없었는데, 수왕이 국문이나 다름없는 거용관을 부순 거네요. 다시없는 기회죠. 상당한 수가 몰려들고 있어요.”

이건 꽤 심각한 이야기였다.

쉬지 않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앞을 막는 놈들이 늘어나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네. 난 지금 오해를 풀고 사정 봐줄 여유 없어. 당신이 전해줘. 날 막으면 죽을 거라고.”

후개가 흠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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