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수왕… 내가 아는 수왕이 아니네요. 왜 이렇게 변한 거죠?”
말투부터 태도까지, 후개는 너무도 변해버린 마른 비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변하긴 뭘 변해. 난 똑같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후개는 전보다 힘이 들어간 어조로 말했다.
“친구 하자고 했을 정도로 살갑게 굴던 수왕이 나를 제대로 보지도 않어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네요. 뭐가 수왕을 이토록 초조하게 하는 거죠? 식구들에 대한 걱정? 수왕의 부족엔 뛰어난 전사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정체를 확인한 뒤로는 후개와 눈 한번 맞추지 않았다.
평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른 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후개를 쳐다봤다.
‘뛰어난 전사가 없냐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도움을 주려는 것도 사실이지만, 후개의 진짜 목적은 와족과 운남의 상황을 캐려는 데 있다.
상대도 솔직하지 않은데 순순히 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마른 비는 적당히 둘러대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개방은 벌써 운남에 침투 중일 거고, 그들의 능력이라면 짧은 시일 내에 원하는 정보를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자잘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급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두 명.”
“……?”
“부족 내에 나보다 강한 사람이 두 명이야.”
“……?!”
후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투와 무칼리를 쓰러뜨린 이래로 수왕의 힘은 십좌에 준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전투화장을 쓴 결과지만, 세인들이 거기까진 알 수 없으니까.
한데 그런 수왕보다 강한 사람이 둘이라니?
후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럴 리가?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오? 일개 부족이 십좌급의 고수를 셋이나 보유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얼마나 놀랐는지 후개는 자신의 말투가 변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마른 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지금의 나라면 할아범을 능가할지도. 어쨌든 나 이상의 전사가 둘이라는 건 사실이야.”
“…….”
표정과 어조로 보건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정보다.
그래서 더 믿기지 않았다.
“그럼 뭐가 걱정이오? 그 둘과 당신만으로도 어지간한 문파 하나는 찜 쪄 먹을 전력인데. 그들도 당신처럼 반려수가 있겠지? 짐승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후개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십좌급의 무인 세 명이 백아 같은 영수를 데리고 총타를 기습한다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못 막아. 정면 대결이라면 모를까, 기습을 받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막는다…!’
와족의 나머지 병력을 제외한 결과가 그렇다.
후개가 식은땀을 흘릴 때, 마른 비가 답했다.
“알아. 굉장한 전력이라는 거. 하지만… 느낌이 안 좋아. 태어나서 이렇게 불안한 적이 없었어.”
“또 그놈의 감 타령이오?”
“응.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 난 내 느낌을 믿어.”
숲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른 비는 정면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 내가 운남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거 하나면 돼. 가능하겠어?”
겨우 충격에서 벗어난 후개가 표정을 수습했다.
“개방을 뭐로 보는 것이오? 내가 방주의 자리를 굳히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고작 그 정도로 그친다고? 그건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 더해 우리가 습득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해주리다. 당신을 돕는 자들에게 말하시오. 우리와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을 고했다.
“이제 보기 힘들겠네. 미리 축하해. 당신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방주가 될 테니까. 도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보기 싫다는 투로군. 이거 섭섭한데? 나는 청개구리 같은 심보를 가졌다오. 원래는 나도 이걸 끝으로 볼 생각이 없었네요. 하지만 기분 나빠서 안 되겠네요. 지긋지긋하게 들러붙을 테니까 꼭 살아남어요.”
정신이 드니 또 말투가 변한다.
마른 비가 피식 웃으며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야.”
화아아악―!
숲이 끝나고, 시야가 열렸다.
허리 높이의 풀들이 빼곡한 평야.
후개는 거기서 뒤로 빠졌다.
“난 여기까지네요. 수왕, 건투를 빌어요.”
마른 비는 후개의 인사에 대꾸하지 못했다.
들판의 좌측으로 대규모 병력이 기동하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삼백에 가까운 인원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본방의 교란책이네요. 삼백의 인간 사냥꾼들. 저들은 잘못된 정보를 받고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어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을 테니 신경 끄고 쭉 가면 되네요.」
등 뒤에서 날아온 후개의 전음이었다.
마른 비는 새삼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이 많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중원 무림인들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어떻게 알고 갈 길을 선점하여 기다리고 있던 것인가.
마른 비는 얼굴을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망설이지 마. 고민할 여유도, 필요도 없어. 앞을 막으면…!’
죽인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압도적인 힘으로 길을 뚫고, 내 의지를 알린다.
그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려드는 걸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마른 비는 직감했다.
그가 마음을 모질게 먹을 때, 전음이 날아들었다.
「개방이 손을 더한 모양이군요. 그들을 믿어도 된다면 오른 주먹을 쥐어주세요.」
“……?”
전음이 날아온 방향을 보니, 평온한 얼굴의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소로를 느릿느릿 이동 중이었는데, 마른 비 쪽을 보지도 않았고, 무인들의 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루주란 사람의 수하들…!’
목소리로 보아 실제 나이는 삼십 대에 불과하리라.
첩보와 잠행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
전음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감쪽같은 위장이었다.
마른 비가 주먹을 꽉 쥐자,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건지 곧바로 전음이 날아왔다.
「알겠습니다. 개방이 개입한 걸 포착하고 따돌릴지 말지를 고민 중이었죠. 루주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노부부 중 남편으로 위장한 자의 전음이었다.
그는 부인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전음을 보내면서도 입술 한 번 달싹이지 않았다.
부인에게 머리를 기대며, 사내가 말했다.
「들판에 있던 놈들은 개방이 치웠지만, 그 뒤가 문제입니다. 분서(汾西)를 넘으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긴 요충지라서 정예병이 주둔합니다. 그리고 분서를 관할하는 성주는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죠.」
마른 비를 통과시키지 않을 확률이 높단 뜻이었다.
어감으로 보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획에 나설 것 같았다.
마른 비가 정면 돌파를 떠올릴 때,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사내가 말렸다.
「워, 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었어요. 대협의 무력이라면 뚫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이 이상 관군과 마찰을 빚으면 황제의 태도가 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노인은, 아니 사내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개방과 저희가 눈을 돌려놔서 아직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계속 달리다가 무명천이 걸린 곳에서 허리를 낮추세요.」
마른 비는 속도를 올렸고, 아무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렀다.
자세히 보니 여긴 앞쪽보다 지대가 낮은 곳이었다.
그리고 허리까지 자란 풀로 인해 누군가를 발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경사가 높아진다고 느낄 때쯤 하늘거리는 무명천이 시야에 잡혔다.
사삭―
허리를 낮추는 순간이었다.
흙으로 범벅이 된 사내들이 마른 비를 끌어당겼다.
“대협! 이리로!”
“……?!”
발밑에는 허벅지가 잠길 만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는 길게 파놓은 참호처럼 정면의 들판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거 파느라 뒈질 뻔했습니다. 이 길을 쭉 따라가세요!”
“이번에 우리가 도운 거 잊으면 개새낍니다? 나중에 루주님께 곤란한 일이 생기면 꼭 도와주십쇼!”
사내들은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벌겠다.
마른 비는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곧바로 고랑에 진입했다.
‘대단하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통로와, 머리 위를 덮은 풀.
들판의 풀을 좌우로 당겨서 교묘하게 엮은 천장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 주었다.
지대가 올라가고 성벽이 가까워지면 발각될 수밖에 없는 지형에 낸 은로(隱路)였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 긴 길을 낸 거야?’
광활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통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며 이런 작업을 해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였다.
풀 천장 사이로 성벽이 비치는 지점까지 왔을 때, 마른 비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다음은? 설마 성벽 아래까지 구멍을 팠을 린 없을 텐데?’
마른 비가 궁금해할 때, 목소리가 들렸다.
“대협! 이쪽으로!”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인 중년의 사내였다.
피로에 찌든 얼굴 속에서도 날카로운 안광이 빛났다.
“마차 행렬이 지나갈 겁니다. 분서에 적을 둔 상단이죠. 상주가 성주와 가까운 사이고, 상행을 마치고 복귀하는 터라 의심받을 소지는 없습니다. 상단에 심어둔 저희 측 요원이 마차 하나를 맡고 있습니다. 잠행, 가능하시죠?”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는 마차가 지나는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운남에서 흘러나온 자금의 삼 할이 용병단에 들어간 정황을 추가로 포착했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군길산이 움직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죠.”
“군길산…….”
차유람이 훔친 혈랑조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자.
십좌를 움직일 정도라면 공지량의 준비가 실로 철저하다는 방증이었다.
식구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른 비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한 집단이라면 군길산 하나만으로도 박살이 났을 겁니다. 하지만 식구들께선 혈조단을 손쉽게 물리쳤죠.”
사내는 힘내라는 눈빛으로 덧붙였다.
“평정심을 잃지 마세요. 어떤 시련이 오든 절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저희가 운남까지 보내드릴 테니 마음을 다스리세요.”
마른 비는 갑자기 울컥해졌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가 주먹을 내밀자,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푸근하게 웃었다.
“수왕의 행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끓어올랐죠. 당신은 잃어버린 제 꿈을 현실에 구현한 영웅입니다. 부디 승승장구하시길.”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고, 사내들의 진심이 오간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 더 극적인 작별인사를 나누었을까?
“정말 고마워. 당신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
사내의 미소는 흙먼지 따위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멋졌다.
그는 적절한 시점을 가늠하다가 수신호를 보냈고, 그에 맞춰 마른 비가 몸을 날렸다.
수왕의 은신을 간파할 자가 상단에 있을 리 없었다.
마차가 가까워지자, 마부석에 앉아 말을 부리던 사내가 보일 듯 말 듯 한 손짓을 보냈다.
‘아래로?’
스아악―
마른 비는 빨려들 듯이 마차의 아래로 침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키에 딱 맞는 홈이 보였다.
안으로 쑥 들어간 공간은 완전히 엎드려서 보지 않는 한 발각되지 않을 만큼 은밀했다.
‘정보 단체……. 정말 대단하구나!’
모조리 힘으로 뚫으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 가능하게 만들었겠지만,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른 비는 분서의 성문에 가까워졌을 때 그걸 여실히 깨달았다.
‘삼엄해…!’
성벽 전체에서 뿜어지는 군기.
성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벽 위에까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갖춘 채 평야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개방과 루주의 수하들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이들과 맞붙었으리라.
아니, 평야에서부터 혈전이 벌어졌을 거다.
자신도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까.
마른 비가 기감을 퍼뜨려서 외부의 상황을 가늠할 때였다.
“정지하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성문을 지키는 병사의 발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