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저벅, 저벅.
‘스물? 아니, 그 이상…!’
마차를 검문하려는 것인지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성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마차의 행렬을 세웠고, 둘로 나누어져 주위를 둘러쌌다.
마른 비가 몸을 숨긴 마차는 앞에서 다섯 번째.
좌우에 선 병사들의 호흡이 느껴졌다.
“도적들이 활개를 친다고 하던데……. 무사히 상행을 마치셔서 다행이오, 부상주.”
앞쪽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큰 기운을 지닌 걸로 보아 경비대장인 듯했다.
부상주라 불린 자가 대꾸했다.
“허허, 고맙소. 못돼먹은 놈들이 마차를 노렸지만, 호위들이 멋지게 해치웠지. 덕분에 큰 건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소.”
흡족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부상주는 너털웃음을 짓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한데… 성문 경비가 왜 이리 강화된 것이오? 거의 전시체제에 준하는 상황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게요?”
경비대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감각을 집중하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흠……. 실은 무도한 중죄인이 북쪽에서부터 남하하고 있다오. 지금 하북과 산서 일대가 그자 때문에 시끄럽지. 세상에, 살다 살다 거용관을 부수는 인간이 나타날 줄 상상이나 했겠소?”
“거, 거용관을?!”
부상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경비대장은 엄청난 정보를 알려주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수왕. 북벌에서 활약한 이민족 사내에 대한 소문은 들어봤겠지요?”
“수왕?! 알다마다! 최근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아니오? 황제 폐하와도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는데……. 그자가 거용관을 부쉈다고?!”
경비대장은 골치가 아픈 듯 말을 흐렸다.
“그렇소. 그자가 이리로 오고 있다는데……. 어쩐 일인지 황실에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는 상황이오. 그럼 그냥 놔두면 될 텐데…… 성주님에 대해 아시지 않소.”
부상주는 그제야 상황을 짐작하고 탄식했다.
“잡으려는 거군. 수왕을. 황실에 눈도장을 찍을 속셈으로.”
“정확하오.”
부상주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그게 가능하오? 분서의 병사들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그자는 십좌에 비견할 만한 고수라고 하던데…….”
경비대장은 손바닥을 탁 소리 나게 쳤다.
그리고 미치겠다는 어조로 불평을 토했다.
“불가능하지! 맨손으로 거용관 성문을 부순 괴물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이오? 죽일 생각으로 싸워도 전멸을 각오해야 할 판인데, 생포를 하라더군!”
“매, 맨손……. 허허, 생포라니…….”
부상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성주가 공에 눈이 머셨… 아,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시오.”
“눈이 멀었지! 어떻게든 기어 올라갈 생각에 정신줄을 놨어! 이래서 현실감각 없는 책상물림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아랫사람만 죽어나는 것이오. 빌어먹을! 지가 칼 들고 싸우던지!”
적나라한 비난이었다.
부상주는 멋쩍은 얼굴로 말을 아꼈지만 경비대장에게 공감하는 것 같았다.
“고생이 많으시구려. 수왕이 이쪽으로 오지 않길 기도해야겠어. 자, 여기. 약소하지만, 수하들과 함께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하시라는 의미에서….”
“아, 아니! 뭘 이런 걸 다….”
“성문 경비대가 불철주야 고생하는 덕에 분서의 백성들이 편안한 것 아니겠소? 그 노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감사 표시지요.”
“허흠! 우리가 뭘 하는 게 있다고. 허나 부상주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니….”
상관에 대한 뒷담화와 뻔하디뻔한 인사치레, 그리고 뇌물 수수의 현장이었다.
병사들이 눈과 귀를 닫고 건성으로 마차를 검문할 때였다.
마른 비만 들을 수 있는 전음이 들려왔다.
「쌍으로 놀고 자빠졌네. 제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마부석에 앉은 백강의 수하였다.
얼굴을 볼 순 없지만, 그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전음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무사통과하겠군요. 성문을 통과할 때까지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그 근처엔 제법 빠릿빠릿한 놈들도 있으니까요.」
괜한 걱정이었다.
주저앉아서 마차 밑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마른 비가 걸릴 리는 없었으니까.
삼엄한 군기로 가득 찬 성문을 지나자 전음이 들려왔다.
「성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제가 신호를 드리면 우측 골목으로 빠지세요. 그리고 남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거긴 경계가 허술하니 쉬울 거예요. 흰 천에 싸인 보퉁이를 챙겨 가십시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무운을 빕니다.」
마른 비는 신호를 받는 순간 몸을 날렸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조금 나아가니 사내가 말한 보퉁이가 보였다.
안에는 달리면서 먹을 수 있는 벽곡단과 물통,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단약이 들어 있었다.
‘정말 세심하네.’
그러고 보니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 정도로 기운이 쇠할 리는 없지만, 백강은 긴 안목에서 마른 비의 체력을 보존하고자 했다.
‘이런. 여기도 탁 트였네.’
성문 너머에는 관도가 깔린 야트막한 평야가 있고, 그 뒤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마른 비는 행인들 사이에 녹아들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들의 걸음을 따르다간 시간이 한없이 지체될 테니까.
‘간다!’
마른 비는 성문을 넘자마자 질주를 시작했다.
“어엇!”
“수왕?! 어떻게 북문을?!”
성벽 위에서 소란이 일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뭣들 하고 있나! 쫓아라!”
남문의 경비대장이 외쳤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병사들이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마른 비는 평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끄응……. 기껏 종적을 감췄는데 곧바로…!」
관도를 걷던 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옆을 지나치는 마른 비에게 빠르게 말했다.
「모습을 드러낸 이상 저 앞은 힘으로 뚫어야 합니다! 낭인들과 사파의 군소방파 셋! 총합 이백사십 명이…!」
『고마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숲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네 무리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마른 비를 발견하자마자 무기를 뽑으며 외쳤다.
“역시! 이쪽이었어!”
“그럼 그렇지! 관군 나부랭이가 수왕을 잡을 리 없지!”
“십좌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놈이다! 절대 방심하지 마!”
“놈을 잡을 때까지는 힘을 합치는 거닷!”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자들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을 잡겠다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봐줄 이유가 없었다.
“수왕! 널 잡고 낭인계의 정점에 설 것이다! 내가 바로 하남의 낭인살검(浪人殺劍)…!”
퍼어억!
낭인살검의 몸통이 날아갔다.
뒤이어 달려든 낭인들도 일 합을 받아내지 못하고 팔다리가 뜯겨 나갔다.
“아아악!”
“커헉…!”
“자, 잠깐! 소문과 다르잖아?! 수왕은 전쟁터가 아니면 살인을 자제한다고…!”
그걸 믿고 온 것인가.
자신이 살인을 꺼린다는 소문을 듣고 죽진 않을 테니 한번 비벼보기라도 할 생각으로?
“괘씸하네.”
마른 비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살심을 끓어올렸다.
“당신들, 날 죽일 생각으로 온 거잖아? 살아 돌아갈 생각하지 마.”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입신양명과 일확천금을 노리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 이의 목숨을 앗으러 온 놈들.
마른 비는 거리낌 없이 힘을 쏟아냈다.
“크아악!”
“무, 물러나! 죽는다!”
불나방들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숨 몇 번 들이켤 사이에 핏물이 내를 이루었다.
「수왕. 숲 안쪽에 있는 놈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회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대로 가.”
나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동월루의 요원이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사파의 중견 방파가 여섯. 대형 방파로는 사사혈림(死邪血林)과 진사맹(眞邪盟)이 왔습니다. 인간 사냥꾼 중 육림회(肉林會)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수왕이 여기로 올 거란 걸 예측할 만큼 상당한 놈들입니다.」
“생각보다 많네. 후개가 내 말 전했어?”
「……?」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뜻을 이해하고 답했다.
「확실히. 앞을 막으면 죽을 거라는 걸 듣고도 코웃음 치더군요.」
나름 자신이 있는 놈들이란 뜻이리라.
아니면 수왕의 명성이 과장되었다고 여기거나.
“됐어, 그럼.”
그 말을 남긴 채 마른 비는 숲으로 진입했다.
퍼억! 빠악! 우드득―!
듣는 것만으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인간의 골육이 분쇄되고 찢어지는 소리.
뒤를 잇는 건 처절한 비명이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
뇌수가 터지고, 박살 난 뼈가 흩뿌려진다.
밤이 아니었다면 먹은 걸 전부 게워냈으리라.
숲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아!”
공포에 절은 눈빛.
대머리에 자묵을 새긴 사내가 괴성을 질렀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지만, 포물선을 그리기도 전에 잡히고 말았다.
챙강!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 어둠속에서 번쩍였다.
퍼어억!
거한은 상반신이 날아간 채 숨이 끊겼고, 주위에 있던 세 명은 무기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
악명 높은 인간 사냥꾼들의 집단.
육림회의 회주와 세 명의 호법이 힘도 못 쓰고 절명했다.
“이, 이…….”
사사혈림의 림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 달라…!”
북벌.
림주는 사도련의 휘하에서 북벌에 참전했다.
그는 수라를 보았고, 수왕의 전투를 목격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사사혈림뿐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진사맹과 육림회가 함께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때의 수왕이 아니야…!”
오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총단에서 나오지 않았다.
육림회주와 진사맹주에게 제의를 건네지도 않았으리라.
림주는 목줄을 죄는 공포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퍼억! 뿌악! 빠가각―!
독, 함정, 진법, 암습…….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절망적인 힘 앞에서 모든 게 무너지고 있었다.
푸른 눈을 번뜩이는 사내는 말 한마디 없이 살육을 행했다.
“이런, 빌어먹을! 림주! 정신 차리시오! 이대로 죽을 건가!”
진사맹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악몽의 한복판에서 들려온 외침.
림주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주위를 돌아봤다.
‘그, 그래! 진사맹주가 살아 있고, 호법과 장로들이 건재하다! 할 수 있어!’
사사혈림의 림주는 공포를 떨쳐내며 소리 질렀다.
“놈도 인간이다! 사백 명을 죽였으니 내공이 바닥났을 것이야! 동시에 덤비면 이길 수 있다!”
림주의 검에서 검강이 치솟았다.
“쳐랏!”
스파파팟―!
사사혈림과 진사맹의 수뇌부 스물세 명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검기와 검강을 두른 스물세 자루의 검이 마른 비의 육신을 두드렸다.
쩌저저저정!
피부가 갈리는 소리가 나야 한다.
뼈가 끊기며, 피가 튀어 올라야 한다.
인간의 몸을 절단하는 감각이 손에 전해져야 한다!
그런데…!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모조리 막혔다.
단 한 자루의 검도 피를 보지 못했다.
북벽의 참격을 받아낸 육신.
수왕의 몸은 깨지지 않는 금성철벽과 같았다.
『난 경고했어.』
쿠우웅―!
스물세 명이 검을 놓친 채 무릎을 꿇었다.
부복하듯 머리를 조아린 그들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부릅뜬 눈에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날 막으면 죽을 거라고.』
“이, 이것…! 원의 기마를 쓰러뜨린…!”
야수 제어의 압력을 이겨내며 고개라도 들어 올린 자는 단 둘뿐이었다.
사사혈림주와 진사맹주.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는 전율적이었다.
“사, 살려…!”
『안 돼.』
푸아아악―!
육림회, 사사혈림, 진사맹.
중원 북부에서 악명을 떨치던 거파 세 개가 멸문한 순간이었다.
남쪽 하늘의 제왕이 피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이자, 그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준 일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탐욕에 빠진 자들은 멈출 줄을 몰랐으니, 그들의 눈은 운남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