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빡! 퍼퍽! 콰아앙―!
무자비한 폭력.
마른 비는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주먹과 발이 뻗어 나갈 때마다 인간이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그의 몸은 적들의 피로 물든 지 오래였다.
“훅, 후욱…!”
팔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사람을 죽였다.
눈에 들어온 자는 가리지 않았다.
돌파나 도주가 아닌, 살인 그 자체에 집중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동월루의 요원이 신음을 흘렸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이번 전음은 마른 비에게 보낸 게 아니었다.
어둠에 덮인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대꾸했다.
「아니. 딱 좋다. 저 정도는 해야 날파리가 꼬이지 않아. 덤비면 죽는다는 걸 확실히 인식시켜야 해. 길게 보면 그래야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 그래도 이건…….」
숲의 진입로부터 여기까지.
백 장에 불과한 거리를 돌파할 동안 마른 비가 죽인 사람은 칠백 명에 육박했다.
적들이 경고를 무시한 채 달려든 결과지만, 이 정도면 살성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수왕답지 않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평정심을 잃어버린 게 아닐지….」
상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답했다.
「눈을 봐라.」
「눈… 말입니까?」
우려를 표했던 사내가 시선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
피에 젖은 몸과 대비되는 푸른빛은 영롱하기까지 했다.
「조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의외로 차분하군요.」
「그래. 차분하다. 모질게 손을 쓸 뿐, 그는 지극히 냉정해.」
조장이 힘주어 덧붙였다.
「저 눈을 기억해라. 저런 눈을 한 자와 마주친다면 절대 싸워선 안 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내 말 명심하도록.」
냉철한 이성을 유지한 채 기계적인 살육을 행한다.
거기엔 어떤 허점도, 빈틈도 없었다.
마른 비의 눈을 살핀 사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시무시하군요.」
적들의 심정도 사내와 같았다.
요행을 바라고 온 생쥐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고양이가 지치기를 기다리던 쥐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고양이 따위가 아니라 발톱을 드러낸 대호라는 사실을.
「길이 열린다.」
조장의 말이 떨어진 순간, 숲이 흔들렸다.
혹시나 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자들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다.
저들은 증인이었다.
수왕의 힘과 의지를 목격한.
‘저들이 전하겠지.’
수왕의 앞을 막는 자, 죽음뿐이라고.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다고.
마른 비는 작심하고 펼친 한 번의 살육으로 생쥐들의 투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긴장을 풀지 마라. 송사리들은 빠지겠지만, 이러고도 남는 놈들은 대물일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조장님.」
분서의 남쪽 숲, 마른 비의 안내를 담당한 사내가 말했다.
「좋아. 움직이자.」
‘드디어 빠지나?’
마른 비는 적들 한 명 한 명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저리 날 듯한 살육 끝에 겨우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른 비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피곤해…….’
누군가는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인간을 죽이는 건 마음이 깎이는 일이다.
마음을 아무리 모질게 먹어도 그렇다.
전쟁을 겪으며 셀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마른 비에게 살인은 여전히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감각해질까 봐, 마음 한 켠이 피로 물드는 듯한 두려움이 육신의 피로보다도 그를 힘들게 했다.
‘……어쩔 수 없어.’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지금이었다.
식구들에게 위기가 닥쳤고,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데 그런 자신을 막는 자들.
이 순간만큼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걸 각오해야만 했다.
“후웁.”
마른 비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표정엔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앞은 어때?”
우호적인 기운이 머리 위를 오갔다.
그들 중 가장 큰 기운을 지닌 자가 대꾸했다.
「사파의 중소 방파 네 곳이 물러납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겁을 먹어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니 무시해도 됩니다.」
조장은 조원들에게 보고를 받는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추가로 숲에 진입하던 자들이 백오십. 그들도 후퇴합니다. 덤비면 몰살한다는 걸 전해 들은 듯하군요.」
마른 비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낄 때쯤, 조장이 덧붙였다.
「잘하셨습니다. 불가피한 일이었고요. 손에 사정을 두었다면 끝도 없이 몰려왔을 겁니다.」
“…….”
마른 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전진할 뿐.
조장은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십오 장 앞. 바닥이 꺼지는 함정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설치한 놈들은 전부 빠졌으니 슬쩍 뛰어넘으시면 됩니다.」
「정지. 사환문(邪幻門)이 남겨놓은 진법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시길. 거의 해체됐습니다.」
백강의 수하들은 수는 적지만 대단히 유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발 앞서 장애물들을 치웠고, 마른 비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전음을 들을수록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난감한 음성이 들린 건 숲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조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싸움이 벌어졌군요. 지원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싸움?”
마른 비가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기감을 끌어올려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멉니다. 백민, 그 녀석이 적들의 첩보조를 마주쳤는데 숫자가 많다는군요.」
“그 사람 간 거 아니야? 싸우고 있었어?”
조장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서둘렀다.
「그럴 리가요. 루주 님의 동생인데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야죠. 백아 님을 데리러 갔습니다.」
“아, 별비…!”
상황이 정신없이 진행된 탓에 까맣게 잊었다.
별비를 믿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지만, 미안한 일이다.
「덩치가 너무 커서 분서로 들일 방법이 없더군요. 동남쪽의 강을 타고 이동 중입니다. 곧 만나실 거예요.」
마른 비의 발이 멈췄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싸움에 휘말린 게 아닌가.
조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만류했다.
「그러지 마세요. 가시는 길과 반대 방향입니다.」
“그래도…!”
「지체되면 백아 님과의 합류 시기가 어긋납니다. 그러면 기껏 준비한 것들이 틀어져요.」
조장은 자부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이래 봬도 하오문 시절에 최정예로 불리던 요원들입니다. 잡것들은 저희만으로 충분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장이 동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아쉬운 듯 덧붙였다.
「계속 모시지 못해 아쉽군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잠시 거지들의 안내를 받으시길.」
“……?”
마른 비가 고개를 들 때였다.
숲이 끝나자마자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껄껄! 중원 최고의 풍운아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반갑소, 수왕! 개방의 분서 분타주 황무근이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목소리만 들려왔다.
전음이 날아온 곳은 땅속이었다.
「놀랐소? 놀랐겠지. 이런 건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노부가 지둔술에 일가견이 있는 편이오!」
“…….”
마른 비가 잠자코 있자, 황무근은 혼자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대를 돕는 자들, 어디 놈들이오? 빠릿빠릿한 게 보통이 아니더군. 일처리 방식으로 볼 때 하오문 같은데…… 맞소?」
후개도 그렇더니 개방은 떠보는 게 일상인 모양이다.
백강의 세력에 대해 발설할 이유가 없으니 마른 비는 침묵을 지켰다.
「흠. 그렇지, 그렇지. 그건 우리가 알아내야지. 아무튼 본방이 돕는데 그런 하수들의 손까지 빌릴 필요 있겠소?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기시구려! 본방이 전담했다면 벌써…!」
말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동월루의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게 듣기 안 좋았다.
마른 비가 발을 뗄 때도 황무근의 말은 이어졌다.
「본방의 실력을 보여주지! 강까지 가는 길을 틀 테니 따라오시구려!」
‘길을 튼다고?’
앞쪽을 바라보니 대규모 움직임이 감지됐다.
평야에 솟아난 수백의 거지 떼.
그들은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자들을 원형으로 포위한 채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아악!”
“기습이다!”
“뭐, 뭐냐! 개방이 왜?!”
마른 비를 잡으려다가 발을 뺀 사파의 무인들이었다.
숲에서 도망친 자들까지 합쳐 삼백에 가까운 무인이 개방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허이구, 허이구! 이놈의 팔자…!”
“배고파 죽겠다! 밥 좀 다오!”
“크하아~ 취한다! 아름다운 세상이야!”
“흐흐흑! 흑…!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허이허!”
난장판이었다.
곡성, 구걸음, 취객의 주사와 고성방가까지.
거지들은 밥그릇까지 두들기며 소란을 피워댔다.
그리고 그것들은 곧 거대하게 공명하며 사파의 무인들을 두들겼다.
“제, 제발 닥쳐! 어지럽단 말이다!”
“미쳐버릴 것 같아! 누가 좀…!”
“으윽! 빌어먹을! 이, 이것! 설마…!”
개방을 대표하는 진법, 타구진(打狗陣).
후개는 작심하고 병력을 파견했고, 정사대전이 벌어진 이때, 눈에 보이는 사파를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한 것 같았다.
마른 비를 돕는 한편 공까지 세우는 일거양득의 계.
수왕을 미끼 삼아 그를 노리고 온 놈들을 쓸어 담는, 지극히 후개스러운 전략이었다.
「저쪽은 신경 쓸 필요 없소이다, 수왕. 구파일방으로서 사파 놈들과 싸우는 건 우리의 책무이니.」
황무근은 마른 비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았다.
「아차!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야지! 분서의 성주는 무척이나 집요한 자요.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놈이지. 심지어 두 눈 뜨고 놓쳐 버렸으니……. 그대를 잡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소.」
듣고 보니 지나온 숲에서 대규모 군기가 느껴졌다.
일을 키우는 개방의 처사가 못마땅했지만, 마른 비는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시간을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래서 결론이 뭐야? 강으로 뛰라는 거지?”
그 한마디만 남기고 마른 비는 질주를 시작했다.
「어, 엇? 수왕! 잠깐 기다…!」
따로 준비한 바가 있었는지 황무근이 외쳤지만,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마른 비는 훤히 모습을 드러낸 채 개방과 사파의 무인들이 맞붙은 전장을 가로질렀다.
「제기랄! 내 말을 끝까지 듣고…!」
황무근이 헐레벌떡 쫓아왔다.
그는 지둔술로는 마른 비를 쫓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 지상으로 올라와서 경공을 펼쳤는데, 그래도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강까지만 가면 그 뒤는 금방이오! 배를 타고 섬서의 경계를 넘고, 섬서를 가로지르면 사천이지!」
황무근은 마른 비가 멀어지기 전에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합양(合陽)의 관군이 수로를 틀어막으면 끝장인데, 그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본방에서 손을 썼거든!」
너무 서둘렀는지 그는 달리다가 엎어졌다.
우당탕탕 구르면서도 그는 전음을 보냈다.
「용병 연합에 의뢰가 들어간 걸 포착했소! 심지어 살수집단도 움직였지! 살막에 버금가는 살수들인 탈명회(奪命會)가 그대를 노리고 있소이다!」
마른 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무근이 혼자 떠들다가 지쳤는지 심통을 부렸다.
「이런 젠장!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조심하라, 이 말이오! 듣고 있소?!」
그제야 마른 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툭 뱉었다.
“고마워.”
그러자 엉망으로 널브러졌던 황무근이 활짝 웃었다.
긁히고 까져서 꽤 아플 것 같은데, 그는 손까지 흔들며 외쳤다.
「껄껄껄! 별말씀을! 아, 이걸 까먹었군! 그대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 오스트갈이 바투와 무칼리를 데리고 장성을 넘었소이다!」
“뭐라고?!”
마른 비는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