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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68화 (368/463)

368화

“오스트갈이 장성을 넘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황무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음? 오스트갈한테 관심 있소?」

그는 잠시 기억을 되짚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그러고 보니 남하하기 전에 초원에 올라갔었군. 거기서 오스트갈을 봤겠어!」

혼잣말을 늘어놓던 황무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나 왜 계속 전음을 쓰는 거지? 어차피 모습도 드러났는데 말이야. 바보인가?」

“…….”

너무 산만한 사람이다.

마른 비가 얼굴을 찌푸리자, 황무근이 얼른 대꾸했다.

“한 시진 전에 벌어진 일이오! 우리도 방금 알았으니 아직 중원에 퍼지기 전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떠나기 전에 명군은 승리를 거뒀어. 오스트갈이 도망치는 걸 봤고. 설마 그 후에 명군이 패한 거야?”

황무근이 그럴 리 있겠냐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대가 떠난 뒤에도 두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모두 승리했소. 오스트갈이 보이지 않았을 뿐. 분지에서 패한 후 그는 카안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 같소.”

“돌아가지 않다니? 그럼?”

“서달 장군이 그를 잡기 위해 군사를 풀었지만 종적이 묘연했지. 당연히 북쪽으로 갔을 거라고 모두가 추측했지만….”

황무근이 침을 꿀꺽 삼킨 뒤에 말했다.

“……오늘 새벽, 갑자기 거용관에 나타난 거요. 바투와 무칼리, 그리고 수백의 기마대와 함께. 명군이 초원 깊숙이 침투한 상황에서.”

허를 찌르는 움직임.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 수였다.

참마도를 비껴든 노장이 관문 앞에 섰을 때, 거용관에는 무서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대가 부순 성문은 복구됐소. 하지만 상대는 초원의 혼이라고까지 불리는 무장이지. 그대가 그랬듯이, 오스트갈도 일격에 성문을 날려버렸소.”

“……!”

대규모 군세가 아니다.

천하제일웅관은 한 사람에게 연달아 두 번이나 뚫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족이 오랑캐라고 멸시해온 민족이었다.

하지만 전과 다른 게 있었으니, 이번에 침입한 자는 살의를 품고 방문했다는 점이었다.

“몰살. 반 시진 만에 거용관을 지키던 일만 군사가 전멸했소. 그럴 수밖에 없지. 오스트갈에 바투, 무칼리……. 변변한 지휘관도 없는 군사들이 그런 괴물들을 어찌 당하겠나.”

하북 일대는 초비상이 걸렸다.

고작 수백 기가 침투했을 뿐이지만, 그중엔 십좌급의 장수 둘과 그들을 상회하는 초월적인 무장이 있으니까.

“거용관에서 북경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요. 지금 그쪽은 난리가 났지. 이 소식은 곧 중원 전체로 퍼질 거요.”

마른 비는 아연한 표정이 됐다.

그들이 지닌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늘을 놀라게 할 무력을 지녔다곤 하나 뒤를 받치는 병력이 고작 수백 기.

그 인원을 데리고 침투한 오스트갈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뭘 하려고? 그 인원으론 어딘가를 점령하는 것도 불가능해. 설마 북경을 노린다는 무모한 계획은 아닐 텐데?”

황무근은 좀 더 그럴듯한 가정을 내놨다.

“명에게 패하고, 내전까지 겹친 상황……. 하나로 뭉쳐도 모자랄 판에 초원의 전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지. 무슨 짓을 해도 북진하는 명군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소.”

“그럼….”

황무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벌군을 회군시키려는 목적일 거요. 뛰어난 장수와 정예들이 모조리 올라가 있는 상황. 북경을 함락하는 게 불가능할 뿐 그 외의 지역이라면 어디든 박살 낼 수 있는 전력이니까.”

발톱에 박힌 가시 정도가 아니다.

그 정도 힘이라면 발바닥으로 침투한 맹독에 비유해야 했다.

섬서로 넘어가는 요충지인 분서.

방금 지나온 성만 해도 그들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만드는 게 가능했으니까.

“장군을 불렀더니 멍군으로 받아치는 격이오. 터무니없는 무력이 있기에 가능한 군략이야. 뒤가 막혀도 언제든 뚫고 탈출할 자신이 있는 거겠지. 서달 장군은 지금쯤 기겁을 하고 있을 거요.”

마른 비가 놀라서 발을 멈출 정도니 서달이야 오죽할까.

오스트갈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최선의 계책을 찾아낸 듯했다.

“명에게는 위기지만, 그대에게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오. 지금껏 황제가 취한 태도가 방관이었다면, 이제는 개입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지. 여력이 없으니까.”

그때였다.

황무군의 뒤편에서 수천에 이르는 군기가 느껴졌다.

숲을 뚫고 뛰쳐나온 건 분서의 기마대였다.

“저기 있군! 드디어 찾았다! 야만인 놈! 모두 저 중죄인을 잡아라!”

소리를 지르는 건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였다.

눈부터 코, 입, 모든 게 작은 그는 몸에 맞지도 않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눈치로 보아 그가 분서의 성주인 듯했다.

그는 마른 비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움찔했다.

“……왜 여기서 수백 단위의 싸움이?! 무림인인가?”

성주는 개방과 사파가 싸우는 걸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다시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저것들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한심한 놈들! 저것들은 무시하고 야만인을 쫓아라!”

뒤에선 관군이 쫓아오고, 옆에선 개방도가 시끄러운 소음을 쏟아낸다.

이제야 알아챈 것이지만, 평야 여기저기에서도 싸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마른 비를 잡으러 온 사파와, 그들을 노린 정파가 뒤엉킨 결과였다.

시선을 내리자 황무근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

“으… 정신 사나워. 난장판이네, 난장판.”

다른 자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할 소린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궁금증을 해결한 마른 비는 등을 돌렸다.

황무근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마른 비를 보며 실실 쪼개다가 전음을 보냈다.

「분서의 군사들은 걱정하지 마시게! 오스트갈이 장성을 넘은 걸 들으면 돌아갈 테니까.」

마른 비가 뒤를 돌아보자, 황무근이 손을 흔들었다.

“또 보세나, 수왕. 후개 님을 도와준 것, 평생 잊지 않겠네. 난 자네가 정말 좋아.”

그래서 이토록 호의적이었던가.

노년이 되도록 분타주에 머물러 있다는 점과, 경공을 펼치다가 엎어진 것.

황무근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아니었다.

허나 순수한 면이 있었고, 그게 마른 비의 관심을 끌었다.

자세히 관찰한 결과, 마른 비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무근이라고 했지? 이름 꼭 기억할게. 여러모로 고마웠어, 할아버지.”

마른 비가 정중하게 와족식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황무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할아버지라니…! 껄껄! 행복한 날이로군! 이래서 인생이 즐거운 게야!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이어지거든! 고맙네, 수왕! 꼭 무사히 고향에 도착하시게!”

“으, 으음……. 뭘 눈물까지….”

반응이 너무 극적이라 당황스럽다.

허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처음엔 얼빠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황무근은 수백 명의 피를 묻히고 온 마른 비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아 주었다.

“그대로 남하하시게! 그리고 강의 지류를 타면 돼! 그대를 돕던 녀석들이 배까지 준비해 두었더군!”

황무근은 거기까지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분서의 성주를 향해 포권하며 외쳤다.

“개방의 황무근이 성주님께 아뢰오! 방금 오스트갈이 장성을 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마른 비는 그때부터 모든 걸 무시하고 달렸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외침이 터졌다.

덤비면 죽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하루살이들이 간간이 달려들었지만, 수왕의 발길을 멈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허억, 헉…!”

이틀.

마른 비가 분서에서 하진(河津)까지 주파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쉬지 않고 달린 걸 감안해도 경이적인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마른 비가 눈앞에 나타난 강줄기를 바라볼 때, 전음이 들렸다.

「대협! 이쪽으로!」

하진 인근의 강변에는 어김없이 동월루의 요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마른 비는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수풀로 몸을 날렸다.

“……!”

요원을 본 순간, 마른 비는 깜짝 놀랐다.

그의 옷이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덩달아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 요원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미숙하여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별거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요원은 태연하게 배를 띄웠지만, 그의 팔은 떨리고 있었다.

마른 비가 노를 빼앗으며 말했다.

“상처를 보자고 해도 그럴 여유 없다고 할 거지? 가면서 치료해. 보퉁이에 약이 있어.”

마른 비가 물살을 타며 노를 저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결을 볼 줄 아는 그에게 이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배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마른 비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요원이 상처를 돌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함정이었습니다.”

“함정?”

“네. 온갖 조직의 첩보조가 몰려들었지만, 그놈들을 제치는 건 어렵지 않았죠. 상황이 마무리되었을 때, 숨어 있던 놈들이 튀어나왔습니다. 하오문이었어요.”

“하오문…!”

얼마 전까지 백강의 식구들이 몸담았던 조직.

백강이 기지로 눌러놓았던 그들이 움직인 것이었다.

“하오문은 원한을 잊지 않죠. 놈들은 저희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잔챙이들을 전부 정리했을 때, 암습을 받았습니다.”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동월루의 요원들이 최정예라지만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위치가 드러나고, 싸움이 끝난 직후에 받은 급습에 동월루는 뼈아픈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산서성에 투입된 인원의 절반이 쓰러졌습니다. 전멸할 뻔한 저희를 살린 건 백아 님이었어요.”

“별비가…!”

동남쪽으로 움직인 요원들은 마른 비를 살피는 자들을 정리할 목적도 있었지만, 별비를 여기까지 데려오는 게 주 임무였다.

강을 타고 이동 중이던 별비가 그들의 위기를 보고 뛰어든 모양이었다.

“날 안내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도 그쪽으로 갔지? 어떻게 됐어?”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아군을 도우러 가는 길에 그만….”

사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른 비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을 안내하느라 위치가 드러났다는 것을.

그건 적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으리라.

마른 비는 몰려오는 죄책감에 눈을 감았다.

“……나 때문이야. 아무 상관도 없는 날 돕기 위해 애먼 사람들이….”

사내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주께서 독립할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게 추단 님과 동월 님입니다. 심지어 회효 노사께서는 루주께 독문무공을 전수해 주셨죠.”

그의 말에 힘이 깃들었다.

“그때부터 와족은 루주 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주 님의 일은 곧 저희의 일이죠.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충직한 눈빛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밑바닥 인생이라고 멸시받는 하오문 출신이 이런 의리와 충성을 보이다니.

마른 비는 감격하는 한편, 백강이란 남자가 더욱 궁금해졌다.

“하오문주나 오기(五技)가 전부 나서지 않는 한 백아 님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래라면 하진에서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시기가 늦어질 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 당신들을, 별비를 믿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사내는 보기 좋게 웃었다.

“별말씀을. 되려 저희가 갚아야 할 입장이죠.”

강줄기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건 섬서로 넘어가는 경계가 다가왔다는 뜻이며, 중원의 중부 지방에 접어든다는 의미였다.

섬서를 넘으면 사천이다.

그러면 운남까지는 금방이었다.

마른 비가 남서쪽을 바라볼 때 사내가 노를 가져갔다.

“개방이 합양의 수군을 묶어놨으니 앞을 막을 자들은 없습니다. 화음까지 모실 테니 쉬시죠. 그간 한숨도 못 주무셨을 텐데 눈이라도 좀 붙이….”

둥, 둥, 둥―!

난데없는 북소리가 요원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넓어지는 강줄기의 좌우에서 숨어 있던 배들이 튀어나왔다.

오밀조밀한 배들과 달리 선두에 선 배는 군선을 개조한 듯 장대한 위용을 자랑했는데, 뱃머리에서 상어가 그려진 푸른 깃발이 휘날렸다.

“아, 아니?! 저놈들이 왜…?!”

개방은 물론이고 동월루도 예측하지 못한 자들.

중원의 물길을 지배하는 장강수로맹이 강줄기를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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