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카하하핫! 네가 수왕인가!”
키가 상당히 큰 사내였다.
앙상할 정도로 홀쭉한 몸은 언뜻 보기엔 피죽도 못 먹은 것 같으나, 꼼꼼히 뜯어보면 전부 근육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팔다리가 길고, 어깨가 넓다.
척 봐도 헤엄을 치기에 최적화된 몸이었다.
“흑사어(黑鯊魚) 소기악…!”
동월루의 요원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를 지그시 노려보는 마른 비에게 말했다.
“교아채(鮫牙寨)의 채주입니다.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 흔히들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이라고 부르는 수적 집단의 이인자죠.”
들어본 적 있다.
철중구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 덤볐다가 묵사발이 난 장귀삼이 장강수로맹 출신이라고 했다.
장귀삼에게선 괜찮은 느낌이 전해진 데 반해 소기악이란 자에게선 사나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인간 자체가 위험한 느낌.
말할 것도 없이 마른 비가 좋아할 만한 유형은 아니었다.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십팔채. 활동 지역이 다를 뿐 대단히 유사한 집단입니다. 각각 산과 강에서 살아가는 터라 마주칠 일은 없지만, 묘한 경쟁의식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녹림이란 이름을 들으니 초패가 떠올랐다.
그는 상당히 호감 가는 사내였는데.
저 앞에 있는 놈이랑은 비교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기악은 사납기로 유명합니다. 잔인하고, 흉포한 데다 교활하죠. 총채주를 제외하곤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더군요.”
선박들을 둘러보니 전부 같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소기악의 단독 행동일 확률이 높았다.
마른 비가 적들의 숫자를 가늠할 때, 소기악이 무기를 겨누며 외쳤다.
“뭘 속닥속닥 대는 거냐! 내가 묻지 않았나! 네가 수왕이 맞냐고!”
성질까지 급한 놈이다.
소기악의 손에는 삼지창이 들려 있었는데, 창신을 타고 흑색 광택이 흐르는 게 예사로운 무기가 아니었다.
그가 악명을 떨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흑교섬(綠鮫銛)이었다.
“신병이기입니다. 창이라기보다는 작살에 가까운데, 꿰뚫지 못할 게 없다고 전해지죠. 소문으론 신묘한 공능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전대 교아채의 채주를 죽이고 빼앗은 물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원은 소기악이 떠들거나 말거나 계속 속삭였다.
마른 비도 대꾸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했으나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상황.
소기악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발작했다.
“카아악! 이런 돼먹지 못한 것들이…! 본좌의 말에 대답해라! 네가 수왕이 맞…!”
소기악의 말을 끊은 건 마른 비였다.
그는 시끄럽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뭘 자꾸 물어? 알고 온 거잖아? 우리가 통성명 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손을 우두둑 소리 나게 꺾으며 소기악을 노려봤다.
“시간 없으니까 잡소리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너도 날 잡으러 온 거지?”
“너?! 너어어?! 지금 잡소리라고 했나?!”
도발은 소기악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건 마른 비도 마찬가지였으니, 선공을 당한 소기악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를 봤나? 사방에서 수왕이라고 떠받들어주니까 기고만장…!”
마른 비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입술에 대며 조용히 말했다.
『닥쳐.』
쿠우웅―!
일대를 짓누르는 야수 제어의 기파.
둘의 설전을 지켜보던 수적들이 허리를 꺾었다.
그들은 몸을 짓누르는 기운에 저항했지만, 무슨 짓을 해도 상체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채, 채주! 모, 몸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누구보다 놀란 건 소기악이었다.
범위를 확장한 탓에 압력이 옅어졌고, 그는 야수 제어의 위압을 떨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토록 넓은 광역 제어를 본 적이 없어서 기겁했다.
“소기악이라고 했지? 넌 세 가지 실수를 했어.”
강바람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그러는 가운데 수왕의 음성이 퍼졌다.
자연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수적들의 귀에 박혔다.
“너, 내가 수상전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
소기악이 자신만만한 이유였다.
뭍에서 날고 기는 무인들도 수전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단단한 대지가 받쳐주는 것과 흔들리는 선상의 싸움은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당할 수 없다면 물속으로 끌어내리면 그만이다.
만일을 대비해 수박 겉핥기로 익힌 수공 따위로는 평생을 물에서 살아가는 수로맹의 무인들을 절대 이길 수 없으니까.
“그게 첫 번째 실수야.”
야생이란 밀림과 숲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설원과 고산지대, 늪과 강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모든 지형에 적응하여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른 비는 중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운남의 자연을 극복한 남자였다.
“둘째, 날 너무 얕봤어.”
자신을 잡을 생각이라면 수로맹의 정예를 모조리 끌고 왔어야 한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교아채의 인원들만 데리고 나타난 건가.
물론 마른 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슬슬 숨이 가쁠 때가 됐지? 나와.”
푸화아아악―!
수중으로 퍼뜨린 뿌리내리기.
물밑에서 마른 비의 소선으로 접근하던 자들이 땅속으로 처박혔다.
급습을 피해낸 자들이 수면 위로 솟구쳤지만, 그게 마른 비가 노린 바였다.
“검은 옷. 악취가 진동하는 더러운 기운. 니들이 탈명회라는 살수들이지?”
“……!”
마른 비는 잊지 않았다.
살막에 버금가는 살수들이 그를 노린다는 황무근의 말을.
누가 살수에게 의뢰를 넣었는지 궁금했는데, 그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다.
“전부 죽어.”
부아아악―!
뿌리내리기를 피한 살수들은 물 위로 올라오자마자 두 동강이 나버렸다.
자연기를 손날에 담아 수평으로 휘두른 한 수는 북벽의 참격을 닮아 있었다.
“영이에 비하면 너희들의 은신은 조잡하기만 해. 암습으로 내게 덤비려면 영이 밑으로 들어가서 십 년 더 배우고 와.”
“그, 그게 누구길래…?”
소기악이 어찌 알까.
마른 비가 황제가 공인한 천하제일살수의 암습을 견뎌냈다는 것을.
수왕이 허리를 세우며 소기악의 세 번째 실수를 지적했다.
“마지막은, 내가 지금 기분이 굉장히 안 좋다는 거야.”
자신은 식구들의 위기를 맞아 고향으로 갈 뿐이다.
국문이나 다름없는 거용관을 부순 건 큰 잘못이지만, 그건 황제나 관군이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닌가.
돈과 명성을 노리고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
탐욕에 찬 인간들이 끊임없이 길을 막는다는 사실이 마른 비를 화나게 했다.
“내 경고를 못 들었다고는 하지 마.”
마른 비의 자세가 낮아졌다.
고개를 꺾어야 뱃머리가 보일 만큼 거대한 전함.
발을 굴렀을 때, 수왕의 육신보다 높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 막아라!”
나름대로 준비는 철저했던 모양이다.
야수 제어를 풀고 움직이는 걸 보니 제법 쓸 만한 고수도 많다.
그들은 작살부터 시작해 갈고리와 투망, 쇠사슬, 심지어는 닻을 축소한 쇠뭉치까지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건 일정한 순서와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교아채가 자랑하는 사어포획진(鯊魚捕獲陣)이었으나, 힘의 차이가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합!』
손발을 놀릴 필요도 없다.
언령이 깃든 기합.
물리적 힘이 구현된 야수 제어가 적들의 무기를 모조리 튕겨 버렸다.
“저, 저럴 수가…!”
놀랄 틈이 있는가?
똥줄 빠지게 도망쳐도 모자랄 텐데?
마른 비는 얌전히 착지할 생각이 없었고, 뿌리내리기를 응용한 진각을 함선에 꽂아 넣었다.
쿠아아앙!
대포알이 직격한 듯한 충격이다.
아니, 육중한 바위가 떨어져 내린 것 같다.
마른 비의 진각을 견디지 못한 함선이 앞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바닥이 박살 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배, 뱃머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다.
장강의 북부를 누비며 무고한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한 흑교선(黑鮫船)이 한 명 때문에 아작 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뭣들 하고 있나! 모선이 파손되는 걸 보고만 있을 거냐!”
역시 들은 대로 약삭빠른 놈이다.
소기악은 마른 비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실감했고, 부하들 뒤에 숨어 소리만 질러댔다.
‘저러다가 틈이 보이면 냅다 뛰어나오겠지.’
공지량부터 호국영, 표금산과 진청에 이르기까지 질리도록 봐서 놀라울 것도 없는 유형이다.
선상의 적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힐 때, 마른 비가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안타깝게도 난 시간이 없거든.”
“자, 잠깐! 멈춰! 무슨 짓을…!”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챈 소기악이 부하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맨 뒤에 숨은 터라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배가 아까우면 진작 나왔어야지.”
이건 스스로 느끼기에도 꽤나 통쾌하다.
마른 비가 씩 웃으며 발을 굴렀다.
쿠아아아앙! 쾅! 쾅! 콰아앙―!
곧게 내리찍은 자연기가 함선에 수직으로 구멍을 뚫어 버렸다.
기운이 선저(船底)에 닿는 순간 자연기를 폭발시키니 강물이 콸콸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 복구 작업에 나서도 되돌리기 힘들 듯한 피해.
침몰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끼이이이익―.
“안 돼! 안 된다! 나의 하나뿐인 전함이…!”
함선이 지르는 비명보다 소기악의 고함이 더 컸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저주를 퍼부었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야! 내가 바로 장강의 흑상어다! 네놈의 애비부터 식구, 친구들까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없앨 것이야! 감히 나를 건드리고 살아남은 놈은…!”
『닥치라고 했지.』
그 한마디에 소기악은 입을 닫았다.
기울어진 뱃전을 평지처럼 걸어 올라오는 사내.
백수의 위에 군림하는 수왕은 흑상어 따위가 감당할 수 없는 남자였다.
“으, 으아아아!”
공포에 질린 수적들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달려 나갔다.
동쪽 하늘을 비추는 일출과, 강변에서 흔들리는 갈댓잎.
물길이 넓어지는 강의 한복판, 사선으로 기우는 뱃전에서 햇살을 받은 무기들이 번쩍였다.
뻐억! 우직! 빠아악! 으드득―!
강의 유려한 풍경과 인간이 떼로 죽어 나가는 광경은 지독히도 이질적이었다.
소기악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부하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안 되겠어.”
소기악의 뒤편,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유령처럼 솟아났다.
그는 야차처럼 날뛰는 마른 비를 지켜보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쩔렁.
두툼한 돈주머니였다.
사내는 같은 무게의 전낭을 하나 더 던져놓고 소기악에게 말했다.
“완벽한 오판이었어. 저런 건 죽었다 깨어나도 당할 수 없소.”
“뭐, 뭐라고?”
소기악이 눈을 부릅떴다.
찬란한 일출 덕분일까?
검은 옷의 사내, 탈명회주의 눈동자에 수적들을 날려 버리는 마른 비가 선연히 비쳐들었다.
쾅! 꽈광―! 쩌저정!
푸른 기운이 폭발할 때마다 수적들이 함선의 파편과 뒤엉키며 터져 나갔다.
‘무적’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광경이었으니, 수왕의 전진을 가로막을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탈명회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추가로 던진 돈주머니를 가리켰다.
“청부 실패에 대한 대가요. 파산이 낫지, 살막처럼 멸문의 길을 걷는 건 사양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