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지, 지금 발을 뺀다고?”
소기악이 어이없는 얼굴로 묻자, 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채주께서도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요. 머뭇거리다간 퇴각할 시기도 놓칠 테니.”
마른 비는 이미 함선의 중앙까지 도달해 있었다.
소기악은 계약을 어긴 회주의 머리를 찍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내분을 일으켰다간 자멸할 뿐이다.
그는 치솟는 울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탈명회주를 달랬다.
“회주! 자, 잠깐만! 내가 어떻게든 놈을 강에 떨어뜨릴 테니 수중전으로 끌고 가서…!”
탈명회주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채주. 정신 차리시오. 직접 보고도 모르겠소? 저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 수중전이라니……. 크큭! 저자가 지형 따위에 구애받을 걸로 보이는가?”
회주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을 내렸다.
“탈명회, 퇴각하라. 앞으로 우린 수왕에 관한 청부는 일절 받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도록.”
회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백이 넘는 기운이 일제히 꺼졌다.
교아채의 수적들이 탈명회의 퇴각을 위한 화살받이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이, 이…!”
소기악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았다.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어깨를 떨다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댔다.
“왜…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 그놈…! 그 빌어먹을 애송이 때문이야. 놈이 나를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외인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정이기도 했다.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가는 수적들과, 강을 붉게 물들이는 피.
소기악이 퇴각을 결심할 때였다.
“커허허헝!”
야수의 포효가 바람에 실려 왔다.
동남쪽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강의 동쪽을 막은 소선들이 줄줄이 터져 나갔다.
“크아악!”
“아악! 채, 채주! 살려…!”
디딤돌을 밟듯 소선을 뭉갠 백호가 햇살을 등지고 날아올랐다.
“크아아앙!”
새하얗게 번뜩이는 발톱!
전함까지 훌쩍 뛰어오른 별비의 뒤로 일출이 후광처럼 번졌다.
“웃기지 마라! 내가! 이 흑사어가 이렇게 죽을 것 같으냐!”
휘리리릭―!
소기악이 손을 놀리자, 검은 작살이 원형의 방벽을 형성했다.
사어수벽(鯊魚水壁).
지금껏 그의 목숨을 살린 구명절기이자, 무수한 적들을 격살한 필살초였다.
스스스스―
작살의 거무튀튀한 몸체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흑교섬은 대기 중의 수분을 빨아들였고, 그것은 곧 소기악이 일으킨 강기에 스며들었다.
물리적인 힘을 얻게 된 물방울들이 뻗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크하아앙!”
그러거나 말거나 별비는 앞발을 휘둘렀다.
공성추 같은 일격이 작렬하기 직전, 소기악이 눈을 부릅떴다.
“걸렸어…! 뒈져라! 이 괴물아!”
촤아아악―!
대량의 물을 끼얹는 듯한 음향.
원형의 방벽에서 수십 자루의 수창(水槍)이 솟구쳤다.
흑교섬은 수분을 빨아들여 시전자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병기였고, 그 형태는 자유자재였다.
사어수벽으로 막고, 수창으로 찌른다.
소기악은 병기의 공능을 빌어 진정한 공방일체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스르륵―
그 순간, 별비의 육신이 흐릿해졌다.
산을 쪼갤 거력이 담겼으면 어떻고, 무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공방일체면 어떤가.
안 맞으면 그만이다.
마른 비의 움직임을 흉내 낸 극속의 기동이 별비의 형체를 지웠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회피 기동?!
짐승이 회피 기동이라니?
심지어 공격을 하는 와중에?!
별비는 수창이 몸을 스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허깨비처럼 사라졌던 백호가 측면에 나타나며 앞발을 휘둘렀다.
투콰아아앙!
흑교섬이 날고, 소기악도 날았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총채주가 이끄는 폭룡채(暴龍寨) 다음으로 강성한 교아채.
장강수로맹의 이인자를 한 방에 날려버렸음에도 별비는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였다.
〔저딴 게 이 몸의 일격을 막았다고?〕
철중구가 할 법한 소리였다.
별비는 허공을 날아가는 소기악과 제 앞발을 번갈아 보더니, 다리에 힘을 줬다.
〔어디 그 시커먼 쇳덩이 없이도 또 막나 보자.〕
별비가 도약하려 할 때, 마른 비가 외쳤다.
“별비야! 무사했구나…! 내가 갈 테니까 좀 쉬어!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잖아!”
마른 비는 그사이 선박 위의 적들을 모조리 침묵시켰다.
그러곤 지체 없이 강으로 몸을 날렸다.
별비가 움찔하더니 편안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흠. 그럴까? 하긴 주구장창 달렸더니 거기에 땀띠가 날 지경이다. 그럼 비아 네가 대신 고생 좀 해라.〕
별비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느긋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놈 참 멀리도 날아가네.〕
만만치 않은 적이란 걸 직감했고, 죽일 생각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그 결과 소기악은 대포알처럼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채, 채주님…!”
“뭣들 하냐! 저대로 육지에 추락하면 죽는다! 잡아!”
서쪽에 포진한 탓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수적들이 분주해졌다.
그들은 새처럼 날고 있는 소기악을 올려다봤고, 투망을 준비했다.
하지만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으니, 흑교선에 가까운 배들이 줄줄이 터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꽝! 콰쾅! 우지끈―!
마른 비였다.
별비가 그랬듯이 그는 소선들을 징검다리 삼았고, 한 척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왕을 영접한 배들이 인간에게 짓밟힌 장난감처럼 완파되어 가라앉았다.
“마, 막아!”
“누가 어떻게 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적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식혔다.
“자, 잡았다…! 채주님! 괜찮으십니까?!”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수적들이 소기악을 받는 데 성공했다.
수 겹을 덧댄 투망으로 그의 비행을 멈춰 세운 것이다.
그건 마치 날고 있는 잠자리를 채집망으로 낚는 것 같았다.
“저런 건 못 당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전부 강에 뛰어들엇!”
모종의 이유로 쉽게 물러날 수 없었던 소기악과 달리 수하들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른 비의 공격을 받지 않은 수적들이 전부 배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강으로 입수하기 전, 자신들이 탔던 배를 부숴버린 것이다.
“이런…….”
디딜 곳이 사라진 마른 비가 강 한복판에서 멈췄다.
저 멀리 강변에 가깝던 수적들이 소기악을 받았고, 그들은 미리 출발시킨 쾌속선으로 옮겨 탔다.
전력을 다해 뛰어도 닿을까 말까 한 거리.
허나 마른 비는 소기악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판자를 날려서 타고 갈까?’
더 멀어지기 전이라면 깃털 날리기를 발동하여 물 위를 달려도 된다.
무엇이든 지금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였다.
수적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주시하고 있지만, 닿기만 한다면 그쯤은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아냐. 좀 더….’
편리하고, 안정적이며, 획기적인 방법.
수상전에서 물에 빠지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기예.
마른 비는 최근에 습득한 자연기의 운용을 떠올리며, 배 바깥으로 슬며시 발을 내밀었다.
쩌저적!
‘된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발한 발상이다.
발끝에 밀어 넣은 속성기.
마른 비는 강 위에 두 발로 섰고,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쩌적, 쩍, 쩌저적―!
마른 비는 물 위를 평지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의 발이 닿을 때마다 수면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서리불꽃을 융합하기 위한 두 가지 속성 중 냉기의 응용.
거용관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은 건 패문강만이 아니었다.
“저, 저럴 수가…!”
“미친…. 내가 뭘 보고 있는 것이냐?”
어떻게든 쫓아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서 작살과 투망, 관경창(貫)鯨槍)으로 허공을 겨누고, 수중에는 비장의 무기인 기폭뢰(起爆雷)까지 풀어두었다.
‘하, 한데 이건…!’
기껏해야 허공을 가로지르거나 헤엄을 칠 거라고 예상했을 뿐이다.
불안정한 상태라도 떨굴까 말까인데, 이러면 육지에서 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수적들은 물 위를 뛰어오는 마른 비를 보며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정신 차렷! 저놈이 우릴 놔줄 것 같으냐! 손 놓고 죽을 것이야?!”
지휘자의 호통에 수적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공중을 겨눴던 병기들의 조준점을 끌어내렸다.
거리가 좁혀지고, 마른 비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포획조! 놈을 묶어랏!”
촤라라락―!
철 그물이 넓게 퍼지며 하늘을 덮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씨줄과 날줄.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그것이 마른 비의 기억을 되살렸다.
‘……살망?’
야투에서 보았던 포획 겸 살상병기.
하지만 그물을 다루는 자들의 실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팔방을 덮으며 쏟아지는 투망은 현란한 변화를 담고 있었고, 수 겹으로 중첩됐지만 한 올도 엉키지 않았다.
그 정교한 제어에 마른 비가 놀랄 무렵, 제 이파가 날아왔다.
“사냥조! 투창!”
쾌애애액―!
스무 자루의 중형 작살이 하늘을 날았다.
수적들의 작살질은 물속의 대형 어류를 단번에 꿰뚫을 정도였고, 투망이 조여지는 시기에 맞춰 절묘하게 당도했다.
그물로 조이고, 작살로 숨통을 끊는다.
하지만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으니, 흑상에게 거금을 주고 구입한 관경창이 불을 뿜었다.
“쏴라! 죽여버렷!”
해양에 서식하는 고래를 포획하기 위한 초대형 작살.
하지만 실제 용도는 다른 데 있었으니, 광공장의 손을 거쳐 개량된 그것은 적의 전함을 침몰시키기 위한 비밀병기였다.
투콰아앙―!
화약이 터지고, 쇳덩이가 회전한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도는 대형 작살이 흉험한 기세를 내뿜었다.
“음…. 상당한데?”
마른 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교아채 수적들의 실력이 예상을 웃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그를 곤란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촤아악―!
수도로 구현한 참격이 살망을 갈랐다.
두 주먹으로 펼친 바위 부수기가 작살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관경창이 숨 돌릴 틈 없이 쇄도했으나, 마른 비는 애초부터 피할 생각이 없었다.
“흐읍!”
그는 한 손으로 관경창의 창두를 낚아챘고, 다른 손으론 몸통을 붙잡았다.
그러자 검은 작살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관성과 회전력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나아가지도 못하는 모습.
마른 비가 손에 악력을 더하자 팔딱거리는 잉어처럼 몸부림치던 작살이 얌전해졌다.
회전이 느려지고, 떨림이 잦아든다.
결국 관경창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
수상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전함을 침몰시키기 위한 병기를 맨손으로 잡아낸 괴물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유일하게 들리는 건 마른 비의 호들갑이었다.
“앗, 뜨거! 으, 따거! 으우… 손바닥 다 까졌잖아. 생각보다 쏘는 힘이 엄청나네? 여러 개 있었으면 위험했겠는데?”
수적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마른 비가 멍청히 선 그들을 바라봤다.
“한 번 비교해봐. 그 장치가 센지, 내 팔 힘이 센지.”
“……?”
자세가 돌아가고, 팔 근육이 꿈틀거린다.
자연기를 머금은 수왕의 어깨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사람을 죽이러 왔으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각오 정도는 했지?”
그게 쾌속선에 탄 수적들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마른 비는 선상에 널브러진 소기악을 향해 관경창을 집어던졌다.
쾌애애애액― 투쾅!
검은 작살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갔고, 쾌속선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완파되어 흩날리는 파편 속에 소기악의 옷가지가 보였다.
장강수로맹에서 둘째가는 힘을 자랑하던 교아채가 수왕에게 무너진 사건이었다.
강물 위에 우뚝 선 마른 비의 어깨에 찬연한 아침햇살이 내려앉았다.
* * *
“랄랄라~ 랄라~ 흐흠, 흠. 아아~.”
전함과 전투용 소선들이 침몰한 현장.
별비의 후각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먼 곳에서 한 사내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아까 전장을 이탈한 탈명회주가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랄랄라~ 뚜둔, 뚠, 뚠뚠!”
사내의 얼굴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처럼 해사했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박자를 타다가 킥킥 대고, 혼자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이, 참~. 너무 쉽게 가버렸네? 흑사어가 뒈졌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네요.”
탈명회주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긴장과 초조함,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장강수로맹에 들어온 지 이 년. 벌써 하나밖에 안 남았다니 너무 싱겁잖아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탈명회주가 반응하지 않아도 계속 중얼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여긴 건지 회주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축하… 드리오. 허나 폭룡은 흑사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소. 그는 중원의 물길을 지배하는 제왕이자, 진짜 거물이지. 조심해야 할 것이오.”
하얀 피부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달큼한 향이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