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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71화 (371/463)

371화

“키힛!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폭룡이 엄청난 강자라는걸. 흑교섬을 쥐고도 그 정도 힘밖에 내지 못하는 흑사어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죠.”

사내는 다시 소기악이 죽은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열여덟 수채 중에 폭룡채 다음 가는 전력을 지니고 있어 이인자로 불렸을 뿐, 흑사어의 무력은 별 볼일 없어요. 흑교섬이 없었다면 진즉에 잡아먹혔을 놈이에요.”

“아까 그의 무공을 봤소만, 그렇게까지 폄하할 정도는….”

회주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폭룡채의 원로나 호법, 또는 다른 수채의 채주 중에도 소기악보다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어요. 흑교섬이 있기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거죠.”

그는 소기악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키킥. 실력이 부족하니 얕보이지 않으려고 더욱 비열하고 잔인하게 행동한 거예요. 죽자 살자 세력을 키운 것도 같은 이유고.”

“당신은 그 열등감을 이용한 것이구려.”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이인자의 자리를 뺏길까 봐, 자기가 그랬듯이 누군가 흑교섬을 노릴까 봐 잠도 편히 못 자던 놈이죠. 슬쩍 부추기니까 수왕을 잡겠다고 나서더군요. 캬캭!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소기악은 사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여기까지 왔다.

명성이 자자한 수왕을 잡아 맹 내에서의 입지를 견고히 하려고.

허나 탈명회를 붙여줬다가 중요한 순간에 퇴각시킨 것까지, 전부 소기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내의 계책이었다.

결국 마른 비는 존재도 모르는 자에게 차도살인을 위한 칼로써 이용당한 꼴이었다.

“살아남은 교아채의 병력과 소기악이 꿍쳐둔 자금이 거저로 들어왔네요. 랄랄라~ 아름다운 세상이야~!”

사내는 콧노래를 부르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가서 흑교섬을 수거해 와. 아까 회주님이 소기악에게 던져준 돈주머니도. 그게 얼만데 강바닥에 버릴 순 없지.”

그러자 둘 말고는 아무도 없던 갈대숲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황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강 쪽으로 접근하는 걸 보며, 회주가 눈을 크게 떴다.

‘본회의 특급 살수에 맞먹는 자들…! 저런 자들까지 수하로 부리는가? 대체 이자는…?’

회주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키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회주님, 눈알 굴리지 마요. 약속이고 뭐고 여기서 그냥 죽여 버리고 싶어지잖아.”

놀라운 일이었다.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은 얼굴로, 중원 삼대 살수 집단의 수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하는 자.

더 기가 막힌 건 탈명회주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는 점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회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딸은… 무사한 것이오?”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날 뭐로 보는 거예요? 난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지켜요.”

회주가 눈을 꾹 감았다.

정말 잘 있냐고, 몹쓸 짓을 한 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게 사내의 심기를 건드릴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그렇게 믿고 있겠소이다.”

하얀 피부의 사내는 뒷짐을 지며 동쪽을 바라봤다.

“머지않아 따님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폭룡은 강하지만, 그는 늙었죠. 그리고 지난 이 년간 꾸준히 손을 써놨어요. 내가 장강십팔채를 집어삼키는 날, 몸 성히 돌려 보내줄 테니 염려 말아요.”

회주는 속이 꽉 막혀버린 느낌에 가슴을 쾅쾅 치고 싶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말을 삼켰듯이 그 또한 참았다.

‘……아무리 살펴도 무공 경지를 가늠할 수 없다. 본회의 안가를 찾아내 화아를 납치한 놈들……. 승산이 없다는 건 알아. 허나 화아만 돌려받으면 네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속에선 천불이 끓어오르지만, 회주는 속내는 물론이고 살의까지도 철저하게 숨겼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시오. 약속이 이행될 거라 믿고 전심전력으로 협조하겠소.”

“아아~ 걱정하지 마시라니깐. 돈주머니는 수하들 편으로 보낼게요. 멀리 안 나갑니다. 살펴 가요~.”

회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큭큭큭. 물론 약속은 지켜야지.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돌려보내 줄게.”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사내는 입을 막으며 혼자서 킥킥댔다.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배를 타고 멀어지는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저건 어쩔까? 잠깐 사이에 너무 커버렸는데? 더 크기 전에 정리해버려?”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폭룡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괜히 귀찮은 일을 늘릴 필요는 없지. 저거랑 갑옷 걸친 색목인 놈은 나중에.”

생각이 정리됐는지 사내는 다시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카하핫! 생각할수록 웃기네~? 추 장로, 그 병신 같은 늙은이!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만 팔까지 잃고 돌아와?”

사내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다가 품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서 들이마셨다.

그리고 갈대숲 한복판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라랄라~ 랄라~! 추 장로! 울지 말고 기다려! 복수는 해드릴게~! 이 활추(猾鰍)가 폭룡이 되는 그날에!”

황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솟아나 사내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따사로운 햇살이 번지는 강변의 아침.

시간이 흘러도 사내의 춤은 그칠 줄을 몰랐다.

* * *

“일어나셨군요.”

눈을 뜨자, 새하얀 별빛이 흘러 들어왔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들의 선율.

잠에서 깬 순간, 마른 비는 두둥실 떠가는 배 위에서 명멸하는 빛들의 노래를 들었다.

“……아름다워.”

정신없이 보낸 사 년이었다.

많은 걸 보고, 듣고, 경험했지만, 그간 본 것들은 모두 인간의, 그리고 지상의 풍경이었다.

마른 비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는 걸 깨달았다.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주무시더군요.”

귓전을 스치는 강바람과 황홀한 밤하늘.

마른 비는 잠시 그대로 감상에 젖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을 되새기며 끄응, 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후우… 몸이 뻐근하네. 내가 그렇게 깊게 잤어? 얼마나 잔 거야?”

“한나절하고도 한 시진 정도 주무셨습니다.”

교아채와의 전투가 끝난 뒤,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동월루 요원이 모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둘 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생물인 이상 먹고 자는 걸 거를 순 없다.

그렇게 해야 기력이 유지되니 말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거용관을 넘은 이래로 한숨도 자지 않고, 질주와 전투를 반복하지 않았나.

자연기와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피로가 축적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많이 잤구나. 덕분에 잘 쉬었어. 화음이랬나? 거기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려?”

정신이 들수록 현실이 자각된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하루라도 빨리 식구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른 비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거의 다 왔어요. 내일 아침이면 화음의 동쪽 항구에 당도할 겁니다. 내리면 또 정신없이 달려야 하니 좀 더 쉬십시오.”

사내가 노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을 도우면서 시종일관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내.

생각해보면 지금껏 만난 동월루의 요원들이 모두 그랬다.

그들 중 나쁜 인상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마른 비는 그게 신기했다.

사람이 모이다 보면 으레 이상한 자들도 섞이기 마련이 아닌가.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백강이란 사람의 인품이 훌륭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만 모일 리가 없지. 아저씨와 달이 누나가 좋은 인연을 만났구나.’

답답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마른 비는 겨울 달이 슬픈 얼굴로 부족을 떠나는 걸 지켜봤고, 그녀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때의 겨울 달은 너무 어렸고 순진했다.

무엇보다 악의로 벌인 일이 아니었으니.

부족에서 쫓기듯 나와 갖은 고생을 겪은 걸로 충분하다.

마른 비가 그녀의 행복을 빌 때, 별비가 부스럭대며 깨어났다.

〔으… 잠들기 전엔 차라리 괜찮았는데 한숨 자고 나니 삭신이 쑤시는군.〕

별비도 지친 건 마찬가지였다.

잠시 떨어져 있을 때의 일을 묻자, 별비가 콧바람을 뿜으며 대꾸했다.

〔아주 그냥 어마어마했지. 내 무용담을 들어볼 테냐?〕

별비는 마른 비가 비행의를 입고 날아간 뒤부터의 이야길 늘어놨다.

너를 노리고 온 놈들이 전부 나한테 덤벼들었다.

홀로 그것들을 쓸어버리는 데 나도 내가 이렇게 강한지 몰랐다.

나는 전설이다 등등…….

동월루의 요원들을 하오문으로부터 지킨 이야기를 할 때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재현을 하는 통에 배가 뒤집힐 뻔했다.

“거참. 처음 만났을 때는 묵직하고 분위기 있었는데 어쩌다가……. 중구 때문인가?”

마른 비가 쓴웃음을 짓자, 별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썼다.

“아, 아냐. 좋아! 진심으로 지금이 훨씬 좋아 보여! 어구~ 우리 별비, 그랬어요~? 고생 많았네.”

마른 비가 별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엔 새끼 호랑이 취급하지 말라며 따지던 별비는 나중에는 기분이 좋은지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음……. 얘는 어째 나이가 들수록 범보다는 커다란 강아지에 가까워지는 것 같네.’

자신에게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마른 비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게 왠지 흐뭇하고 기뻐서 마른 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구국. 구구구―.”

그때, 비둘기의 울음이 들려왔다.

별비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재빨리 존재감을 지웠다.

그제야 두려운 듯 허공을 맴돌던 비둘기가 요원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정해진 장소를 넘어 이동 중인 사람에게까지 찾아갈 수 있게 훈련시킨 추인전서구(追人傳書鳩)였다.

“으음…….”

요원은 빽빽하게 적힌 암호를 해석하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소식은 오스트갈에 대한 내용입니다. 황제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북경의 수비를 굳히고, 서달 장군에게 북쪽으로 더욱 깊숙이 올라가라고 명했다는군요.”

“북쪽으로?”

주원장다운 결정이었다.

오스트갈이 허를 찌르며 중원에 침투했지만, 그는 병력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북진하여 초원 깊숙이 숨은 카안의 목을 따오라고 명한 것이다.

하북이 쑥대밭이 되더라도 북경은 함락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내린 결단.

이렇게 되면 다급해지는 건 오스트갈이었다.

“허나 서달 장군은 걱정이 컸던 모양입니다. 오스트갈이 북경 근처를 맴도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는지, 패문강이란 무장에게 정예 기마대를 맡겨서 내려 보냈습니다.”

“패 아저씨에게?!”

자신이 남하하는 사이, 북쪽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른 비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요원이 서신의 뒷부분을 해독하고 말했다.

“두 번째는… 대협께 보내는 전언입니다.”

마른 비가 생각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현재 와족의 전대 족장님과 성인 전사들이 북쪽으로 진격 중입니다. 정보를 취합한 결과 십중팔구는 함정일 거라는군요. 루주님께선 대협께….”

잠시 뜸을 들이던 요원이 고개를 들었다.

“운남이 아닌 사천을 목표로 이동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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