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사천이라니? 운남이 아니라?”
마른 비가 의아해하자, 요원이 확인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들이 와족을 유인한 곳은 영인. 사천과 운남의 접경 지역입니다. 허나 루주께선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찜찜한 느낌이라니?”
정보를 다루는 자가 절대적으로 기피해야 할 것이 바로 ‘감(感)’이다.
느낌이란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현황을 분석하는 이들에게 배제해야 할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후개가 마른 비를 타박했던 이유였고, 하오문 소속이었던 요원 역시 그리 배웠다.
허나 백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저하게 분석한 정보를 바탕으로 알 수 없거나 누락된 부분, 그리고 예측이 필요한 영역에선 자신의 감에 의존한다.
그리고 요원의 표정을 보면 백강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는 듯했다.
“영인 일대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지극히 평화롭고 조용하죠.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어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접근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백강은 그믐의 서신을 받자마자 영인으로 첩보조를 파견했다.
허나 하오문 최정예 출신의 요원들이 침투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을 좌절시킨 게 누구일지는 뻔했다.
“공지량이구나.”
마른 비의 짐작은 정확했다.
와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 년간 절치부심한 응목대의 정예들.
그들이 공지량의 지휘하에 위치를 선점한 이상 파고들 틈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더욱 운남을 목표로 이동해야 하는 거 아냐? 거기가 전장이 될 확률이 높은 거잖아.”
마른 비가 묻자, 사내는 서신을 한 번 더 꼼꼼히 살핀 후에 대꾸했다.
“루주께선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충돌이 일어나겠지만, 최종 전장은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 다른 곳이 사천 어딘가란 뜻이리라.
허나 아무리 백강이라도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그렇게 판단한 이유였다.
“루주께선 대협께 서신을 띄운 후에 공지량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요원은 점창 장문인이란 표현을 쓰지도, 공대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 년 전에 있었던 전쟁의 내막을 알게 된 그는 마른 비와 분노를 공유했다.
“점창하면 고검부터 떠오를 만큼 여 대협의 위명이 압도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자는 구파일방 장문인치고 존재감이 없는 자였습니다. 열 명의 수장 중 무공이 가장 약했고, 특출한 행보를 보인 바가 없죠.”
사내는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를 더듬었다.
“그래서인지 하오문의 서고에도 그자에 관한 건 짤막한 몇 줄이 전부였습니다. 허나 와족과 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조사하며 그자가 굉장히 치밀하고, 집요하며, 악독한 자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운남 전역을 휘말리게 한 전쟁.
마른 비는 침묵을 지키며 요원의 말을 들었다.
“루주께서 찜찜하다고 느낀 게 그 부분일 겁니다. 누구보다 와족의 힘을 잘 아는 자가 복수에 나섰다면 확실한 패가 있을 텐데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중원에서 열 손가락에 든다는 군길산이 힘도 못 써보고 박살이 났다.
흑전대?
수면 위에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저력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백강은 흑전대만으로는 와족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습니다. 공지량 그자는 완전히 폐인이 됐었다면서요? 어떻게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원 최고의 의술을 지닌 괴의가 손을 썼더라도 예전의 무공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와족을 도발했다.
흑전대와 응목대의 연계를 뛰어넘는 힘.
단일 전력으로는 구파일방도 찍어 누를 와족을 꺾을 비책.
운남의 북쪽 끝으로 와족을 유인했다는 점에서 백강은 공지량의 안배가 사천에 있으리라 예상한 것이다.
“운남에 가려면 사천을 거쳐야 하지만, 목적지를 운남으로 잡으면 사천의 동쪽 경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빠릅니다.”
사내가 가상의 지도를 그리며 말했다.
“만약 전장이 사천 어딘가가 된다면, 대협과 길이 어긋날 가능성이 높죠. 반면에 사천의 중심을 목표로 잡으면, 어디서 싸움이 벌어지든 최단거리로 합류하는 게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백강의 감이 빗나가면 마른 비는 전혀 엉뚱한 길을 경유하는 꼴이 돼버린다.
사천을 목표로 ‘해라.’가 아닌, 그럴 것을 ‘권유한’ 이유였다.
마른 비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물었다.
“뛰어난 사람이지?”
“누구를 말씀하시는…? 아, 루주 님에 대해 물으시는 겁니까?”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가슴을 펴며 말했다.
“단언컨대 루주께선 최고십니다.”
상관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마른 비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를 띠었다.
“그럴 줄 알았어.”
마른 비가 별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좋아. 사천으로 가겠어.”
사내는 마주 웃더니 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 *
중원의 심장에 해당하는 섬서.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강남의 물류가 집약되는 장사만큼은 아니지만, 화음은 내륙 지방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번성한 항구였다.
“고생했어. 데려다줘서 고마워.”
하지만 마른 비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이 흑상이라는 말을 들은 뒤라 더욱 그랬다.
“이제 육로를 따라 남하하시면 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수왕. 부디 무운을.”
아침 해를 배경으로 소선이 멀어졌다.
마른 비는 사내에게 손을 흔들며 심호흡을 했다.
‘체력은 충분해. 이제 쉬지 않고 달린다!’
마른 비가 다리를 뻗을 때였다.
우측에서 날아든 전음이 그의 발을 멈춰 세웠다.
「역시 이쪽으로 오셨군요. 개방의 장오입니다.」
눈길을 돌리니, 생선을 파는 가판 앞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가 보였다.
「사사혈림, 진사맹, 육림회, 그리고 교아채까지……. 엄청나시더군요. 놈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깨부순 덕분에 잔챙이들은 전부 물러났습니다.」
개방의 눈길이 계속 따라붙은 모양이다.
그들은 마른 비가 화음으로 올 것까지 예상하고 미리 길목을 선점하고 있었다.
「관군의 개입 가능성도 낮습니다. 오스트갈이 침투한 탓에 성주와 관리들은 바짝 쫄아 있죠. 황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대협을 막진 않을 겁니다.」
가장 귀찮은 부분에 대한 염려를 덜었다.
마른 비가 눈으로 인사를 하자, 삼결 매듭을 단 장오가 입술을 달싹였다.
「섬서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무시하시면 됩니다. 대협께서 남하한다는 걸 듣고 화산에서 병력을 파견했거든요.」
『화산파? 그 사람들이 왜?』
장오는 ‘아, 거 불쌍한 거지한테 생선 한 마리 던져주면 망하기라도 하오?!’라고 외치더니 등을 돌렸다.
「여산에서 철혈검과 교분을 쌓으셨지요? 그가 사문으로 돌아가 대협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모양입니다. 대협을 돕고 사파를 정리할 겸 이대 제자들을 내려보냈습니다.」
화산이 정파인지 사파인지도 불분명한 한 사람을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간의 여정에서 마주친 인연들이 마른 비의 행보를 돕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후개 님의 전언입니다. 흑상의 무인들이 운남을 향해 움직였으며, 화음은 흑상의 세력이 뿌리내린 곳이다. 만약을 대비해 모든 준비를 갖춰 두었으니 화음을 나갈 때까진 개방의 지시에 따라 잠행할 것.」
뒤늦게 움직였음에도 개방은 흑전대의 개입을 포착해냈다.
그리고 백강이 그랬듯이 화음을 지배하는 게 흑상이란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후개의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열심히 움직여준 건 고마워. 근데 난 잠행 같은 걸 할 시간이 없어. 그냥 갈게.」
그 말을 끝으로 마른 비는 달려 나갔다.
장오가 화들짝 놀라며 동료들에게 전음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어, 엇?!”
“맙소사! 저자는…?!”
“수왕…! 수왕이다! 대역죄인이 여기에 있다!”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지금 중원에서 마른 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한족과는 미묘하게 다른 이목구비까지.
그의 외모는 보는 순간 알아챌 만큼 특징적이었다.
장사를 하는 상인이나 물품을 나르는 인부들, 무언가를 사러 온 손님들이 소리를 질렀다.
‘음? 잠깐….’
주변의 소란을 무시하고 달리던 마른 비가 움찔했다.
묘하게 무인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세히 보니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부터 고관대작으로 보이는 자들까지, 평소에 보기 힘든 인간 유형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알아채기 힘들 만큼 점점이 퍼져서 행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자연기를 다루는 마른 비의 이목을 피할 순 없었다.
‘뭘 하는 거지?’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의 옆에 꼭 누군가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시종인 척, 친구인 척, 혹은 항구를 안내하는 길잡이인 척하지만 전부 비슷한 기질이 느껴졌다.
‘……거래?’
옆에 붙은 자들은 마른 비의 눈길이 닿자 움찔하며 무언가를 숨겼다.
무기부터 광석, 노리개,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까지…….
심지어 어떤 놈은 살아 있는 생물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찾은 자들은 하나같이 묵직한 전낭을 건네는 중이었다.
‘……흑상! 흑상 놈들이 여기서 거래를 하는구나!’
작은 물품을 은밀하게 주고받는 데 항구만큼 적격인 장소는 없었다.
접선 장소에서 슬쩍 만나서 돈과 물품을 교환하면 끝이니까.
아마 여기서 거래하는 품목들은 크게 비싸지 않은 것들일 확률이 높았다.
‘저놈들이 부족 식구들을 공격하려고 나섰던 말이지?’
섬서 유일의 항구이자, 운남으로 가는 최단거리.
필히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 하필이면 적의 본거지라니.
길을 서두를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머리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흑상으로 추정되는 놈들은 마른 비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황급히 거래를 마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월루와 개방이 동시에 적으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 반응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들이 부족을 치려고 병력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본 김에 다 쓸어버려?’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쥐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많은 숫자를 일일이 잡기도 힘들뿐더러 그러면 시간이 지체된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놈들은 잔챙이일 확률이 높았다.
‘후우……. 나중에 보자.’
마른 비는 가까스로 화를 누르며 항구를 벗어났다.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벼르면서.
항구와 인접한 시가지에 접어들자 행인들의 탄성과 외침이 터졌다.
그 모든 걸 뒤로하며 달렸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뭐야, 이건?’
사 년 전, 처음 대리에 들어갔을 때부터 자연물은 물론이고 인공 구조물의 호흡까지 잡아냈던 마른 비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가운데, 근방에서 평범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시릴 만큼 날카롭게 제련된 철…. 이건 영약이 뿜어낼 법한 기운이고…. 이건 모르겠네. 그리고 이건…!’
결정적으로 짐승의 구슬픈 울음이 들렸다.
아니, 느껴졌다.
마른 비는 걸음을 멈추고 다양한 기운이 전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백의서원(白意書院)?’
깨끗한 뜻을 추구하며 학문을 강론하는 곳.
만약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나 학자요~!’ 하고 외치는 듯한 얼굴.
백의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사내였다.
저 멀리 글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아닌가?’
마른 비는 예상과 전혀 다른 풍경에 당황했다.
하지만 서원의 문턱을 넘자마자 기운이 뚜렷하게 느껴졌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뗐다.
“여기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입을 열긴 했는데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른 비는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여기가 흑상의 비밀창고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