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흰 옷을 입은 사내는 당황한 눈치였다.
면전에서 다짜고짜 이런 소릴 늘어놓는 인간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세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예. 맞습니다.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여기가 바로 흑상의 비밀 창고입니다.”
이번엔 마른 비가 당황할 차례였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대놓고 물었는데, 순순히 수긍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내가 마른 비의 표정을 보더니 웃었다.
“하하. 재미난 분이시군요. 그렇게 물으면 누가 맞다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니지,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 당황할 수도 있겠네요.”
자신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찔리는 게 없기 때문에 농담으로 받아칠 수 있는 걸까?
사내는 표정과 태도로 후자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마른 비가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사마의라 합니다. 아이들의 글공부를 담당하고 있죠. 백의서원의 수석 학사이기도 하고요.”
이름을 밝힘으로써 비밀 창고에 대한 논의를 자연스럽게 넘겨 버렸다.
거론할 가치가 없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스스로를 사마의라 밝힌 사내는 추가로 덧붙였다.
“아름다울 의(懿)가 아니라 옳을 의(義)자를 씁니다. 고대 삼국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셨던 그분의 후손이죠.”
어두운 면을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자의 당당함.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자 특유의 자신감도 엿보인다.
무(武)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데도 마른 비는 사마의에게서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의심스럽다.
학문에 대해선 모르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한다.
마른 비가 보기에 사마의는 절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이런 조그만 서원에 머무를 그릇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연기가 전하는 느낌을 믿었다.
“마른 비.”
그 한마디로 통성명을 끝냈다.
그러곤 곧바로 물었다.
“둘러봐도 돼?”
이번에는 사마의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 불쾌한 표정으로 눈빛이 흔들리는 걸 숨기고 있었다.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미미했지만, 마른 비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사마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진심으로 물으신 거군요. 학문을 닦는 곳에 와서 다짜고짜 그런 걸 묻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제는 둘러보겠다니……. 수왕은 원래 이렇게 무례합니까?”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점은 놀라울 게 없다.
북벌에 참전하고, 강소성의 백성들을 돌봤으며, 황제와도 친한 이민족 사내의 소문은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졌으니까.
마른 비가 거침없이 대꾸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스스로도 잘 알리라 믿어.”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마른 비는 서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무공을 모르는 사마의가 그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글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바라봤다.
“이런 막무가내가…!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어딜 봐서 여기가 흑상과 관련이 있다는 거죠?”
마른 비가 뒤를 따르는 사마의를 힐끗 쳐다봤다.
“내가 틀렸다면 정중히 사과할게. 하지만 맞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마른 비는 거기까지 말하고 눈을 감았다.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기운들.
그에게 확신을 준 건 별비였다.
〔비아, 네가 맞다. 나도 느껴져. 위치는….〕
『땅 속.』
은신 중인 별비에게 언령을 보내며, 마른 비가 눈을 떴다.
“아저씨, 뭐예요?”
“깡패다! 저 사람 방금 스승님을 협박했어!”
“너무 커……. 흑…! 무섭게 생겼어…!”
대청에 있던 아이들이 소란을 피웠다.
누군가는 마른 비에게 소리를 질렀고, 어떤 아이는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사마의의 앞을 막아서며 마른 비를 노려보는 아이도 있었다.
여아들은 마른 비의 덩치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엉엉 울기도 했다.
잠시 난감해하던 마른 비가 부드럽게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내가 꼭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잠시 비켜줄 수 있을까?』
극성에 이른 야수 친화.
언령에 실린 친근한 음성이 아이들의 경계심을 녹였다.
마른 비의 성품이 드러나는 그것은 두려워하던 아이들까지도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음……. 뭐가 좋을까? 아, 내 친구를 소개해줄게!』
마른 비는 별비를 불러냈고, 새하얀 털의 대호가 멀찍이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악!”
“호, 호랑이야!”
“얼른 도망쳐…!”
“우앙~! 엄마아아~!”
난리가 났다.
마른 비는 야수 친화를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쉬~ 괜찮아! 해치지 않아. 별비는 착해.』
“훌쩍… 별비?”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다 말고 물었다.
마른 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언령을 퍼뜨렸다.
『별비야. 이리와.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겁을 먹고 도망치던 아이들까지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른 비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별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발톱과 이빨을 숨긴 별비가 조심조심 걸어와서 마른 비와 사마의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염병. 별짓을 다하는군.〕
별비의 툴툴거림은 마른 비만이 들을 수 있었다.
『표정, 표정…! 착하게 웃어! 그렇지~. 잘하고 있어.』
별비가 투덜대다 말고 눈을 순하게 떴다.
그리고 ‘난 생긴 것만 이렇지, 사실 초식 동물처럼 온순해.’라는 표정으로 방실댔다.
별비는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채고 순순히 따라주었고, 그건 꽤나 효과적이었다.
『봐. 위험하지 않아. 별비는 착하거든.』
마른 비가 별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비도 주인의 손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부비며 호응했다.
“마, 만져 봐도 돼요?”
경계심을 풀어헤치는 야수 친화와, 중원에서 신수로 여겨지는 백호에 대한 호기심.
사내아이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른 비는 아이를 인도하여 별비의 털을 만질 수 있게 해주었다.
『어때? 얌전하지?』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달려와서 별비를 쓰다듬고, 자신의 손과 앞발을 비교했다.
겁 없는 아이 하나는 벌써 별비의 등에 올라가 있었다.
〔야, 야! 수염 잡아당기지 마! 잠깐만! 거, 거긴…!〕
폭발적인 관심에 별비가 버거워할 무렵, 마른 비가 조용히 멀어졌다.
“여긴가?”
입구가 있겠지만, 그걸 찾고 있을 여유는 없다.
마른 비는 대청의 끝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우지직―!
수왕의 힘을 견디지 못한 마루가 비명을 지르며 통째로 뜯어졌다.
대청 아래를 살피니, 굄돌과 주춧돌 너머로 빈 공간이 보였다.
마른 비는 아이들이 별비에게 정신이 팔린 걸 확인한 뒤, 마루를 적당히 부숴서 거기까지 가는 길을 확보했다.
“가르릉, 가릉.”
별비는 사방에서 매달리는 아이들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아이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자신들이 공부하던 공간이 박살 났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재롱을 피웠다.
“그르르….”
그러면서도 간간이 푸른 눈을 번뜩여 사마의가 허튼짓을 못 하도록 막았다.
“…….”
사마의는 붙박이처럼 서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절대 발각되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창고가 들통 난 것도 기가 막혔지만, 무공을 모르는 그가 별비의 눈길을 받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
별비가 바깥의 일을 도맡을 때, 마른 비는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내려가는 중이었다.
‘철문…!’
척 봐도 육중해 보이는 문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와 문과 이어진 평지에 발을 디디는 순간, 덜컥! 소리가 났다.
피피핏! 퓨퓩! 피빗―!
강침과 비수.
피할 곳 없는 좁은 통로를 암기가 뒤덮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손으로 눈만 가린 채 태연하게 걸어갔다.
‘허술해.’
기관을 설치한 자가 들었다면 거품을 물었으리라.
미카엘의 판금갑 같은 걸 걸치지 않는 한 절명할 수밖에 없는 함정.
심지어 암기엔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릉을 탐사했던 마른 비에게 이 정도 기관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맨몸으로 기관을 돌파한 마른 비가 철문을 두드렸다.
‘제법 튼튼하네?’
허나 아무리 튼튼해도 거용관의 성문만 할까.
마른 비는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기막을 쳐서 소리를 차단한 뒤, 주먹을 휘둘렀다.
투쾅―!
철문이 날아가고, 뻥 뚫린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좌우에서 검이 날아왔다.
“그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날카로운 기운을 뿜는 무인들.
흑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급습을 가해왔다.
어디 가도 고수 소리를 들을 만한 검사들이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스파앗―!
환영처럼 사라졌던 마른 비가 삼 장 앞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주먹이 육신을 두드리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컥!”
“크억…!”
마른 비는 비명을 토하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지하 광장을 가득 메운 물건들을 훑고 있었다.
“허…! 이게 다 뭐야?”
찬란한 빛을 뿜는 광석부터, 명공이 심혈을 기울인 세공품, 날카로운 신병이기와 군에서나 사용할 법한 전략 무기들…….
도자기와 그림, 서적과 같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도 가득했다.
종류별로 깔끔하게 분류해놓은 그것들은 척 봐도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녔을 게 틀림없었다.
“삐익, 삑…!”
“크릉, 컹컹!”
그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녹색 눈의 사슴, 다섯 가지 털빛을 지닌 고양이, 부리가 노란 백로, 머리가 둘 달린 늑대…….
운남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 생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은빛 털을 지닌 새가 마른 비의 눈길을 끌었다.
“삐로롱, 삐롱!”
가슴과 눈 부위는 밝은 하늘색을 띠고, 그 외의 털은 은빛인 새였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른 비가 탄성을 질렀다.
“너…! 풍조(風鳥)구나!”
운남에서도 열대우림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새.
극락조(極樂鳥)라고도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이 녀석은 화려한 구애의 춤으로 유명한 어깨걸이 풍조였다.
영특하게 반짝이는 눈빛.
마른 비는 자신이 들었던 게 이 녀석의 울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기를 다루는 것 같진 않은데… 지능이 발달한 건가?”
풍조는 전처럼 구슬프게 울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서 마른 비를 똑바로 보는데, 그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네 덕분에 여길 발견할 수 있었어.”
마른 비는 우리를 부숴서 동물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풍조에게 말했다.
“네가 다른 애들을 바깥으로 인도해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지?”
풍조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날갯짓을 했다.
그리고 마른 비의 어깨에 내려앉아 머리를 부빈 뒤에 짐승들과 함께 밖으로 날아갔다.
녀석은 나가는 순간까지 마른 비를 힐끔거렸다.
“자, 그럼….”
광장에는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석에 모여서 바들바들 떨었는데, 그중 한 명이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사, 살려주시오. 우, 우린 물품의 관리를 맡았을 뿐 누군가를 해친 적이 없소. 싸울 줄도 모른단 말이오!”
마른 비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말을 한 사내와 떨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선 무공을 익힌 흔적도, 피 냄새나 음험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항할 힘도 없는 자들.
마른 비가 한숨을 쉬며 주먹을 내렸다.
“……잘 들어. 난 나중에 다시 올 거야. 그때도 보이면 절대 봐주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지?”
사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도망을 치든, 숨든,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해. 내가 거기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까.”
사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도 흑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울상이 됐다.
그래도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는지, 바닥을 구르다시피 동굴을 빠져나갔다.
화르륵―
마른 비는 잘 탈 것 같은 서적과 그림 따위를 집어 들었다.
화염의 속성기를 일으키니 금세 불이 붙었고, 군데군데 불을 놓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타지 않는 물품들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약하게.’
포개진 주먹이 가슴 앞에 놓였을 때, 휘황찬란한 빛이 동굴을 밝혔다.
번쩍― 투쾅!
서리불꽃이 흑상이 애써 모아놓은 물품들을 집어삼켰다.
가루가 되는 걸 넘어 입자까지 분해돼 버린 그것들은 흑상이 지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기왕 왔는데 챙기는 것도 있어야겠지?”
벽면 한쪽에는 일부러 파괴하지 않은 물품들이 있었다.
보관을 위해 공기가 드나들 구멍과 적당한 온도까지 맞춰놓은 진열대엔 중원의 무인들이 애타게 찾는 물건이 즐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