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74화 (374/463)

374화

“이런 걸 잘도 모아놨네.”

진열대에 쌓인 건 영약이었다.

‘천년하수오’니 ‘공청석유’니 하는 전설상의 영약은 아니다.

허나 척 봐도 무공 증진에 효력이 있을 듯한 약재들이었다.

그중에는 어릴 때 괴의 덕분에 먹었던 야생초도 보였다.

“에이, 뭐야……. 나랑 별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잖아?”

자연기 덕분일까?

희한하게 슥 둘러보는 것만으로 느낌이 왔다.

흑상이 모은 약초들은 기초 체력을 향상시키고, 기감을 확장하며, 오감을 발달시키는 등 다양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에겐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의 마른 비에게는 건강식 이상의 의미가 없다.

백 뿌리 가까운 약초 중에 구미가 당기는 게 하나도 없다니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챙겨 가야지.”

분명 요긴하게 쓸 데가 있으리라.

마른 비는 바닥에 놓인 포대에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며 생각했다.

‘시끄러워지겠네.’

개방과 하오문도 발견하지 못한 흑상의 비밀 창고.

그걸 밥 한 끼 먹을 시간에 해치워 버렸다.

자신처럼 자연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면 찾아낼 수 없었겠지만, 뭔가 쉬운 감이 있었다.

허나 이제부턴 달라지리라.

지금쯤이면 흑상의 병력이 달려와서 진을 치고 있을 테니까.

‘어?’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변한 게 없었다.

별비와 노는 아이들과, 그 뒤에 우두커니 선 사내.

마른 비가 의아해하며 기감을 퍼뜨릴 때, 사마의가 물었다.

“끝났습니까?”

침착한 얼굴이었다.

마른 비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조용해? 친구들 안 불렀어?”

사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화음에는 당신과 백아를 잡을 고수가 없습니다. 쓸데없이 희생을 늘릴 이유가 없죠. 달려오던 자들도 전부 철수시켰어요.”

이건 의외였다.

힘에 부친다지만 창고가 털렸는데 저항 한 번 하지 않다니.

그리고 마른 비가 보기에도 사마의는 꽤 중요한 인물 같았다.

한데 구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니…….

“부피를 보니 자루에 든 건 영약이겠군요. 평범한 무인이라면 모를까, 당신 같은 강자에게는 필요가 없을 텐데요?”

사마의는 차분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구들에게 줄 생각이군요. 한데 어쩌죠? 당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살아남은 자들이 없을 텐데.”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사마의가 저런 말을 하는 건 흑전대를 염두에 둔 게 분명했다.

마른 비가 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흑전대를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오산이야. 작별 인사는 했어? 그놈들은 운남에서 살아나오지 못해.”

사마의의 평정이 깨졌다.

그는 마른 비가 흑전대를 알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이동경로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눈가를 떨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런……. 당했군요. ‘그놈’이 우릴 이용했어…. 찜찜하긴 해도 모든 걸 잃어서 허튼짓은 못 할 거라고 여겼는데. 권력을 되찾는데 혈안이 돼서 뒤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공지량을 알아?!’

어감으로 볼 때 확실했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조건만 맞으면 의뢰인의 신상을 캐묻지 않는 용병들과 달리 흑상은 큰 거래에 있어서는 거래인의 신분도 철저히 파악했다.

흑전대를 움직일 만큼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거래인을 확인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운남에 내려가서 그를 보았을 때, 보자마자 느꼈죠. 절대로 믿어선 안 되는 인간이라는걸. 당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

심지어 사마의는 공지량을 직접 만났던 모양이다.

마른 비가 놀랄 때도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전 흑전대를 파견하는 걸 반대했습니다. 허나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원로들의 눈이 돌아가 버렸죠. 모든 걸 잃은 자가 그런 거금이 어디서 난 건지……. 그건 일개 문파의 장문인이 모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어요.”

운남의 총독으로 지내며 수십 년간 빼돌린 자금.

호르찰이 남긴 돈은 군길산과 흑상을 동시에 움직일 정도였다.

“거짓말을 한 점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은 않겠습니다. 창고를 순순히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흑전대를 파견한 것 또한 마찬가지. 우린 상인답게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흑상이 양지의 상인 집단과 다른 점이었다.

그들 역시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으나, 법과 도덕이란 테두리 안에서 상행위를 한다.

허나 흑상은 돈과 사람의 목숨을 맞바꾸는 것 또한 거래라고 여기는 듯했다.

잠자코 듣던 마른 비가 물었다.

“이해가 안 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신 지금 자신이 한 말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잖아. 왜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거야?”

“……!”

사마의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그 어느 때보다 동요했다.

마른 비가 자연기가 전하는 감각에 집중하며 말했다.

“항구에서 거래를 하던 자들과 창고를 지키던 무인들. 그 사람들과 당신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완전히 달라. 왜 당신 같은 사람이 흑상에 있는 거지?”

사마의의 표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 무슨…?! 수왕이라더니 천기자의 흉내라도 내는 거요? 넘겨짚지 마시오. 나는 내 의지로…!”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지금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

사마의가 병력을 물린 탓에 여기엔 그와 마른 비뿐이었다.

별비와 놀던 아이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당신은… 신비한 사람이군요. 나로선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어…….”

사마의는 고개를 꺾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눈을 꾹 감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저 뒤늦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힘없는 정의란 공허하며,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신념은 약자의 자위일 뿐이란걸. 특히 이 무림이란 세계에선 말입니다.”

사마의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신룡(胂龍) 덕분에 그걸 깨달았죠. 뼈에 새길 만큼 절절하게. 그런 찰나에 흑상이 나를 원했고, 나는 힘을 갖추기에 가장 빠른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여규가 있었다면 깜짝 놀랐으리라.

기지개를 켜는 용.

그건 천하제일지자(天下第一智者)이자 정도맹의 총군사이며, 제갈량의 현신이라 일컬어지는 제갈준의 별호였으니까.

“흑상은 무도한 집단이지만, 저와 같은 사람이 힘을 얻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습니다. 지금껏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는데……. 당신과 대화를 나눌수록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군요.”

처음으로 털어놓는 진심이었다.

사마의는 후련해진 얼굴로 말했다.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왔군요. 혼자 똑똑한 척은 다했는데 이토록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사마의의 눈빛에 각오가 깃들었다.

그는 마른 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행여나 아이들에게 손대는 일은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제 목숨을 취하는 걸로 끝내주십시오.”

사마의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눈을 감았다.

마른 비는 그의 얼굴과 자신의 주먹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손을 내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 앞이라는 것. 당신이 무공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게 당신을 살려주는 이유야.”

사마의가 눈을 번쩍 떴을 때, 마른 비는 그를 지나쳐 있었다.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지? 그럼 앞으로는 돌아볼 일을 만들지 마. 다음에 왔을 때도 여기 있으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저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마른 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처리는 당신이 알아서 해. 물품 관리하던 사람들도 다치지 않게 돌봐주고. 가자, 별비야.”

수왕이 떠난 자리.

그곳엔 뒤를 돌아보며 격동하는 사내가 있었다.

별비와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아이들과, 사마의에게 달려와 괜찮냐고 묻는 아이들.

마른 비와 별비가 멀어진 뒤에 굵직한 전음이 들려왔다.

「총사님. 화음에 주둔하는 전 병력을 끌어모아 천라지망을 펼쳤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명을 내려주시길.」

“…….”

사마의는 공격 허가를 구하는 전음에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다.

「총사님?」

사내가 재촉하자, 사마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불허합니다. 서안이라면 모를까, 지금 화음엔 수왕을 맞상대할 고수가 없어요. 백호까지 함께 있는 이상 잡을 수 있을지 불투명합니다. 설령 잡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겠죠.”

사내는 수긍할 수 없는 눈치였다.

「잡을 수 있습니다! 본상단의 힘을 아시지 않습니까? 절대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

사내가 억눌린 어조로 대꾸했다.

「한 번도 발각된 적이 없는 비고가 털렸습니다! 이 일을 원로님들께서 아시면…!」

“제가 책임집니다.”

사마의는 단호하게 사내의 말을 끊었다.

“중품(中品)을 보관하는 창고일 뿐입니다. 상품(上品) 이상을 취급하는 흑비고(黑祕庫)는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수왕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마도 희귀수(稀貴獸)들과 연관이 있겠지요. 수왕이라 불리는 만큼 동물들과 교감하는 게 아닐지….”

사마의가 전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비고에 있는 희귀수들을 전부 꺼내고, 그것들을 보관할 창고를 새로 마련하세요. 앞으로 짐승들은 따로 보관합니다. 엉망이 된 서원도 복구하시고요.”

「…….」

“대답 안 할 겁니까?”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사내가 입술을 깨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 대답을 지연하는 것으로 못마땅한 심사를 드러냈다.

「……알겠습니다. 총사님.」

사내가 멀어지자, 사마의는 엄격하게 굳혔던 표정을 풀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를 걱정하는 아이들 틈에서 여아 하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는걸.

* * *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백의서원, 아니, 흑상의 비밀 창고를 나오자마자 전음이 날아들었다.

항구에서 마주친 장오란 거지였다.

「흑상의 총단과 비고는 개방의 총력을 쏟아붓고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간단하게….」

마른 비의 대답은 더 간단했다.

『그냥. 느낌으로.』

「……후개 님이 들으면 가슴을 부여잡고 꺽꺽대시겠군요.」

장오는 기가 막혀 하다가 임무에 집중했다.

「마구잡이로 달려가시기에 놀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했죠. 화산과 협력하여 앞길을 말끔히 정리했습니다. 이대로 전속력으로 운남까지….」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저었다.

『운남으로 안 가. 사천으로 갈 거야.』

「…….」

‘사천은 또 왜?!’, ‘뭐 이런 제멋대로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게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오는 개방의 노련한 제자답게 얼른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에 맞춰서 경로를 수정하겠습니다.」

장오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도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와족의 족장님은 남성이시죠?」

마른 비는 개방에게 와족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질문도 다소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건 왜?』

장오는 뭔가 주저하는 눈치였다.

「음…. 운남의 동향을 탐문하는 와중에 북서쪽에 있는 설산에서 대단한 여걸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대협과 비슷한 또래라던데….」

‘노을이구나!’

마른 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이어진 장오의 말에 그의 생각이 끊겼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지막 보고에 따르면 그분이 목숨을 잃은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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