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75화 (375/463)

375화

* * *

‘대, 대단하구나…!’

개방의 사결제자 응삼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 속에 파묻힌 몸이 차갑다 못해 아려왔지만, 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소수부족과 정체 모를 괴인들…! 저들은 체계적인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니야! 한데 어찌 이토록…!’

강하다.

자신으로선 감히 덤빌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단체로 맞붙은 자들도 그렇지만, 전장의 중앙에서 싸우는 두 사람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이, 이건 후개 님이 오신다 해도…!’

후개는 구칠로 위장한 마교의 첩자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혔고, 분열된 개방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용두방주에게만 전승되는 무공을 전수받았다.

허나 응삼이 보기에 월등히 강해진 후개라 해도 저 두 사람과 싸우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그가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뜰 때, 원숭이 괴인이 움직였다.

“캬오오오!”

육신에 휘감긴 검은 기운.

백수교 좌호법의 주먹이 설산의 공기를 갈랐다.

거기엔 대지를 쪼개버릴 듯한 패력이 담겨 있었으나, 노을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투화장이 빛나고, 사선으로 올려 친 독수리 사냥이 옹개의 주먹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하아압!”

투바바박―!

기합이 터지고, 피가 튄다.

둔탁한 타격음은 올빼미 사냥이 팔뚝의 살을 헤집는 소리였다.

노을은 독수리 사냥으로 방어를 하는 동시에 올빼미 사냥으로 반격까지 꽂아 넣었다.

하늘로 솟구친 옹개의 팔뚝에서 수십 줄기 피가 솟구쳤다.

“캬아악!”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옹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왼 주먹을 휘둘렀다.

노을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발을 차올렸다.

투학―!

선 채로 펼친 날짐승 떨구기가 옹개의 팔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오른팔과 왼팔이 전부 튕겨 나간 상황.

중심이 흐트러져야 정상이다.

허나 옹개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의 균형을 잡았고, 무릎을 차올렸다.

“카오오오!”

붉은 눈이 번쩍인다.

두개골을 가루로 만들 슬격(膝擊)이 쇄도했다.

그 순간, 노을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스르륵―

“……?!”

낙엽 가누기.

환영처럼 흩어진 노을의 육신은 보고도 맞출 수 없는 허깨비 같았다.

분명히 무릎을 제대로 꽂아 넣었는데, 빗나갔다.

적중은커녕 스치지도 못한 것이다.

옹개 입장에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카아아…!”

열불이 치민 옹개가 버럭 소리를 지를 때, 턱밑에서 살의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힘만 무식하게 세졌지, 너무 느려. 맞으면 끝장이겠지만, 내가 그런 걸 맞아줄 리 없잖아?”

설산의 눈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옹개가 눈길을 내리기도 전에 몸을 지탱하는 다리가 걷어차였다.

빠바바바박!

집(集), 솔잎 털기.

무릎의 뒤편, 오금에 집중된 발차기다.

동물적인 균형 감각이고 뭐고, 제대로 얻어맞으면 자빠질 수밖에 없다.

노을은 뒤쪽으로 넘어가는 옹개에게 곧바로 따라붙었다.

“죽어.”

제아무리 초월적인 주술이라도 골통을 부숴버리면 회복하지 못할 터.

정권을 내리꽂는 순간, 노을은 위화감을 느꼈다.

‘웃어?!’

옹개가 뒤로 넘어지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뒤통수 쪽에서 들리는 파공음!

노을이 재깍 몸을 틀었다.

투쾅―!

노을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녀는 훨훨 날아가서 눈 속에 처박혔다.

전장 곳곳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조, 족장님…!”

“안 돼! 저걸 제대로 맞았…!”

옹개는 전투화장을 발동한 노을의 공격을 받고도 계속 움직였다.

빗나갔던 슬격.

넘어가는 순간, 몸을 뒤틀며 노을의 뒤통수를 향해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보고도 믿지 못할 맷집과 반사 신경이었다.

“노을이에게… 아니, 족장님께 저렇게 얻어맞고도 움직인다고?”

산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댔다.

노을과 무수히 대련을 해봤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한 방 한 방의 묵직함은 자신이나 안개걸음보다 떨어지지만, 노을은 연타와 정교함으로 한계를 극복해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정밀한 예격(銳擊).

맷집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릴 생각이 없는 자신조차 집요하게 급소를 두드리는 정타에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반대편 전장에서 안개걸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저놈, 타격을 입었어! 봐라! 몸이 너덜너덜하다!”

올빼미 사냥이 잡아챈 팔뚝은 차마 보기 힘들 만큼 처참했다.

솔잎 털기가 집중된 다리는 무릎뼈가 뒤쪽부터 박살 나서 튀어나왔다.

날짐승 떨구기가 가격한 팔도 성치 않았다.

보는 사람의 눈이 찌푸려질 정도의 중상.

그런데도….

“멀쩡히 일어난다고?”

심지어 웃고 있었다.

와족 전사들이 상식을 넘어선 옹개의 모습에 신음을 흘릴 때였다.

“퉷!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노을이 피를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와족 전사들이 탄성을 지르다 말고 주춤했다.

그녀의 왼팔이 기이하게 뒤틀린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흘렸는데도 부러졌어. 제대로 맞았으면 죽었겠군. 힘 하나는 우둔한 땅 아저씨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야.”

우드드득.

노을은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태연하게 뼈를 맞췄다.

골절된 부위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당장 전투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녀는 배가 훤히 보이도록 상의를 찢고, 근처에 널브러진 짐승의 정강이뼈를 뽑았다.

그렇게 간이 부목을 만들어서 능숙하게 팔을 고정했다.

그런 뒤에 옹개를 바라봤다.

“그 지경이 되고도 일어선 건 칭찬해줄 만해. 근데 움직이진 못하겠지?”

와족 전사들의 눈이 옹개를 향했다.

그리고 노을의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고장 난 기계장치처럼 끼긱대는 괴인.

옹개는 노을이 일어선 순간부터 달려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무릎을 쩔룩이며 나아가지 못했다.

“이럴까 봐 무릎 관절을 완전히 박살 냈지. 그 희한한 술법으로도 금방은 못 고칠걸?”

고개를 돌리니, 황보숭이 양손을 앞으로 내민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수령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그가 술력을 퍼부어도 옹개의 무릎을 쉽게 재생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노을이 여유롭게 걸어가며 말했다.

“뭣들 해? 얼른 쓸어버리지 않고. 저놈이 없는데도 이기지 못하면 죄다 사람거미가 사는 굴에 처박아버릴 줄 알아.”

“오, 오오오! 맡겨주십시오, 족장!”

“족장님 말씀 들었지?! 저 원숭이 놈이 뒈지기 전에 여길 정리하지 못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

사기가 치솟았다.

부드러움 속에 깃든 강인함.

와족 최초의 여족장이 탁월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청년 전사들이 백수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수인과 청기를 압도했으며, 수투사까지 서서히 밀어붙였다.

결정적으로 산과 안개걸음이 전투화장을 발동하고 날뛰기 시작하자, 전세는 와족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커어엉!”

“슈라라락―!”

짐승들의 싸움도 치열했다.

와족의 반려수 대 백수교의 수호수.

눈이 퍼렇게 번뜩이는 곰과 붉은 눈의 호랑이가 힘을 겨뤘다.

물소와 들소가 뿔을 맞부딪히고, 늑대와 승냥이가 서로의 목을 물어뜯었다.

“크와아앙!”

“커헝…!”

몇몇 녀석들은 자연이 만든 함정에 빠져 추락하기도 했다.

여긴 노을이 칼바람과 싸우던 장소였고, 눈으로 덮인 땅엔 끝을 알 수 없는 균열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 세상에…!’

맹수전(猛獸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야수들의 싸움이 벌어지니, 개방 제자 응삼은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몰라 눈을 휙휙 돌렸다.

“삐아아악―!”

그중에서도 백미는 설산의 눈을 뒤집어쓴 듯한 흰 수리였다.

편대를 이룬 맹금들이 질풍처럼 내리꽂혔다.

하얀 깃을 상처 입힌 놈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듯 독수리들은 부리와 발톱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유리해 보이지만… 적이 너무 많아…!’

응삼이 전장을 넓게 둘러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와족의 전사와 반려수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숫자의 차이가 너무도 큰 것이다.

백수교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짐승을 끌어들인 건지 설산에는 붉은 눈의 야수가 빼곡했다.

‘와족 전사들의 힘을 증폭시킨 술법도 무한정 지속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우위를 보이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끝이다. 나도 슬슬 빠져야 하나?’

응삼이 비관적인 전망을 떠올릴 때였다.

달려들려고 몸부림을 치는 옹개와, 그녀에게 다가가는 여인.

공격을 준비하던 노을이 손을 내렸다.

“안 되겠어.”

봉우리로 밀려드는 짐승들을 본 뒤였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전장에서 무슨 짓을?!’

코앞에 적을 둔 상황이다.

응삼이 불안해서 몸을 들썩일 찰나, 노을이 눈을 떴다.

푸른 광채로 번쩍이는 눈빛.

입술이 열리며 여제의 명이 흘러나왔다.

『자아를 잃은 짐승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백수교의 맹수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더 놀라운 건 반려수들의 반응이었다.

그것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했는지 무방비가 된 적을 건드리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와족 이십삼 대 족장 저녁노을이 말하노니, 무익한 싸움을 멈추어라. 그리고 자각하라. 너희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를.』

극성에 이른 언령이 사방으로 번졌다.

야수 제어는 뇌력에 기반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오성(悟性)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노을은 그 부분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다.

설산의 정수를 녹인 자연기가 언령에 휘감기는 순간, 야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크, 크르르….”

“샤라락, 카락!”

“푸르륵….”

놀라운 광경이었다.

찬란히 내리쬐는 햇살과, 부복하듯 엎드린 야수들.

충혈된 것처럼 붉던 짐승들의 눈이 차츰 옅어지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을…!”

황보숭이 옹개를 치유하다 말고 경악했다.

그는 이토록 강력한 술언을 본 적이 없었고, 수신의 가호를 걷어낼 비술이 존재한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천외천(天外天).

자연기에 이어 야수 제어가 백수교의 술법에 상극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수령사들이여! 정신을 집중하라! 지금 소체에 대한 제어를 빼앗겨선 안 된다! 뒤를 생각지 말고 술력을 퍼부어라!”

황보숭이 다급하게 명령을 쏟아냈다.

그러자 짐승 가죽을 걸친 수령사들이 뼈 지팡이를 하늘로 쳐들었다.

검은 기운이 상공에 응집되고, 노을의 언령을 뒤덮듯 짐승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푸른 눈을 빛내며 서 있던 노을이 주춤하며 흔들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제대로 된 술사들이 합동으로 펼치는 술력을 홀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산이 수투사 한 명의 머리를 부수며 외쳤다.

“바위 곰 전사들이여! 앞으로 나서라! 최전선에서 적들을 막아!”

건너편 전장, 산의 의도를 눈치챈 안개걸음이 호응했다.

“나무표범과 검은 수리는 뒤로 빠져라! 그리고 야수 제어를 펼쳐! 족장님을 도와 놈들의 술력을 상쇄해!”

전사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산에 모인 야수들을 지배하는 쪽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거라는걸.

수장들의 명에 따라 와족 전사들이 뇌력을 개방했다.

반려수들이 백수교의 교도들을 물리치며 그들을 호위하듯 감쌌다.

“어딜 슬금슬금 다가오느냐!”

“가까이 오지 마라! 접근하는 순간 가루로 만들어 주마!”

바위 곰 전사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와족의 최전선을 지키는 방패였다.

기긱― 기기기긱―

검푸른 기운이 물고 물리며 공간을 비틀었다.

얼마나 큰 기운이 모였는지 무형의 술력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양측은 거세게 소리치며 아군을 독려했다.

“절대 밀리지 마라! 전투화장이 개방한 힘을 야수 제어에 쏟아!”

“이 부정한 기운…! 수신의 영이여! 저 삿된 것들을 벌하소서!”

술력전(術力戰).

당사자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 이런 전투는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응삼은 몸이 차갑게 식은 것도 모른 채 입을 헤벌렸다.

“카, 카앙…! 크아앙!”

“샤아악! 캬아…!”

술력에 노출된 야수들은 죽을 맛이었다.

정신의 전후좌우가 번갈아 가며 짓눌리는 감각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터졌다.

“돼, 됐다! 회복되었어…! 좌호법이시여! 부정한 기운의 진원인 저 여인을 제압하소서!”

목소리의 주인은 황보숭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짐승의 울부짖음이 폭발했다.

“카오오오오!”

한 마리 짐승이 되어버린 듯한 괴인.

거대한 육체가 공간을 압축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