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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76화 (376/463)

376화

‘벌써 회복했다고?!’

노을의 표정이 변했다.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야수 제어를 펼친 것인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한 것이다.

옹개의 육체와 노인의 술력이 예상보다 출중한 모양이었다.

‘칫…!’

이건 치명적이다.

야수 제어를 풀면 전쟁에서 패배하고, 풀지 않으면 내가 다친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

노을은 저도 모르게 산과 안개걸음을 돌아봤다.

‘늦어…….’

둘은 주위의 적을 제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늦다.

아니, 옹개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놈이 너무 빨랐다.

‘어쩔 수 없어. 전투에서 지더라도 일단은 내가 살아야….’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다.

그녀는 족장이며, 절대 쓰러져선 안 된다.

지금은 패배하더라도 살아남아야 뒤를 이어갈 수 있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평범한 전사들 스무 명이 죽는 것보다 족장이 목숨을 잃는 게 훨씬 커다란 타격이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그렇게 하려니 쉽지 않았다.

‘……무거워.’

노을은 처음으로 족장의 자리가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적이 만만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하지만 아군의 전력을 상회하는 적과 싸우니 우두머리의 책임이 막중해진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옹개에게 얻어맞는 순간, 속이 진탕됐다.

피가 울컥 올라오고,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처럼 흔들렸다.

팔이 부러졌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멀쩡한 척했고, 태연하게 부러진 뼈를 맞췄다.

왜냐고 묻는다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자신은 족장이니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우두머리는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니까!

‘이런 자리를 이십 년 가까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버님.’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너른 하늘을 다른 호칭으로 불러야 할 때가 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아버님.’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매서운 눈이나 우둔한 땅에게처럼 ‘아저씨.’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이상하게 그러기 싫었다.

아버님이란 말을 듣자, 너른 하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푸근하게 웃으며 얼굴이 벌게진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맙구나. 노을아.’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막중한 자리를 맡은 것.

자신의 아들을 좋아해준 것.

스스럼없이 ‘아버님.’이라 불러준 것.

그때의 따스한 눈빛이 생생하다.

‘맞아. 난 아버님께 말했어.’

손을 맞잡았을 때, 자신은 말했다.

당신보다 뛰어난 족장이 되겠다고.

아버님이 와족 역사상 최고의 족장이라 불릴 수 있었던 건, 그전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란 말이 나오게 만들 거라고.

패기 넘치는 말에, 너른 하늘은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며 흡족하게 웃었다.

‘정신 차려! 큰소리 탕탕 치고선 겨우 이따위 놈에게 고전할 거야?’

포기할 수 없다.

전쟁의 승리와 일대일 승부.

어느 쪽도 놓지 않을 거다.

이 정도 난관에 굴해선 아버님을 볼 낯이 없으니까.

식구들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하니까!

‘둘 다 할 수 있어! 야수 제어를 유지하면서 반격을…… 어?’

이를 악물며 자연기를 끌어 올릴 때였다.

노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 많은 생각을 했고, 옹개는 벌써 당도했어야 정상이다.

한데…….

‘뭐야? 왜 이렇게 느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죽일 기세로 달려든 놈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쩍 벌린 입과 기다란 송곳니.

검은 기운이 이글거리는 주먹.

옹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움직인다는 것도 알 수 없을 만큼 느릿느릿 다가왔다.

‘뭐야? 이 판국에 장난해?’

노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서서히 얼굴을 폈다.

‘아…!’

마른 비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면, 노을은 이성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눈을 돌리니 전장 전체가 멈춰 있었다.

양 발톱으로 적을 낚아챈 칼바람이 그림처럼 정지한 걸 보는 건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건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계를 넘는 때가 올 게야. 당황하지 마라. 노을이 너라면 훌륭히 적응할 테니까.’

그믐 할아범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노을은 자신이 초일류 전사들만이 경험한다는 ‘느린 시간의 영역’에 접어들었다는 걸 자각했다.

‘부단한 수련. 사선을 넘나든 경험. 절정에 이른 육체. 확장된 감각. 그리고 자연기.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뇌가 깨어난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 바로 상단전이며, 그건 하나의 우주나 다름없다.

뇌가 깨어나는 순간,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찰나의 시간도 놓치지 않는 절대적인 지각.

하단전만 죽어라 파는 무인들은 평생 가도 도달하지 못할 영역이었다.

‘비아야. 너도 이걸 경험했지?’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느껴졌다.

마른 비도 이 영역에 도달했을 거라는 게.

자신과 달리 누구의 조언도 없이, 그저 본능과 전투 경험만으로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걸 알면 기겁했겠지만.

‘옹개라고 했지? 너도 참 더럽게 운이 없구나.’

노을의 눈이 옹개에게 향했다.

짐승의 본능일까?

놈은 무언가 이변이 벌어진 걸 감지한 듯했다.

살기를 담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필 이때 나랑 싸우다니. 아니, 이놈 덕분에 깨우친 건가?’

노을이 몸을 옥죄는 압력을 헤치며 나아갔다.

옹개는 그 와중에도 노을로 하여금 욕을 뱉게 만들었으니, 하늘로 우뚝 세운 양물 때문이었다.

‘더러운 새끼. 다시는 못 쓰게 만들어 주겠어.’

몸의 중심을 타고 오르는 다섯 줄기 연격.

노을이 발을 뻗을 때,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휘아아아악―!

바람이 쏠리듯 압축되고,

빠아악!

음속을 넘은 움직임은 다섯 번의 타격음을 단 한 번의 음향으로 포개버렸다.

“커헝…!”

옹개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그의 사타구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졌다.

가라앉을 줄 모르던 양물이 언제 그랬냐는 듯 축 늘어졌고, 하의가 붉고 노랗게 젖어 있었다.

‘끝났어…!’

발끝에 확실한 느낌이 왔다.

중선오격이 옹개의 치명적인 급소들을 부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달려들던 놈이 갑자기 튕겨 나갔어…!”

노을을 돕기 위해 달려오던 산과 안개걸음이 멈췄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저 멀리 나가떨어진 옹개와 노을을 번갈아 봤다.

둘의 안력으로도 노을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후우… 엄청 지치네.’

예상은 했지만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노을은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내가 이긴 거지. 나야 나! 설마 날 못 믿은 건 아니지?”

노을의 미소는 싱그러웠다.

그리고 여유가 넘쳤다.

그 모습은 와족에겐 힘을, 백수교에겐 절망을 안겨줬다.

“오오오! 족장이 이겼다! 역시 최고야!”

“와, 웃는 거 봐! 미치겠네…! 족장! 나랑 결혼합시다! 삼시세끼 신선한 멧돼지를 잡아다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백수교가 뿜어내는 술력이 약해졌다.

인성은 개차반이어도 힘만큼은 최고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좌호법.

그가 패하자 수령사들의 평정이 깨진 것이다.

‘지금이야!’

노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남은 힘을 전부 야수 제어에 때려 부었다.

『뭘 우물쭈물 대고 있어? 정신 차리랬잖아. 내 말 안 들을 거야?』

두쿵!

백중세를 이루던 힘이 기울었다.

푸른 자연기가 백수교의 검은 기운을 집어삼켰고, 수령사들이 입과 코에서 피를 뿜으며 무너졌다.

제자리에서 갈팡질팡하던 야수들이 일제히 돌아서는 순간, 황보숭은 패배를 예감했다.

‘안 돼…! 교 전체의 삼 할이 넘는 병력을 끌고 와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에게 패하다니!’

문책은 둘째치고 당장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완전히 세뇌한 수호수를 제외하면 아군으로 끌어들였던 짐승이 전부 자신들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린 운남의 야수들은 그간의 분노를 토해내듯 괴성을 지르며 백수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수투사여! 예비 수주(獸主)를 안으시오! 당장 몸을 빼야만 하오!”

백수교의 정예로 둘러싸인 방진.

황보숭이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그는 수투사에게 옥예린을 안게 하고, 퇴각을 준비했다.

허나 전쟁의 시작부터 황보숭을 노린 자가 있었으니, 방진 한복판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헛…?!”

황보숭이 경악하며 몸을 틀었다.

그러곤 동시에 환술을 펼쳤다.

허나 이미 날카로운 수격이 그의 복부를 헤집은 뒤였다.

“커헉…!”

“웨, 웬 놈이냐?!”

“어디서 갑자기…!”

“수, 수령사시여…!”

백수교의 진형이 난리가 났다.

황보숭에게 암격을 먹인 사내는 곧바로 몸을 빼서 와족 진형으로 유유히 돌아왔다.

검은 옷의 사내.

수리의 눈을 이끄는 새벽 어스름이 중얼댔다.

“칫.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웬 뱀이 눈앞에….”

여규를 곤혹스럽게 했던 비술.

황보숭의 구명줄인 그것이 이번에도 그의 목숨을 살렸다.

새벽 어스름이 작지만 힘 있는 어조로 명령했다.

“힘과 술법. 가장 귀찮은 두 놈이 쓰러졌다. 검은 수리들이여. 수투사라는 덩치들을 집중적으로 요격하라.”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하지만 최후의 발악이 있었으니, 황보숭이 구멍 난 배를 움켜쥔 채 비수를 꺼내 들었다.

“고, 공격을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오면 이년을 죽여 버리겠다!”

“……?”

와족의 전사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황보숭이 인질로 내민 건 옥예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령사들의 집중 치료를 받는 한편, 그녀의 목에 비수를 겨누었다.

“……너 뭐 하냐? 그 여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 때문에 우리가 멈추겠어?”

산이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황보숭이 칼을 더욱 가깝게 대며 외쳤다.

“네, 네놈들이 뭘 모르나 본데, 이년은 수왕이 구하려고 했던 여자다! 아마 그와 밀접한 관계가…!”

산이 눈을 크게 뜨더니 노을을 돌아봤다.

그러곤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죽을 판에,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구나, 아주.”

황보숭이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당황할 때, 낮게 가라앉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밀·접·한·관·계라고? 비아 이 자식……. 저 위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노을은 그 어느 때보다 언짢아 보였다.

황보숭이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노을은 눈을 사납게 떴다가 표정을 풀더니 조용히 말했다.

“무고한 사람이니 가급적 살리고 싶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야. 마음대로 해. 대신 너희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그녀가 돌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 때였다.

백수교 진영의 뒤편, 수투사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그럼 이건 어떠냐! 이 짐승이 다친 걸 보고 화를 냈었지? 이걸 죽여도 같은 말을 할 것인가!”

“……!”

이번엔 반응이 달랐다.

와족 전체가 술렁인 것이다.

특히 노을과 흰 수리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수투사의 손아귀에 붙잡힌 건 하얀 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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