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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77화 (377/463)

377화

“왜 벙어리가 됐지? 다시 말해봐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또 잘난 척 떠들어 보란 말이다!”

수투사가 하얀 깃의 목을 틀어쥐며 외쳤다.

그는 노을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이게 약점이었구나!’라는 듯한 미소였다.

“오, 옳거니! 잘했소! 정말 잘했소이다! 수투사여!”

황보숭의 얼굴에도 미소가 활짝 피었다.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날 구멍이 생긴 것이다.

그가 노을을 돌아보며 외쳤다.

“계집아! 당장 병력을 물려라! 짐승들이 공격을 멈추게 해! 그렇지 않으면 저 새는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괴상한 말이었다.

새를 볼모로 협박을 하는 자들과, 그로 인해 동요하는 자들.

하지만 하얀 깃이 운남의 야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거나, 그 위용을 직접 목격한 자라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인질, 아니, 수질극(獸質劇)이었다.

〔내 꼴이 말이 아니구나.〕

“……!”

노을에게만 전해진 의지였다.

피투성이가 된 하얀 깃이 노을을 바라봤다.

〔한 번의 방심이 이런 사태를 불러올 줄이야. 그대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다니……. 부끄럽구나.〕

노을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놈들은 운남의 짐승을 지배하기 위해 작심하고 온 거야.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어.』

하얀 깃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어찌 됐든 폐를 끼친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이상은 내 자존심이 용납지 못해.〕

하얀 깃은 설산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 말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당장 공격 명령을 내리도록.〕

『하, 하지만…!』

하얀 깃의 말이 맞다.

망설여선 안 되며, 판단이 늦어져도 안 된다.

전투화장의 시간이 다해가기 때문이다.

적들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놓친다면 추격이 불가능하다.

설산에 오른 와족의 인원 중 전투화장을 발동하지 않은 건 새벽 어스름 한 명뿐.

황보숭을 암습하기 위해 적진에 숨어든 그를 제외하면, 자신과 산, 안개걸음까지 전부 전투화장의 힘을 빌린 상태였다.

〔너희의 그 힘. 시간제한이 있는 걸로 안다. 그 안에 이놈들을 전멸시키거나 쫓아내지 못하면 너희가 위험해져.〕

하얀 깃은 전투화장까지 알고 있었다.

노을이 상황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 때였다.

‘……어?’

세상 만물이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마치 ‘느린 시간의 영역’에 접어든 것 같은 감각.

노을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쓸 때, 영수의 의지가 대량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쩌면 이것이 그대에게 전하는 마지막 당부가 되겠구나.〕

『이, 이것…! 뇌력의 작용인가? 하얀 깃, 네가 한 거야?』

노을이 언령으로 물었지만, 하얀 깃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예 의지 자체가 전달되지 않는 느낌.

짧은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뜻을 전하는 방법인 듯했다.

〔인간의 아이야. 그대는 설산의 선택을 받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숙명을 훌륭히 감당하고 있다. 자, 고개를 들어라.〕

눈을 들자, 봉우리를 가득 메운 야수들이 보였다.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식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설산의 풍경까지도.

〔그대가 지켜야 할 것들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지.〕

이 순간, 하얀 깃은 마치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현자 같았다.

〔일개 종(種)의 힘이 마침내 대자연을 능가해버렸다. 인간은 지금껏 존재한 적 없던 욕망의 생물이야……. 너희로 인해 천지에 충만했던 기운이 서서히 쇠락할 것이다. 허나 아이야, 잊지 말거라.〕

‘무엇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이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마치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영수의 유언처럼 들렸다.

〔시대의 전환점. 이들은 비틀린 틈새에서 흘러나온 고름과 같다. 세상은 이와 같은 자들 때문에 신음하고, 혼돈을 겪게 될 것이야.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 또한 인간뿐이다.〕

‘그게… 나란 말이야?’

하얀 깃은 노을의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말했다.

〔힘을 모아라. 그대와 같은 자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대는 ‘보듬는 자’다. ‘아우르는 자’가 그대와 함께하리니.〕

‘아우르는 자…? 비아를 말하는 건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하얀 깃이 언급한 게 마른 비일 거라는 게.

〔대자연의 쇠락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경과를 늦추고 혼란을 줄이는 건 가능할 터.〕

마지막으로 전해진 의지에는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

〔시련이 닥치겠지만,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무너지려는 마음을 부여잡고, 진창을 구르고 굴러서라도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라.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식구들은 거대한 운명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될지니.〕

‘운명? 축이라니?’

그 부분은 노을로서도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랜 세월, 세상의 변화를 느끼고 자연의 이치에 귀 기울인 존재에게만 보이는 무언가였으니까.

천기자 감택이 하얀 깃과 인연이 닿았다면 밤새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리라.

〔지금 그대가 지닌 순수성을 잃지 말거라. 판단을 내렸다면 망설이지 마라. 그리고 만에 하나 저들이 날….〕

‘너를 뭐?’

거기까지였다.

눈을 깜빡이자, 꿈결처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얀 깃의 목을 움켜쥔 수투사와,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와족의 전사들.

하얀 깃의 눈길이 옥예린을 스쳤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그때, 결단을 바라는 안개걸음의 언령이 들렸다.

『족장님. 하얀 깃을 각별히 여기는 마음은 압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전투화장……. 아시죠?』

산의 언령이 뒤를 이었다.

『격전을 치른 데다 광역 야수 제어까지……. 움직일 힘도 없는 거 압니다. 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무리하지 마십쇼.』

두 사람이 좌우를 맡았다면, 새벽 어스름은 중앙에서 노을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족장님. 결단을.』

노을이 고개를 들어 하얀 깃을 바라봤다.

영수는 상징과도 같은 백색 깃털을 피로 물들인 채 눈으로 말했다.

머뭇거리지 말라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네 말, 절대 잊지 않겠어.”

노을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영수의 모습을 두 눈에 새겼다.

그리고 명령했다.

“와족, 돌격하라. 지저분한 것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마. 저들의 시체는 꽁꽁 얼어붙어 영원히 녹지 않을 것이다. 운남을 넘본 놈들의 말로가 어떤지 똑똑히 알려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함.

백수교도들의 얼굴이 새카맣게 죽었다.

“자, 잠깐…! 이 새가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냐? 이대로 목을 비틀어도…!”

노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죽여. 너희도 모두 죽을 테니까.”

그게 신호였다.

산의 우렁찬 외침이 와족 전사단과 야수들을 움직였다.

“족장님의 명이 떨어졌다! 전부 쓸어버려!”

그건 설산에 밀어닥친 해일과 같았다.

백수교의 병력도 적지 않았으나, 운남의 야수들이 합세한 와족을 당할 순 없었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돌격.

백수교의 수호수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수인과 청기에 이어 수투사까지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황보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후, 후퇴하라! 수투사들이여! 예비 수주를 데리고 피신할 수 있게 놈들을 막아주시오!”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죽으라는 명이었다.

광신도의 용기일까?

백수교도들은 한 명도 이탈하는 자 없이 고기 방패가 되어 와족을 막았다.

황보숭이 주위에 있는 수투사에게 외쳤다.

“흰 수리…! 다른 짐승은 몰라도 저건 꼭 데려가야 하오! 옮기는 걸 도와주시오!”

보는 순간 깨달았다.

온 세상을 뒤져도 저런 소체는 또 없을 거라는걸.

수신께서 받아들일지, 예비 수주에게 하사될지는 모른다.

자신은 거기까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저 저걸 데려가면 차기 대수령사에 한없이 가까워질 거란 걸 확신할 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버리면 돼! 어차피 내가 나르는 게 아니니까.’

수투사들도 상황을 짐작했는지 하얀 깃에게 달려갔다.

수신을 향한 신심이 깃든 얼굴.

그들은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어떻게든 하얀 깃을 총단으로 운반할 터였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세 방향에서 적들이 밀어닥치지만, 뒤는 뚫려 있다.

문제는 야만인들을 저지할 수 있느냐는 점.

수호수에 오른 황보숭이 필사의 도주를 준비할 때였다.

‘쓰러지면 안 돼. 버텨.’

노을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꼿꼿이 서서 전장을 주시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어깨 너머로 더러운 악취가 밀려왔다.

이 냄새, 그리고 그림자의 크기…!

“어떻게?!”

노을이 몸을 돌리며 남은 힘을 끌어모아 주먹을 날렸다.

빠가각―!

깔끔하게 들어갔다.

부릅뜬 눈동자에 무방비로 턱을 얻어맞은 옹개가 비쳤다.

“그어….”

절대 일어설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중선오격이 신체의 치명적인 급소를 깨부쉈고, 그건 팔다리가 부러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타격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급소가 박살 난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으니까.

‘술법을 받지도 못했어! 어떻게 일어선 거지?!’

옹개를 내버려둔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쓰러졌을 때, 백수교에서 치유의 술을 구사할 줄 아는 자들은 전부 야수 제어를 밀어내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당장 치료를 받아도 위험한데, 전장의 상황에 밀려 방치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라신선이 와도 절대 살릴 수 없었다.

‘그건 둘째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노을은 옹개의 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의식이… 없어?’

본능.

적을 쓰러뜨리고 말겠다는 동물적 본능.

그것이 옹개를 움직였다.

의식이 날아갔으니 살의가 없으며, 살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의 눈이 전장에 쏠린 사이, 옹개는 의식이 날아간 채 비척비척 걸어와서 노을에게 접근해 있었다.

와락.

“……?!”

그건 공격도 뭣도 아니었다.

옹개는 노을을 그냥 끌어안았다.

“……놔! 놔, 이 더러운 새끼야!”

우둔한 땅에 비견할 육체.

의식이 날아가고 급소가 박살 났을 뿐, 옹개는 노을과 달리 기운을 소진하지 않았다.

팔이 붙잡힌 노을은 무릎으로 옹개의 옆구리를 찍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질질질질―

초점이 풀린 눈.

옹개는 노을을 끌어안은 채 휘청대며 앞으로 걸어갔다.

“으, 으윽…!”

짐승의 본능이 표적을 잡았다는 걸 깨달은 걸까?

아니면 육신에 가해지는 공격에 반응한 걸까?

옹개의 팔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나아가는 걸음도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아, 아니?!”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새벽 어스름이었다.

그는 노을 대신 중앙을 맡아 싸우면서도 간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했다.

그리고 노을이 붙잡힌 걸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전장을 이탈했다.

“족장님…!”

그 날카로운 외침에 와족 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저, 저놈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었다고?!”

“뭣들 해! 후방의 인원은 족장께 달려가라! 저놈을 당장 떼어 내!”

몸을 난자할 듯한 살기가 옹개에게 집중된 순간이었다.

“……!”

원숭이 괴인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렀다.

“그어어, 그으…!”

천천히 전진하던 옹개가 갑자기 뛰쳐나갔다.

그건 무언가에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는데, 어마어마한 살기가 집중되자 몸이 반응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놈은 그 와중에도 노을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곧 발이 엉켜서 엎어졌고, 둘은 포개진 채 넘어져 버렸다.

으지직, 으직―.

‘맙소사! 균열…?!’

설산 곳곳에 도사린 천연의 함정.

성년식 시절, 칼바람과 싸우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던 죽음의 낭떠러지다.

오늘의 전투에서도 상당수의 짐승들이 이걸 알아채지 못하고 추락하지 않았던가.

‘비, 빈 공간이 아냐! 얼었어…!’

천만다행인 건 뻥 뚫린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얇게 얼어붙은 바닥이 둘을 지탱하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무게 때문에 가라앉겠지만, 그전에 아군이 구하러 올 터.

“하아……. 이 징글징글한 놈!”

처음 봤을 때부터 뒈지기 전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이다.

노을은 끌어안는 힘이 서서히 약해진다는 걸 느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악몽이 시작됐다.

후아아악―!

상공에 응집되는 검은 기운…!

허공을 격하고 원거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술력의 힘이었다.

“좌호법이시여! 절 용서하소서!”

황보숭의 외침이 터지고,

투쾅―!

묵직한 충격이 옹개의 몸을 내리찍었다.

노을을 없애고 와족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수였다.

말과 달리 황보숭의 입가가 말려 올라간 건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쩌저저적― 쩌적!

‘아…!’

깨져버린 빙판.

노을이 무저갱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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