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 * *
「……그렇게 된 겁니다.」
백의서원을 나오면 접어드는 대로.
마른 비는 뻥 뚫린 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멈췄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노을이가… 죽었다고?’
눈앞이 새카맣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기다린다고 했어….’
노을이는 청죽림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큰 사내가 되어 돌아오라고 했다.
자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을 뿐.
‘왜 그랬지…?’
중원으로 나갈 생각에 들떴던 거다.
신이 나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아버지와 노을이보다,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관심을 쏟았다.
‘이… 멍청이!’
마른 비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목이 매여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무거운 납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숨을 쉬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끅, 끄윽….”
왜… 대체 왜 그런 걸까.
건강해라, 꼭 돌아오겠다, 보고 싶을 거다….
눈을 마주치며 따뜻한 말 몇 마디 건네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서두른 걸까.
처음 본 사람에게는 낯부끄러운 말을 잘만 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전쟁에까지 뛰어들었으면서, 정작 식구들에게는 왜 그리 소홀했던 걸까…….
“흑, 흐흑…!”
달려오는 내내 꾹 눌러왔던 감정이 터졌다.
추스를 길 없는 불안과 걱정, 그만큼의 그리움….
수왕이라 칭송받지만, 아직 스무 살 초반의 청년일 뿐이다.
노을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마른 비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이 감정은 뭐야…….’
마른 비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간 불쑥불쑥 치솟던 노을이에 대한 그리움.
그게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노을이가…… 보고 싶어.’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다.
「대, 대협? 괜찮으십니까?」
응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어조에선 염려가 묻어났지만, 마른 비는 그걸 느낄 정신이 없었다.
“누구야?”
「네?」
“노을이를 죽……. 다치게 한 놈들.”
차마 죽었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다신 노을이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보, 보고에 따르면 짐승 흉내를 내며 야수를 몰고 다니는 놈들이….」
응삼이 대꾸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수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색깔.
하늘을 닮은 푸른 눈빛이 붉게 변한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저, 저게 대체…?!’
회한, 좌절, 증오, 그리고 분노…!
임계점을 넘어선 살의가 자연기를 변질시킨다.
응삼은 몰랐지만, 지금 마른 비의 눈빛은 광기에 사로잡혀 운남을 어지럽혔던 괴후의 눈을 닮아 있었다.
그건 기나긴 와족의 역사에서도 매우 드물게 나타난 현상이었으니…….
자연기의 또 다른 특질이자 유일한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백수교……. 그놈들이었어. 그놈들이 노을이를….”
‘수, 숨이…!’
질식할 듯한 살기.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숨이 막힌다.
분노와 살의가 깃든 자연기가 야수 제어와 버무려지니, 마른 비 주변의 생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컥컥댔다.
“대, 대협! 정신 차리십시오…! 마, 마음을 다스리십…! 크, 커헉…!”
응삼은 은신 중이라는 것도 잊고 육성으로 외쳤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몸을 짓누르는 압력은 점점 가중되기만 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중원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백수교와 마주칠 일도 없었고…. 놈들은 운남에 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 노을이도….”
마른 비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댔다.
동공이 풀렸고,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푸르게 빛나야 할 눈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그때, 화음 시가지를 날려버릴 듯한 포효가 터졌다.
“커허허허헝!”
별비가 은신을 풀고 나오며 맹렬히 울부짖었다.
그러곤 마른 비에게 외쳤다.
〔비아, 이 멍청한 놈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식구들에게 간다더니 정신줄 놓고 여기서 주저앉을 거냐?!〕
별비는 의지를 전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자연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다음, 마른 비에게 전이한 것이다.
〔칼이빨을 쓰러뜨리기 위해 단련할 때, 나한테 말했잖아! 부정적인 감정에 먹히지 말라고! 그래 놓고 네가 이러기냐?!〕
“……!”
뇌리를 파고드는 의지.
초점을 잃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푸른 자연기가 붉은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칼이빨? 별비? ……맞아. 그랬지. 내가 그랬어…….”
마음을 잠식하는 분노를 걷어내, 전투를 위한 기예로 승화시킨다.
그렇게 만들어낸 기술이 육체를 강화하는 범의 앙심이었다.
“……큰일 날 뻔했구나. 고마워, 별비야. 덕분에 정신이 들었어.”
사위를 뒤덮은 압력이 걷혔다.
괴로워하던 생물들이 주저앉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 은신에 돌입하며, 응삼이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새로운 사실이다. 극한의 상황에 다다랐을 때, 수왕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 후개 님께 보고해야 해!’
지금은 우호적이지만, 무림에서의 관계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정파 내부에서도 적대적인 세력들이 존재하는데, 개방이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마른 비를 영원한 친구라 여길 리 만무했다.
응삼이 골목 한구석에 개방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길 때, 마른 비가 말했다.
“설산의 균열 속으로 추락했다고 했어. 거긴 한 번 떨어지면 살아나올 수 없지만……. 노을이는 강해. 그리고 식구들이 같이 있을 거야.”
아직 노을이의 숨이 끊긴 건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의 힘과 생존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마른 비였으며, 그녀를 가장 믿는 것 또한 그였다.
“나라면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나올 거야. 내가 할 수 있다면 노을이도 할 수 있어.”
별비가 안도의 숨을 쉬며 말했다.
〔이 멍청이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그래, 그거다.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가는 거야.〕
마른 비가 이를 으드득 소리 나게 깨물었다.
“백수교……. 그리고 공지량. 절대 가만두지 않아. 시간을 너무 지체했네. 서두르자, 별비야.”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건 길을 서두르는 것뿐이다.
마른 비와 별비가 달려 나간 자리, 대로 주변의 골목 사이사이에서 전음이 오갔다.
「겨우 따라붙었군! 방금 전의 살기가 아니었다면 또 놓칠 뻔했어!」
답변은 건너편 골목에서 들려왔다.
「후우… 멀리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더군요. 그새 또 발전한 걸까요? 북벌에서 보인 무위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수하로 보이는 사내는 이어서 말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개방이 수왕의 행보를 가려주는 건지……. 심지어 정보 공유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더군요.」
상관이 대꾸했다.
「개방만이 아니다. 그에 필적하는 조직이 하나 더 있어. 숫자는 적지만 제대로 단련된 놈들……. 그놈들의 교란 때문에 엄한 놈들과 싸우지 않았나.」
사내는 꽤나 고생을 했는지 이를 갈았다.
보이지 않을 뿐, 동월루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보다 방금 수왕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설마 그가 남하하는 이유가 점창파와 싸우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이건 특급 정보였다.
그리고 정파의 일원으로서 절대 흘려 넘길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골목에서도 전음이 오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본산으로 전서구를 띄워라! 운남에서 헤매고 있을 요원들을 전부 대리로 집중시키도록!」
「점창은 주력 검대를 전부 전쟁에 투입했다! 수왕이 점창과 싸우러 가는 거라면 빈집털이나 다름없어! 이건 엄청난 희소식이다!」
「백수교? 처음 듣는 이름이다. 신흥 종교 집단인가? 그놈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라. 당장 움직여!」
백수교의 이름이 처음으로 세간에 퍼진 순간이었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자들도 있었다.
「수왕의 남하가 정사대전에 미칠 영향을 분석해라! 지금까지의 행보로 볼 때, 어디로 튈지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이야!」
「수왕과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은 고검과 투도! 점창 장문인의 이름이 나왔지만, 그가 둘 중 어느 쪽 편을 들지는 미지수야. 현 상황에서 수왕 같은 거물이 끼면 완전히 균형이 무너진다! 그가 동쪽으로 향하진 않는지 예의주시하도록!」
고검(高劍).
여규는 정사대전을 통해 그간 쌓은 무(武)를 폭발시켰고, 드높은 기상으로 고검이란 별호를 얻는 데 이르렀다.
외로운 검(孤劍)이라 불린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무명(武名).
마른 비가 들었다면 기뻐할 일이었다.
「섬서에 접어든 이상 하북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 보이는군. 수왕은 오스트갈 쪽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이번 목소리에선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마른 비가 발길을 돌려주길 바라는 어조였다.
「그러게 말이오. 북벌에서 바투, 무칼리와 싸운 전례 때문에 참전할 줄 알았거늘. 혹, 거용관을 부순 일 때문에 수왕과 황제의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닐까요?」
원인과 전후관계는 잘못되었지만 결과는 맞는,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허나 지금 마른 비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런……. 벌써 사라졌군. 몸을 드러내놓고 달려도 쫓기 힘들 판에, 이거야 원.」
「그러게 말이오. 우린 여기까지 합시다. 기회를 봐서 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구려.」
온갖 세력들이 마른 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정보의 편린이 떨어질 때마다 첩보조들이 요동쳤다.
마른 비 본인만 모를 뿐, 수왕의 남하는 그렇게 온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동쪽으로 진로를 틀 것을 대비해 호북의 경계까지 나와 병력을 배치한 세력도 있었으니…….
하지만 정작 마른 비는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죽을힘을 다해 사천으로 뛸 뿐이었다.
* * *
“히, 히익…! 살려주십시오!”
“저흰 적이 아닙니다! 수, 수왕이 고향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온…!”
너른 하늘과 와족의 전사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영묘가 파괴되고, 여울이 납치되어 영인으로 향하는 길.
울창하게 우거진 원시림 곳곳에서 난생처음 보는 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웬 놈이냐!”
당연히 적인 줄만 알았다.
처음엔 공지량이 배치한 끄나풀일 거라 믿고 가차없이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또 비슷한 놈들입니다.”
전혀 다른 자들이었다.
태반이 한족인 그들은 질 좋은 옷감으로 짠 무복을 입었는데, 가슴에 수놓인 문양이나 옷의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다.
“첩보조……. 우리로 치면 검은 수리 전사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소수부족과 짐승들의 근황에 관심을 두는 우리와 달리, 이들은 세력 다툼을 위해 이런 조직을 운용하지.”
그믐의 설명이었다.
그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왜 갑자기 이런 놈들이 운남에 쏟아져 들어온 지가 의문이었다.
답은 사로잡은 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비아 때문이군. 비아가 귀향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녀석, 무슨 일을 벌였길래 이런….”
골치 아픈 일이었다.
나아가기도 바쁜데 인간의 숨소리가 밀림 곳곳에서 감지된다.
잘 숨어서 걸리지나 않으면 모를까…….
딴에는 최선을 다해 숨은 거겠지만, 와족 수뇌부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 경계심과 적의를 드러내니 무시할 수도 없군요. 이래서는 적과 구분이 안 가니….”
너른 하늘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서 바짝 곤두서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놈들이 신경을 긁는다.
첩보조 입장에선 살기등등한 야만인들이 갑자기 나타나니 놀랄 만도 했다.
문제는 이런 걸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금세 지칠 거라는 것.
누가 공지량의 끄나풀인지 모르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을 전부 죽이며 나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매서운 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사로잡은 요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 되겠소, 형님. 전부 죽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