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전부 죽이자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너른 하늘이 아연한 표정으로 매서운 눈을 바라봤다.
그믐도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타박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을 살해하자고? 그럼 우리가 공지량과 다를 게 뭐냐?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정신 차려라. 매서운 눈.”
여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우둔한 땅도 거들었다.
“적, 부순다아. 하지만 이들, 적 아니다. 눈깔, 침착해애….”
마른 비의 이름이 나온 걸로 보아 이들 중엔 그와 가까운 관계인 자도 있을 수 있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마구잡이로 살육을 벌이는 건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와족이 지켜온 신념과 가치를 모를 리 없는데, 매서운 눈은 물러서지 않았다.
“매복이나 함정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만도 굉장한 피곤한 일이지 않습니까? 한데 엄한 놈들까지 신경 쓰느라 전사들이 빠르게 지치고 있소.”
매서운 눈은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영묘를 나선 지 십여 일. 그동안 우리가 이동한 거리를 생각해 보시오.”
“…….”
이번 말에는 다들 침묵을 지키며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은 운남 각지에 퍼진 전사들의 합류를 기다리고,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진 않았다.
그렇더라도 여태 운남의 남서부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건 확실히 느린 감이 있었다.
그 원인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한족 놈들 때문이란 건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엔 한두 무리에 지나지 않던 놈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소. 우리의 이동경로를 파악했단 뜻이겠지. 방향을 못 잡고 밀림에서 헤매던 놈들까지 전부 우리의 진격로에 몰려들지 않소이까.”
확실히 그랬다.
중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태고의 자연.
운남에 진입한 첩보조들은 끝없이 펼친 밀림 속에서 장님에 길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며,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요원이었다.
처음엔 방향도 못 잡던 자들이 지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정보를 교류하며 와족의 흔적을 더듬어갔다.
그 결과, 지금처럼 웃어넘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놈들을 살려준 결과가 어떻습니까? 저길 보십시오.”
매서운 눈이 턱짓으로 고목의 중턱을 가리켰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뚜렷이 느껴진다.
위치를 들킨 놈들의 당황하는 숨결이.
“떠나란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따라붙지 않습니까? 저놈들만이 아니란 건 말 안 해도 아실 거요.”
너른 하늘, 그믐, 우둔한 땅이 주변 지형을 훑었다.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새롭게 나타난 자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붙잡았다가 놔준 놈들이었다.
“제 딴에는 임무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겠지. 허나 저놈들은 그게 우리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소.”
매서운 눈이 눈을 사납게 뜨며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도 제 입장만 생각하는 놈들. 난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소이다. 저딴 놈들보다 여울이와 우리 식구들의 목숨이 백배는 더 귀중하니까.”
농밀한 살기가 일대를 그물처럼 뒤덮었다.
그 순간, 각 조직의 요원들이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주, 죽는다…!’
수왕을 배출한 부족.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그의 과거와 배후를 캘 절호의 기회였다.
진신전력을 드러내지 않기에 가늠하기 힘들지만, 야만인 전사들이 대단한 전력을 지녔다는 건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한참이나 웃돈다.
최소 구파의 장로급에 맞먹는 무위.
매서운 눈의 살기를 접한 자들은 와족의 권고를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매서운 눈.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놀라기엔 한참이나 일렀으니.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존재감으로 이목을 끌어당기던 남자.
너른 하늘이 자연기를 개방한 순간, 첩보조들은 은신 중이라는 것도 잊고 신음을 터뜨렸다.
“흡…!”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원나라 시절부터 물밑에서 암약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요원들이다.
난다 긴다 하는 무인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단언컨대 이토록 압도적인 자는 없었다.
“우리가 궁금한 거겠지? 그래서 이토록 집요하게 따라붙는 것일 터.”
끝이 아니었다.
너른 하늘은 여전히 힘이 남아돌았고, 그가 자연기를 끌어올리자 공간이 일그러졌다.
퍼석! 퍼서석! 퍼퍽―!
압력을 이기지 못한 나뭇잎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요원들은 악착같이 은신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크악…!”
“으으… 우어어…!”
쿵! 쿠쿵! 후드득―!
나무 위에 숨었던 자들이 추락하고, 풀숲에 잠복했던 자들이 땅에 엎어졌다.
기세만으로 공간을 짓이기는 무력은 그들로서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경지였으니…….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변방의 오지에 이런 괴물이?!’
‘수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맙소사…! 누가 와도 안 돼! 최소 십좌의 두 명은 달라붙어야 승산이…!’
경악과 두려움, 그리고 경외.
너른 하늘은 힘을 개방하는 것만으로 첩보조를 압도해 버렸다.
그들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너른 하늘이 말했다.
“비아와는 무슨 관계인가?”
절대자의 질문에, 요원들은 머리가 하얘져서 필사적으로 답변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른 하늘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질문이 잘못됐군. 순순히 대꾸할 리 없겠어.”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술을 뗐다.
“비아……. 그대들이 수왕이라 부르는 아이가 내 아들일세.”
“……!”
그래. 그래야 말이 된다.
이런 괴물을 아비로 두었으니 그 나이에 그토록 강할 수 있는 거다.
너른 하늘의 말을 듣는 순간, 요원들은 마른 비가 강한 이유를 단번에 납득해 버렸다.
“궁금증이 풀렸나? 또 물어볼 게 있으면 지금 말하게.”
“…….”
묻고 싶은 게 있냐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밤새도록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너른 하늘에게 완전히 주눅이 들었고, 본능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좋아. 내가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딱 하나일세.”
“……?”
“쓸데없이 피를 보기 싫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원의 첩보조 수십 명은 눈알만 굴릴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움직임만 봐도 자네들이 출중하다는 걸 알겠네. 내 말, 충분히 이해했을 거야.”
너른 하늘은 그들을 넓게 훑은 뒤에 말했다.
“명심하게. 이게 마지막 경고라는걸.”
또 얼쩡거리다간 죽는다.
앞을 막아도 죽으며, 훼방을 놓아도 죽는다.
앞으로 다가올 자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알아서 차단해야 하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죽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법 대찬 자도 있었다.
너른 하늘의 존재감을 이겨내며 손을 든 자는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개방이군. 저들은 운남에는 없는……. 음… 뭐랄까. 구걸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지.”
“……?”
거지란 와족 전사들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
그믐이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파를 대표하는 정보 집단이야. 개방의 구성원은 십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지. 진짜인지, 과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십만이라고요?”
그 또한 와족에게는 와 닿지 않는 숫자였다.
후개의 명을 받고 와족을 탐색하러 온 걸개는 웬 노인이 개방을 알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네. 개방의 종혁입니다. 지금 저희가 아드님의 남하를 돕고 있죠. 대협… 아니, 족장님께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단 뜻입니다.”
종혁은 일부러 족장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믐의 당부로 점창은 사 년 전의 전쟁과 와족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개방조차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떠보기 위한 수작이었으나 너른 하늘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맞구나! 이자가 족장이다!’
종혁이 착각할 때, 너른 하늘이 물었다.
“그래서 궁금한 게 무엇인가?”
종혁은 여기서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아까 대화를 나누실 때 공지량이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 족장께서 서두르시는 것이 혹 점창파와 싸우기 위함인지요?”
좌중이 술렁였다.
수왕이 남하하는 이유.
그의 식구들이 살기를 뿜으며 북진하는 원인.
종혁의 질문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며, 그들이 운남에 파견된 까닭이기도 했다.
“…….”
너른 하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들을 숨기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맞네. 공지량, 그자가 우리의 선조들을 모신 묘를 부수고, 부족의 아이를 납치했지.”
“점창파가?!”
“그, 그럴 리가……. 어찌 구파의 하나가 그런 짓을?”
너른 하늘은 좌중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오해가 없길 바라네. 점창파의 문제가 아니야. 공지량, 그자의 개인적인 만행일세. 사 년 전, 점창과 우리가 전쟁을 벌였던 것도 그자 때문이었지.”
꼭꼭 숨겨둔 비사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와족과 점창만이 간직했던 진실이 드러나자, 첩보조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믿기 힘들겠지. 허나 사실일세.”
너른 하늘은 공지량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간추려 말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요원들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진영을 막론하고, 누가 들어도 천인공노할 짓거리였기 때문이다.
‘수왕도 그랬지만, 이 남자도 거짓을 말할 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잘한 궁금증은 남아 있지만, 그건 직접 알아보면 될 터.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어느 쪽이 이긴 거냐?!’
그리고 요원들은 와족 전사들의 표정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맙소사…!’
‘운남 오지의 원시부족이 구파의 하나를 일대일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알려진다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특급 정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너른 하늘이 시간을 할애하며 이야기를 하는 의도는 명백했다.
“당장 처 죽여도 모자랄 놈이…! 구파일방의 일원으로서 희생된 분들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종혁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족장님.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협력을 다하겠습니다.”
장애물이었던 자들이 아군으로 변모했다.
와족은 물론이고, 일을 꾸민 공지량까지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너른 하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허나 이건 우리의 일이야. 그리고 우린 난관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다네. 그럼 이제 비켜주겠나?”
첩보조들이 분분히 물러났다.
이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퍼지면, 와족은 명분을 갖추게 되리라.
무엇보다 사정을 모르는 세력이 끼어들 여지를 없앨 수 있으며, 공지량을 궁지로 몰 수 있었다.
“가자.”
중원의 첩보조를 떨구고 나아가는 길.
너른 하늘이 매서운 눈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했다.”
그믐도 의외였다는 듯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아주 제법이었다, 눈깔. 처음엔 나도 속았지 뭐냐. 감정만 앞서는 멍청이인 줄 알았거늘……. 인간은 확실히 성장이란 걸 하는구나.”
매서운 눈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솔직히 말하면 열 받아서 다 엎어버릴까 하다가 떠오른 거요. 형님이 눈치채고 잘 받으신 거지.”
“……?”
우둔한 땅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주. 총타에 보낼 서신을 작성해라.”
와족 전사들이 떠난 자리.
종혁이 같이 온 개방도에게 말했다.
“예. 부분타주.”
기주라 불린 걸개가 손바닥만 한 종이에 암호문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종혁은 그걸 보며 너른 하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기가 막힌 일이야. 그따위 놈이 구파의 장문인이랍시고….”
종혁이 중얼거리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잎이 우거진 숲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방금 뭔가 인기척이….”
푸욱―!
갑자기 배를 뚫고 나온 검.
종혁이 눈을 부릅뜨며 뒤를 돌아봤다.
“큭…! 이, 이게?! 어떤 놈이…?”
서신을 작성하던 기주는 어느새 목이 잘려 있었다.
종혁을 뒤에서 찌른 자가 조용히 웃었다.
“역시 개방다워. 감이 좋군. 그 덕분에 쉬워졌어.”
종혁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숲 쪽에서 미끼 역할을 했던 자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너,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