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종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암습자의 가슴에 수놓인 부채 문양.
그건 철선문(鐵扇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철선문은 감숙성 서북부에 뿌리내린 정도의 문파이며, 특수 제작한 철 부채를 무기로 사용하는 걸로 유명하다.
신강과 인접한 탓에 마교가 중원으로 넘어올 때마다 휩쓸렸음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문파이기도 했다.
“처, 철선문이 왜 우리를?”
정도맹에 속하지 않을 뿐, 철선문은 엄연한 정파 소속이 아닌가.
철선문주가 총타 인근에 올 일이 생기면 꼭 용두방주를 방문할 만큼 두 집단은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이 얼굴… 아까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이야!’
너른 하늘의 위압에 밀려 모습을 드러낸 첩보조들.
종혁은 거기서 이들을 본 걸 기억해냈다.
“왜, 왜 우릴 공격한 것이냐?”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종혁은 아군에게 암습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복부가 뚫린 통증도 잊었다.
“자, 잠깐만…! 철선문이 검을 쓴다고?”
이상한 점을 알아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자신을 찌른 자도, 미끼 역할을 한 자도 부채가 아닌 검을 들고 있었으니까.
“쿨럭…! 네놈들, 철선문도가 아니구나! 그, 그들을 어떻게 한 것이냐!”
종혁이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괴로워할 때, 그를 찌른 자가 웃었다.
“영리하기로 유명한 필절(畢節)의 부분타주께서 영 감을 못 잡으시는군. 뻔한 걸 왜 묻는가?”
“……!”
확실하다.
이놈들이 철선문의 제자들을 살해하고 옷을 빼앗은 것이리라.
종혁이 놀란 건 다른 점 때문이었다.
‘어떻게 나를 아는 거지?’
자신은 귀주 끄트머리에 있는 필절에서나 이름이 알려졌을 뿐이다.
운남과 귀주 일대의 정파 첩보조와 교류를 한 걸 제외하면 전면에 나선 적이 없는데 어떻게….
‘가만…!’
정파 요원들과의 교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종혁이 눈을 부릅떴다.
“네, 네놈들…! 설마 점창의…?!”
등을 찌른 사내가 씨익 웃었다.
“정답이야.”
부아아악―!
검이 그어지고, 복부가 갈린 종혁이 풀썩 엎어졌다.
철선문의 첩보조로 위장했던 사내.
종혁의 눈동자에 비친 건 점창파 응목대주 몽념의 얼굴이었다.
“와족… 족장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어쩌다가… 점창이 이렇게까지…. 너, 너희들이 이런 짓을 하고도….”
푸우욱.
몽념은 종혁의 말이 끝나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헐떡대는 종혁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조직의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경우가 있긴 하던가?”
몽념의 눈은 확신과 신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정파든 사파든 마교든. 결국은 약육강식이다. 힘을 키우고 덩치를 불리려면 다른 놈을 잡아먹어야 하는 거야.”
종혁의 원통한 눈동자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듯했다.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고.
그걸 지키는 것이 바로 정파라고.
하지만 죽어가는 자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몽념이 종혁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어서 죽음을 자초하느냔 말이다. 너희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잖아.”
몽념은 검에 묻은 피를 종혁의 옷에 닦았다.
“아까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은 총 육십칠 명…….”
이제 육십오 명이다.
몽념이 골치가 아픈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와족 놈들을 감시하는 것도 벅찬데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중원의 첩보조가 운남에 들어오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들을 발견했을 때, 몽념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원래라면 감히 접근할 엄두도 못 냈을 와족에게 첩보조 중의 하나로 위장하여 접근한 것이다.
허나 편리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너른 하늘이 난데없이 사 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몽념은 놀란 나머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과거 우리가 벌인 일이 알려졌다. 심지어 장문인의 이름이 언급됐어.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돼. 정사를 가리지 말고 전부 죽이도록.”
미끼 역할을 했던 응목대원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대주님. 놈들은 운남의 지리에 익숙지 않습니다. 한나절이면 충분합니다.”
몽념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혁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을 느끼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후, 후개 님……. 부디 훌륭한 지도자가 되시길….’
종혁이 죽지 않았다면.
마른 비의 입에서 공지량의 이름이 나온 시기가 빨랐다면.
점창이 사 년 전의 전쟁에 대해 함구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앞으로의 일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건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긋난 현실의 시계는 째깍째깍 무심히도 흐를 뿐이었다.
마른 비가 남하하고, 너른 하늘이 북상하며, 응목대가 바삐 움직이는 이때, 영인에선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장본인이 한 남자와 독대하고 있었다.
* * *
영인의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
나무들로 빽빽이 둘러싸인 숲속에는 검은 천으로 짠 막사 수십 개가 줄지어 있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그중 가장 큰 막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녕… 이게 전부란 말이오?”
공지량이었다.
병석에서 일어난 이래, 야심 차게 일을 추진해온 그가 어쩐 일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파서라기보단 분을 참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앞에 앉은 검은 옷의 사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게 전부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장문인? 마치 우리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공지량이 탁자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렇소. 부족하지. 부족하고말고. 이 정도 전력으론 ‘놈’을 잡을 수 없소.”
흑전대 세 명의 부대주 중 하나이자 대원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총교관.
악창(惡槍) 막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족하다……. 우리를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을 한단 말이지. 솔직히… 흘려 넘길 수 없을 만큼 불쾌하군.”
막지후가 왼쪽 눈에 찬 안대를 긁었다.
공지량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에 또 한번 울컥했다.
‘이 새끼가 감히…!’
사십 후반.
자신보다는 어리지만, 같은 세대기에 잘 알고 있다.
막지후가 안대를 긁는다는 건 살심이 끓어올랐다는 뜻이며, 저러다가 창을 쥐면 다짜고짜 공격에 나선다는 사실을.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기 전, 그의 원래 버릇은 왼쪽 눈꺼풀을 긁는 것이었다.
‘결투에 패해서 왼쪽 눈을 잃었지. 멍청한 새끼. 이젠 눈이 없으니 안대를 긁는 건가.’
정확히 이십 년 전, 막지후는 창 한 자루로 청해성을 휩쓸고 다닌 사파의 고수였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가차 없이 찔러 죽여도 멀쩡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차기 십좌의 자리에 오를 거라 확실시되던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지.’
승승장구하던 막지후의 인생이 꼬인 건 황중(湟中)의 한 객잔에서 창술로 유명한 정파의 후기지수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나이가 비슷하고, 아무런 세력이 없으며, 창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둘은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고 했다.
‘악경.’
그때도 그의 별호는 ‘협검’이었다.
막지후는 악경을 보자마자 집요하게 시비를 걸었고, 악경이 받아주지 않자 무작정 창을 휘둘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사람들이 다치지 않나!’
악경은 분노하여 막지후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다.
둘은 결국 근처 야산에서 창술 대결을 펼쳤는데, 이틀에 걸친 사투 끝에 막지후는 왼쪽 눈을 잃었다.
‘한심한 놈. 창을 쓰는 놈이 검사에게 창술 대결에서 패해?’
좌창우검(左創右劍).
협검을 상징하는 호칭이다.
하지만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진신무공은 검을 쓸 때 나온다.
검사에게 창술로 패하고 도망치듯 잠적해 버린 것.
여전히 소싯적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
공지량은 막지후가 진심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데 그런 놈이 자신을 협박하듯 안대를 긁고 있으니.
‘참아라. 어떻게든 구슬려서 추가 병력을 끌어내야 해.’
말투부터 구파의 장문을 대하는 예의와는 거리가 멀다.
공지량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겨우 눌러 참았다.
“불쾌했다면 미안하오. 허나 그게 사실이외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난 그놈이 천하제일인이라 확신하고 있소.”
“카핫! 천하제일인?”
비웃음이 뒤를 따랐다.
“장문인? 우리 솔직히 까놓고 말해봅시다. 어찌 어찌해서 점창파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그대의 무공은 별 볼 일 없지 않소?”
“뭐라?!”
공지량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지만, 막지후는 신경 쓰지 않고 지껄였다.
“젊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솔직히 얼마 전 그대를 보았을 때, 실소를 금치 못했소. 구파 장문인의 무공 수위가 겨우 이 정도라니. 내 말, 부정할 수 있소?”
“이, 이, 이건…!”
단전이 깨지고 사지근맥이 절단된 뒤에 이 정도 무공이라도 회복한 건 기적 같은 일이다.
호르찰의 돈으로 구한 영약과 괴의의 집중 치료 덕분에 회복했지만, 구파 장문인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공지량은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고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설령 전쟁 전이라 하더라도 막지후의 눈에는 차지 않았을 테니까.
“불쾌했다면 미안하오. 허나 그게 사실이외다. 우물 안 개구리는 그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전부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지. 천하제일인? 크큭. 그대에게나 그렇게 보일 뿐이란 걸 확실히 해둡시다.”
막지후는 놀리듯 자신이 했던 말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
너무 화가 나서 뇌가 폭발해 버릴 것 같다.
자신이 건재했더라도 이놈이 이따위 막말을 늘어놓을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겠지.’
과거에 어땠던 이게 현실이다.
공지량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걸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내가 약하더라도 점창은 약하지 않소. 알다시피 놈들은 사 년 전 전쟁에서 우리를….”
막지후는 이젠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는 손을 휘저어서 공지량의 말을 끊었다.
“물론 점창은 강하지. 하지만 그것도 상대적인 기준일 뿐. 솔직히 말해보시오. 흑전대와 봉검대가 붙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
공지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보기에도 흑전대의 무력이 예상을 뛰어넘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허, 허나 그놈을 상대하기엔….”
“짜증 나는군.”
막지후가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누가 들으면 그 야만인이 협검쯤 되는 줄 알겠어. 좋아. 설령 족장이란 놈이 협검의 수준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걸 말해두지. 만약 협검 그 새끼가 황성에 쳐들어가 뒈지지만 않았다면 조만간 내가 목을 따줄 생각이었으니까.”
막지후가 왼쪽 안대를 긁으며 뇌까렸다.
공지량은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뱉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막지후는 수틀리면 어떤 행동을 벌일지 가늠이 안 되는 인간이었고, 자신을 지킬 힘도 배경도 없는 상황에서 그를 도발할 배짱이 공지량에겐 없었다.
막지후는 얼굴이 벌게지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공지량의 모습을 마음껏 즐겼다.
‘두고 보자. 내가 점창을 되찾고, 금광을 손에 넣어 힘을 가지면….’
공지량이 가까스로 울분을 삼킨 뒤에 말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내가 흑상에게 지급한 돈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액수란걸. 그리고 난 분명히 흑전대의 대주를 파견해줄 걸 요청했지. 놈들을 잡는 데 실패할 경우, 흑상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공지량은 막지후가 대꾸하기도 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여기 더 있다가는 와족을 보기도 전에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선 모욕을 받은 자의 분노가 여실히 묻어났다.
공지량이 나가고 얼마 후, 막지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훨씬 덜떨어진 놈이로군. 구파의 장문이란 자가 감정도 숨기지 못하다니.”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막사의 구석에 대고 말했다.
“얼른 쓸어버리고 돌아갑시다. 본 상단이 양지로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만금당주의 목을 날리는 역할을 손가 놈에게 빼앗길 순 없지 않겠소?”
그러자 막사 구석의 어둠이 화답하듯 꿈틀거렸다.
“뭘 쳐다보는가?”
공지량이 씩씩대며 막사를 나왔을 때, 비웃음 가득한 눈초리들이 쏟아졌다.
흑전대원들이었다.
육성으로 이야기한 탓에 둘의 대화가 모두 들린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장문인. 그저 명성 자자한 구파 수장의 존안을 뵙고 싶어서.”
예의를 가장한 조롱이었다.
공지량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잰걸음으로 흑전대의 숙영지를 벗어났다.
씩씩대며 아무도 없는 곳까지 왔을 때, 공지량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우측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장문인.”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공지량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러곤 침착하게 말했다.
“멍청한 놈들. 시키는 대로 했다면 목숨은 부지했을 것을. 당가주에게 전하라. 계획대로 움직이라고.”
“예, 장문인.”
공지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싸늘한 얼굴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