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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81화 (381/463)

381화

* * *

뚝, 뚝…….

사물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

검은 물방울이 잎에서 미끄러진다.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잎이 젖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쐐애액―!

검은 그림자들이 그 앞을 지나쳤다.

밀림이 우거진 탓에 그림자 중의 하나가 잎을 건드렸고, 낙하하던 물방울과 부딪혔다.

팟!

대충 무두질하여 걸친 짐승의 가죽.

성긴 수풀 사이로 달빛이 흘러 들어와, 가죽에 묻은 물방울을 비췄다.

잘게 쪼개진 그것은 섬뜩하리만치 붉었다.

잎을 적시고 있던 건 뜨겁고 붉은 피였다.

으드드득―!

전방 이십 장, 목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인간의 몸을 부수고, 꿰뚫는 소리가 줄을 이었다.

상의에 핏방울을 묻힌 사내가 중얼거렸다.

“잠깐 뜸하더니 쉬지 않고 나타나는군요.”

답변은 좌측에서 들려왔다.

“그렇구나. 내 경고가 약했던 건가?”

그 의문에 앞서 말했던 사내가 대꾸했다.

“그럴 리가. 형님이 말할 때, 놈들의 표정을 보았소.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은 제대로 알아먹었어. 딴 놈들에게 전달이 안 된 거겠지.”

매서운 눈이 너른 하늘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영인이 지척이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점창과 상관없는 놈들을 죽이는 것 때문에 심란해하지 마십쇼.”

“여기까지 와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 염려 말아라.”

너른 하늘이 괜한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그는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회상했다.

중원의 첩보조와 대면한 후, 와족 전사들은 빠르게 북상했다.

엄포를 놓은 게 효과가 있었는지 며칠간은 조용했는데,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새로운 녀석들이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이제부터 보이는 놈들은 전부 죽여라.”

잡았다 놓아주기도 하고, 대대적인 경고도 했다.

더 이상은 사정 봐줄 여유가 없었다.

너른 하늘의 명이 떨어진 순간, 살육이 시작됐다.

“큭…!”

“카아악!”

“어헉…!”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중원 첩보조의 은신은 검은 수리 전사들의 이목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들만으로도 충분한데 전대 수장들이 위치를 알려주니, 와족에게 접근한 자들은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모두의 이목을 끄는 일이 일어났다.

검은 수리 한 명이 역공을 당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니?! 이놈이…!”

근처에 있던 동료가 달려들었으나, 그 역시 목이 떨어졌다.

다른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

그리고 놈의 검술은 대단히 익숙한 형태였다.

“응목대…!”

검은 수리들이 대노하며 뛰쳐나갈 때,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으니.

“갈아 마실 새끼들. 이제야 기어 나오는구나.”

바람보다 빠른 움직임.

검은 수리들을 추월한 건 매서운 눈이었다.

“흡…!”

응목대원의 검 놀림은 쓸 만했으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매서운 눈은 놈을 일격에 쳐 죽이고, 숨어 있는 두 놈도 찾아내 숨통을 끊었다.

“크아앙!”

달아나는 놈을 처리한 건 외톨이였다.

“역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마음 단단히 먹어라. 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방심하면 우리가 당한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와족 전사들이 이를 깨물며 전진했다.

“쿨럭! 크, 흐흐…….”

외톨이에게 목을 물린 응목대원이 죽어가면서 웃은 건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빠각! 우드득!

와족이 떠난 자리, 십여 개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시체들을 훼손하는 것 역시도.

“정지하라.”

너른 하늘이 회상에서 깨며 전사들을 멈춰 세웠다.

지루하게 이어진 원시림.

마침내 시야가 트이며 이색적인 풍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거진 삼림으로 둘러싸인 집촌(集村).

사천과 운남의 경계이자, 사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구릉 아래에 위치한 덕분에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영인이다…!”

사실, ‘영인’은 시가지라고 부르기 민망한 곳이었다.

기껏해야 삼십여 채의 건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목을 사로잡는 점이 있었으니, 아창족과 하니족, 납서족의 솜씨가 혼재된 건축 양식 때문이었다.

그러는 한편, 한족의 영향을 받아서 나무 대신 돌로 집을 지었는데, 마치 거북이가 납작하게 웅크린 것 같았다.

어디를 가도 이런 느낌은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보기, 좋다. 형님, 저기 세 부족 모여 사는 곳, 맞죠?”

우둔한 땅이 드물게 입을 열었다.

별이 박힌 밤하늘과 끝없이 펼친 삼림, 그리고 은은한 불빛이 켜진 마을.

전시만 아니라면 넋 놓고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맞다. 우둔한 땅. 드물게 여러 부족이 모여 사는 곳이지. 숫자는 적지만 말이야.”

너른 하늘도 젊은 시절에 딱 한 번 방문한 게 전부였다.

영인의 구성원 중엔 아창족이 섞여 있었고, 그들은 운남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사용하는 민족이다.

또한 그들은 대단히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인은 어지간한 맹수의 습격은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가옥의 구조와 재질이 방어에 용이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딱 한 번, 그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 방문했는데, 영인은 너른 하늘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노을이는 아직인가…….”

너른 하늘이 감상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북서쪽을 바라봤다.

합류시기를 넘겼음에도 아무런 기별이 없다.

스멀거리는 불안감.

너른 하늘의 표정이 굳자, 매서운 눈이 얼른 말했다.

“걱정 마십쇼, 형님. 걔가 어디 보통 물건이오? 솔직히 이제는 저나 우둔한 땅도 노을이 못 이깁니다. 산과 걸음이도 저희 실력에 근접했고요. 어스름, 그 우울한 놈도 붙어 있으니 봉검대와 맞장 떠도 이길 겁니다.”

사감을 배제한, 객관적인 전력 분석이었다.

청년 전사들의 평균적인 힘은 기존 전사들에 못 미치지만, 수장들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너른 하늘과 그믐을 제외하면 그 나이에 그 정도 성취를 이룬 자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노을이가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그믐 할아범을 능가할지도.’

잠재력과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산과 안개걸음도 머지않아 자신이나 우둔한 땅을 넘어서리라.

흡족해하던 매서운 눈이 너른 하늘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누구도 형님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겠지.’

이 사람은 인간의 범주에 넣기 힘든 초인이니까.

또한,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매서운 눈은 너른 하늘만 있다면 세상 누가 오더라도 와족을 꺾지 못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노을이는 이미 훌륭한 족장이야. 수장으로서의 능력은 나보다도 뛰어나지. 어떤 난관이 닥치든 잘 해낼 거다.”

너른 하늘은 청년 전사들이 무사하길 기도하는 한편,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영인에 진입하기로.

뭐가 기다리고 있든 깨부술 자신이 있었고, 여울이가 무사한지를 당장 확인해야 했으니까.

“가자.”

두려움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뒷모습.

와족의 전사들이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러곤 그들 역시 매서운 눈과 같은 생각을 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중원 전체가 몰려와도 지지 않을 거라고.

“음…….”

울창한 숲이 이어진 비탈길을 내려갈 때였다.

너른 하늘이 작게 침음했다.

와족 전사들은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시체…!”

주먹과 발에 채인 듯 훼손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복식은 각양각색이었다.

“……첩보조. 공지량도 영인에 접근한 요원들을 살해한 모양이구나.”

이상한 건 검흔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점창의 주력이 창산을 비웠다곤 하나 남은 병력이 그를 따를 리 없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건가?’

정확한 추측이었다.

공지량은 봉검과 운검, 풍검대주를 인질로 잡았으나, 풍검대와 새로운 응목대, 그리고 잔류한 이, 삼대 제자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사문의 어른이 죽는 걸 볼 수 없어서 순순히 투항했을 뿐, 그들은 와족을 공격하는 걸 완강히 거부했다.

공지량은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장들을 죽였다가는 당장 들고 일어날 것이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제자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의 목적은 와족에게 복수하고 금광을 차지한 뒤에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었으니까.

“목숨을 잃은 자가…… 정말 많구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너무 많은 숫자가 운남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게 마른 비의 남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의 명성을 실감할 수 없는 와족으로서는 그저 기이할 뿐이었다.

“음?”

너른 하늘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왜 그러시오, 형님?”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는 먼 곳.

나무에 가려진 언덕 저편에서 움직임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포위당했구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구릉을 둘러쌌다.

그리고 자신들의 움직임에 맞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른 하늘도 겨우 느낄 만큼 먼 곳에서부터.

“포위라고요?”

매서운 눈이 뒤를 돌아봤다.

와족 전사들 역시 동요한 기색을 드러냈다.

공지량이 준비한 함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간다.”

그러나, 너른 하늘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많지만, 영인을 둘러싼 구릉은 굉장히 넓다.

그리고 무력 수준을 가늠할 때 포위가 좁혀들어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무엇보다 후퇴라는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공지량이 영인으로 올 것을 주문했고, 여울이 거기에 있을 테니까.

“무엇이 오든 정면에서 박살 낸다.”

그것이 바로 전사의 마음가짐이다.

와족 전사들은 속도를 올려서 영인에 진입했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처참하게 도륙당한 소수부족들을.

“아창…!”

부러진 도.

박살 난 신체.

아창족은 격렬히 저항한 듯했지만, 적을 이길 순 없었다.

운남을 방문한 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던 마을이 개 한 마리까지 철저히 도륙당했다.

“하니와 납서까지! 공지량 이놈, 또 이런 짓을…!”

예상은 했지만,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사내들의 시체가 부패하여 구더기가 들끓는 데 반해 여인들이 살해당한 건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으니까.

정황으로 볼 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끔찍한 일을 당한 게 분명했다.

참상은 마을의 아름다운 정경과 대비되어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 개새끼들을…! 사 년 전엔 이런 짓을 벌이진 않았소! 복수에 눈이 뒤집혀서 뵈는 게 없는 건가!”

매서운 눈이 부들부들 떨며 여인들의 시체를 덮어주었다.

허나 아무런 대꾸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형님?”

와족 전사들이 시체를 수습할 때도 너른 하늘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마을 중앙의 가장 큰 건물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짝! 짝! 짝!

뜬금없이 울리는 박수 소리.

일렁이는 불빛을 받으며, 왼쪽 눈에 안대를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푸른 광택을 띠는 장창에 급소를 보호하는 경갑(輕甲).

사나운 인상의 사내였다.

막지후는 비릿하게 웃더니 과장되게 손뼉을 쳤다.

“내 기운을 잡아내다니. 아주 제법이야. 공 장문인의 말이 아예 허풍은 아니었구만?”

‘이럴 수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눈치채지 못했다고?!’

매서운 눈이 볼을 씰룩였다.

우둔한 땅을 돌아봤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인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막지후는 거만한 표정으로 와족 전사들을 훑다가 너른 하늘에 이르러서야 눈길을 멈췄다.

“자아……. 그래서, 네가 천하제일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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