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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82화 (382/463)

382화

“천하제일인?”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너른 하늘이 반문하자, 막지후가 킬킬대며 웃었다.

“공 장문인이 그러더라고. 너희 부족에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있다고. 큭큭큭! 너희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나? 요 몇 년간 들은 농담 중에 최고였어!”

막지후는 생각할수록 웃긴지 눈물까지 찔끔댔다.

하지만 너른 하늘은 장단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여울이는? 여울인 어디 있나.”

“응? 누구?”

와족식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 막지후가 되물었다.

그러던 중 응목대가 잡아 온 여인을 떠올리고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지. 잘 있고말고. 파릇파릇한 게 아주 쓸 만해서 수하들에게 던져주려 했거든. 안타깝게도 우리의 전리품이 아니라서 그러지 못했지. 방금 전에 신병을 양도받았다.”

막지후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뒤편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대가 올라왔다.

“여울아!”

장대 끝, 열십자(十) 형태의 틀에 여울이 묶여 있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막지후의 말처럼 몹쓸 짓을 당한 건 아닌 듯했다.

바닥까지 떨어졌어도 정파라는 자각은 있는 걸까?

눈앞에 있는 놈이 아니라 공지량에게 잡혔던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공 장문인은 너희가 날뛰지 못하도록 인질로 쓰라고 했지만, 그건 내 방식이 아니야. 어차피 다 죽일 텐데, 그런 건 번거롭기만 하거든.”

척, 척, 처억.

무인들이 대열을 갖추고 다가왔다.

바깥에서부터 조여든 포위망.

막지후처럼 검은 옷에 경갑을 착용한 자들이었다.

“막지후. 흑상을 수호하는 흑전대의 부대주다. 오래전, 무림에선 ‘악창’이라고 불렸지. 이들은 내가 키운 제자이자 수하이며, 천하 어떤 무력집단에게도 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

막지후가 스스로를 소개했지만, 너른 하늘은 듣지 않았다.

처참하게 죽은 소수 부족들의 시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희의 짓이겠지?”

막지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모양이다.

허나 너른 하늘의 반응이 재밌는지,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힘도 없는 놈들이 반항하는 게 재밌어서 가지고 놀다 죽였지.”

“여인들은?”

막지후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이었다.

“이런 오지까지 내려왔는데 기분 풀 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너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좋은 노리개가 되어줬지.”

막지후에게선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악창(惡槍).

왜 그렇게 불렸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흑전대……. 흑상이라고 했지? 총 몇 놈이냐.”

“……?”

막지후는 이게 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랬다가 질문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몇 명이냐고? 흑상이 너희처럼 백 단위인 줄 아느냐? 셀 수 없다. 직간접적으로 흑상과 연을 맺은 자들은 헤아릴 수 없어.”

막지후는 서서히 웃음을 그치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점창을 꺾었다고 했지? 최고수인 고검이 빠졌지만,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지. 좋아. 그 기준으로 말해줄까?”

너른 하늘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막지후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셋. 정파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는 구파일방 중 세 곳을 합친 것과 비슷한 전력이다. 흑상이 보유한 힘은 말이야.”

사실이라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세인들에게 흑상이란 지하 경제를 주무르는 암상인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는 있겠거니 추측하지만, 흑전대의 존재를 아는 자도 드물었다.

한데 그런 엄청난 힘을 지녔다니.

명이 건국되고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걸로 볼 때, 흑상의 힘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그런가.”

하지만 너른 하늘의 반응은 담담하기만 했다.

기겁할 걸 기대하던 막지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냐, 그 반응은? 점창과 싸워봤으니 알 텐데? 그게 얼마나 엄청난 힘인….”

“명심해라.”

너른 하늘은 막지후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선언했다.

“최선을 다해 덤벼라.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날 쓰러뜨려. 만약 오늘 너희가 날 죽이지 못한다면 흑상은 내 방문을 받게 될 테니까.”

너른 하늘은 막지후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날, 흑상은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침묵이 내리깔렸다.

어처구니없는 표정과 기가 막힌 눈빛.

발작에 가까운 반응이 터진 건 잠시 후였다.

“저 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야만인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스르릉, 스릉!

흑전대원들이 무기를 뽑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그들을 멈춘 건 막지후였다.

“그만! 누가 멋대로 움직이라고 했나!”

화를 낼 줄 알았건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막지후가 장창을 땅에 수직으로 꽂더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좋군. 사내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단, 실력이 없는 허세라면….”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막지후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방식으로 죽을 줄 알아라.”

막지후가 자세를 낮추며 기합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힘줄이 불거지고, 눈에 핏발이 선다.

막지후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거침없이 상승하는 기운…!

그는 자신의 힘을 만천하에 뽐내듯이 내력을 개방했다.

“하아아….”

차가운 기온에서 숨을 뿜듯 유형화된 숨결이 흘러나온다.

막강한 내력과 숙련에 이른 무예.

그가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현상이었다.

“으음…….”

매서운 눈이 침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은 놈이지만, 힘 하나만은 진짜다.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놈은 그믐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가는 강자였다.

‘세상엔 강한 놈들이 왜 이리도 많은 거냐!’

여휘를 봤을 때도 놀랐다.

허나 그는 중원에서 유명한 무인이었고, 성품까지 겸비한 자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놈은…!

‘개차반 같은 쓰레기가 이런 힘을….’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하늘은 왜 저런 놈들에게까지 강대한 힘을 허락한 것인가….

여기가 중원 한복판이었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신흥 세력들의 출현과 십좌에 비견할 만한 막지후의 힘.

그건 구파일방과 십좌로 대변돼 온 전통적인 힘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희한한 짓을 하는군. 아군의 사기를 올리려는 것 같진 않은데. 단순히 뽐내길 좋아하는 건가….”

무력시위를 하는 듯한 막지후의 행동은 너른 하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한껏 힘을 끌어올리고선 ‘이젠 네 차례다.’라는 듯이 쳐다보고 있으니….

한데 그 거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천하제일인이라….”

그런 걸 염두에 둔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질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뭐 하쇼? 얼른 보여주지 않고?’라는 매서운 눈의 표정 때문에, 너른 하늘은 마음을 굳혔다.

“흡…!”

서서히 상승하는 기세.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의 수준까지 이르렀을 때, 막지후가 중얼댔다.

“크큭, 좋아.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믐의 수준까지 이르자, 막지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으음……. 이건 제법….”

그믐을 초월했을 때, 그는 당황했다.

“어, 어엇? 자, 잠깐….”

그래도 너른 하늘의 기운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막지후가 퍼뜨린 기파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농밀한 기의 소용돌이가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이건 대주님과 비슷…. 아, 아냐! 대주님도 이 정도는….”

마침내 너른 하늘이 자신의 모든 걸 내보였을 때, 막지후는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이, 이게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힘이란 말이냐?!

공지량을 우물 안 개구리라며 비웃었다.

허나 막지후는 우물에서 퐁당퐁당 헤엄을 치던 게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적자(無敵者).

그 말이 진정으로 어울리는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이, 이런 놈에게 기습을 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협검, 그 빌어먹을 새끼가 원 황실을 상대로 그랬듯이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벌인다면, 흑상은 추산할 수 없는 피해를 볼 게 자명했다.

수십 년의 인고 끝에 겨우 세상에 나오려 하는데, 시작부터 좌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막지후의 외침은 처절하리만치 절박했다.

“쳐라! 죽여 버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놈을 죽이지 못하면 끝장이다!”

다행히도 병력이 우위에 있으며, 만약을 대비한 패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막지후가 뒤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한 놈도 움직이지 마라! 주술사라고 했나?! 너희들이 저항하는 순간, 저년의 목이 날아갈 것이야!”

그때, 막지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인질극을 벌이는 건 네 방식이 아니라며? 급했나 보군.”

“아, 아니?!”

언제 뒤로 돌아갔단 말인가!

아니, 저런 자는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없었다.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

여울이 묶인 장대 위에는 곰방대를 문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는 짓이랑 달리 깜찍한 놈이로고. 살다 살다 웃겨서 은신이 풀릴 뻔한 건 처음이었다. 기세 좋게 힘자랑하다가 단박에 쫄아서 말 바꾸는 꼴이라니.”

“이, 이익…!”

인질을 빼앗겼다.

하지만 막지후를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노인의 존재였다.

자신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기파.

공지량이 신신당부했던 ‘회효’라는 장로가 분명했다.

“네놈이 생각보다 강해서 어떻게 이목을 속일지 고민이었는데…….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주는구나.”

너른 하늘이 막지후의 장단에 어울려준 가장 큰 이유였다.

막지후가 놀라서 평정을 잃은 사이, 그믐이 파고들 기회를 만들어준 것.

당황하던 막지후의 표정이 변한 건 그때였다.

“크크! 잘난 척하지 마라, 늙은이!”

쾌애애액―!

성인 팔뚝 굵기만 한 장대.

거기서 무언가가 분리되듯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급격히 솟구치며 그믐에게 쇄도했다.

“헛…!”

새벽 어스름에 비견할 만한 은신!

발밑에 있음에도 그믐 같은 강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공지량을 대면할 때, 막사 구석에 숨어 있던 그는 막지후가 거금을 들여 고용한 탈명회의 특급 살수였다.

일격필살 살수 비기가 그믐의 목숨을 노렸다.

“이놈이 어디서 감히!”

허나, 칼질 자체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믐이 살수의 일격을 허용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음?!”

궤도가 변한다.

그믐을 처치하지 못할 거라고 느낀 순간, 살수는 표적을 바꿨다.

노리는 건 여울의 목!

그믐은 방어를 풀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망할 자식이…!”

빠악!

피슛―!

그믐의 주먹이 살수의 어깨를 때리고, 살수의 칼은 그믐의 팔뚝을 베었다.

녹록지 않은 놈이란 건 눈치챘지만, 그 와중에 또 한번 검의 궤도를 바꾸다니….

허옇게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여울은 구할 수 있었다.

살수 놈도 바닥에 내동댕이쳤으니 이제….

“헛?!”

그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깨뼈가 박살 나서 추락한 놈이 곧바로 튕기듯 땅을 박찼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살수를 요격한 자리에서 달큼한 냄새가 풍겼다.

“오냐. 아예 죽여주마. 내게 같은 방법이 통할 거라고 여긴다면 오산….”

그 순간, 그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개를 돌리니 옆구리를 향해 장창이 날아들고 있었다.

“죽어라, 늙은이!”

아래에선 살수가, 옆에서는 막지후가 달려든다.

혼자라면 모를까, 여울이 때문에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우라질…!”

그믐이 그답지 않게 난처해할 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나. 넌 나와 싸워야지.”

막지후의 등 뒤에서 푸른 눈빛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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