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후우욱―!
솜털까지 곤두서는 파공음.
무지막지한 정권이 날아온다.
막지후가 기겁하며 등을 돌렸다.
“크흡…!”
장창도 그의 몸을 따라 선회했다.
척 봐도 예사롭지 않은 창날에선 푸른 광택이 번들거렸다.
투콰앙―!
“컥…!”
예사롭던, 예사롭지 않던 달라질 건 없다.
너른 하늘의 주먹은 맞받을 수 없는 철퇴와 같았고, 막지후는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담장을 들이받았다.
그러곤 담장을 부수고 가옥까지 날아가서 처박혔다.
너른 하늘이 끝을 내기 위해 발을 옮길 때였다.
“음?”
주먹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
너른 하늘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뜨거운 피가 주먹을 타고 뚝뚝 흐르고 있었다.
“……자연기를 두른 강피가 뚫렸다고?”
이건 정말 의외다.
그렇다면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내공은 아니야. 무기의 재질. 특수한 철인가?”
눈이 시릴 정도의 예기를 뿜는 걸 보고 귀물이란 건 짐작했다.
그래서 방심하지 않고 자연기를 두른 것인데…….
“그래도 찢겼단 말이지?”
너른 하늘이 고개를 들 때, 막지후가 부서진 벽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는 비틀대더니 악에 받친 눈으로 너른 하늘을 노려봤다.
“이… 짐승만도 못한 야만인 새끼가 감히…! 좋다! 한번 해보자! ‘단철장’의 창을 들고도 패하면 나가 뒈져야겠지!”
분노가 두려움을 뒤덮는 순간이었다.
주목할 만한 건 왕문의 별호가 언급됐다는 것.
그가 고수들의 호신강기를 찢기 위해 제작한 차강창(撦罡槍)은 묵철(墨鐵)에 한철(寒鐵)을 입히는 신기술이 도입된 병기였다.
“남차! 원영! 날 도와랏!”
그래도 혼자 싸우긴 무서운 모양이다.
막지후가 흑전대의 부장들을 불렀다.
너른 하늘이 마음껏 까불어보라는 표정으로 다가갈 때, 그믐을 홀로 상대하게 된 살수는 필사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스팟! 휘릭― 추아악!
찌르고, 당긴 뒤에 다시 휘두른다.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한 검술.
아니, 그건 검술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방어 따윈 배제한 채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해 추는 본능적인 검무(劍舞)였다.
“놀고 자빠졌네. 어디서 이따위 미숙한 솜씨로….”
하지만, 모습이 드러난 시점에서 그믐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검을 쓰는 실력도 은신만큼이나 뛰어났다면 고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살수는 그렇지 못했다.
투파팍! 쩌억―!
농익을 대로 농익은 올빼미 사냥이 살수의 전신 요혈을 후볐다.
휘돌려 찬 다리가 갈비뼈를 모조리 분질러 버렸다.
“…….”
기가 막힌 건 그러고도 움직인다는 점이다.
움직임이 둔해졌을 뿐, 살수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둘렀다.
“뭐 이런 놈이?”
이걸 투지라고 봐야 할까?
아니다. 이건 어딘가가 고장 난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필시….
“뇌…! 뇌를 건드린 거구나!”
그믐은 연륜에 걸맞게 살수의 상태를 금세 알아챘다.
계속해서 후각을 건드리는 달큼한 향.
종류는 알 수 없지만, 통각을 마비시키는 약물을 흡입한 게 분명했다.
“언제부터 살수가 약을 썼지?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야 할 놈들이 이런 멍청한 짓을….”
살수 입장에서도 억울한 일이었다.
자신이 원해서 쓴 게 아니었으니까.
‘흐흥흥~! 특급 살수가 이걸 들이마시면 어떻게 될까요오?’
회주의 딸을 인질로 잡은 놈.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망할 자식이 턱을 벌리고 강제로 들이부은 것이니까.
그리고 한 번 흡입하니 끊을 수 없었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이만 죽어라.”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머리가 박살 나고도 움직이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믐은 여유롭게 살수의 검을 튕겼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곤 자연기를 흘려 넣었다.
투학―!
겉은 가만히 둔 채 신체의 내부를 망가뜨리는 기공.
중원에서 이야기하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다.
살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흰자위를 뒤집었다.
이어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거꾸러졌다,
“좋아.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됐군.”
그믐이 장대에 매달린 여울을 내리며 중얼댔다.
정신을 잃었을 뿐 상처는 없고, 맥박도 정상이다.
이제 적들이 와족을 겁박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이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꼬….”
그믐이 안쓰러운 얼굴로 여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일지라도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이자 손자손녀처럼 보일 뿐이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곁에서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이제 저놈들을 쓸어버리고 공지량만 찾으면….”
여울을 확보한 그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전장으로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굳었다.
가뿐히 이길 거라 생각한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큭…!”
와족의 방패나 다름없는 바위 곰.
최전선을 담당하는 벽에 균열이 일었다.
추아악―!
피가 튀고, 살점이 갈린다.
뼈까지 잘려서 치명상을 입는 전사들이 속출했다.
“아니?! 어떻게…?”
자연기를 주입한 강피와 철골이 저토록 맥없이 뚫리다니?
그믐이 눈살을 좁히며 원인을 찾았다.
그가 보기에 와족이 밀리는 이유는 흑전대가 지닌 무기 때문이었다.
“카하하! 깜짝 놀랐느냐?!”
푸르게 윤이 나는 칼날.
막지후의 것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그 역시 강기를 찢어발기기 위해 특수 제작한 병기였다.
흑상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휘하의 철장들이 달라붙어 왕문의 솜씨를 흉내 냈다.
그 결과 유사한 물건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묵철과 한철이 섞인, 귀한 소재의 무기를 말단 대원에게까지 지급하는 것.
발상은 떠올릴 수 있어도 실제로 도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만금당의 재력을 능가하는 흑상이기에 가능한 사치였다.
“너희들의 몸이 그렇게 단단하다지? 한데 왜 이리 쉽게 찢기느냐?! 카하하!”
와족의 특징, 그리고 즐겨 쓰는 전략전술에 대해 알고 온 것이다.
그건 뒤에 이어진 일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슈아악―!
방패가 위태로우니 창이 나선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창의 뒤에는 비수가 뒤따랐다.
나무 표범과 검은 수리.
와족의 적들을 꿰뚫었던 날카로운 칼날이 단번에 가로막혔다.
쩌저정―!
그건 점창과의 전쟁에서도 효력이 입증된 도구였다.
방패.
무림의 싸움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는 방어구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뛰어넘어라! 나무표범!”
허나 전쟁으로 단련된 건 와족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매서운 눈은 기다렸다는 듯이 명을 내렸다.
나무표범 전사들이 방패를 딛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곧이어 쏟아지는 발차기!
수십 명이 펼치는 소낙비가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예상한 그대로다! 찔러라!”
하지만 흑전대는 거기까지 예측한 듯했다.
방패 뒤.
대기하고 있던 흑전대가 사선으로 장창을 쑤셨다.
발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이루어진 요격!
나무표범을 구한 건 검은 수리였다.
슈아아악―!
은신을 풀고 솟구친 전사들이 창대를 분질렀다.
그리고 흑전대와 나무표범 사이를 그대로 가로질렀다.
요격에 실패한 흑전대가 눈을 부릅뜰 무렵!
“뒈져라! 새끼들아!”
마침내 소낙비가 작렬했다.
투두두두두―!
맹렬한 연타가 흑전대의 상체를 두드렸다.
방패가 튕겨나가고, 투구가 찌그러지며, 머리통이 뭉개진다.
매서운 눈이 전수한 독문 기예는 나무표범 전사들에게 바위 곰 못지않은 파괴력을 선사해주었다.
“우리를 잊으면 섭하지.”
창대를 분지르느라 사선으로 날아오른 검은 수리.
나무표범을 앞질러 간 그들은 흑전대의 머리 위에 있었다.
“전부 죽여라.”
지휘자의 명이 떨어지자, 검은 올빼미들이 사냥감을 덮쳤다.
퍼버버벅―!
경갑이 보호하는 건 급소뿐이다.
허나 인간은 어디든 제대로 얻어맞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
올빼미 사냥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했고, 행동 불능이 된 흑전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뭐야? 좀 치는 줄 알았더니 장비 빼면 쭉정이잖아?”
매서운 눈이 빈정대며 흑전대를 도발했다.
하긴, 강할 수밖에 없다.
여기 있는 건 점창과의 전쟁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와족 무력의 정수니까.
잠시 밀리는가 싶더니, 와족은 순수한 힘으로 무기와 숫자의 열세를 극복해냈다.
“이건… 예상보다 훨씬 강하군. 준비하길 잘했어. 던져라!”
위기가 닥친 건 흑전대 지휘관의 명이 떨어진 후였다.
그들은 무너진 전열을 버렸다.
후방의 흑전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던졌고, 앞쪽에선 방패를 세웠다.
성인 주먹만 한 철 구슬.
와족 전사들이 경계하며 팔을 들어 올릴 때였다.
찰칵!
철침이 구슬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곧이어 구슬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투확―! 피핏! 피피핏―!
날카로운 철침을 사방으로 쏟아내는 기문병기.
광공장이 무공 없이도 당가보다 인간을 더 많이 죽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며 만든 강침사출환(鋼針射出環)이었다.
그는 재미 삼아 발명했지만, 그 위력은 결코 재미있지 않았다.
심지어 흑상은 여기에도 돈을 쏟아부어 철침 하나하나에 한철을 입혀놓았으니.
“크아악!”
“컥…!”
철침이 강피를 뚫고 와족 전사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갑옷을 걸친 것과 다름없는 와족의 방어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병기.
막지후가 큰소리를 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한족 놈들은 어디서 이런 괴상한 물건을 끊임없이 가져오는 것이냐?!”
점창도 그랬고, 흑상도 그렇다.
무림에선 보기 힘든 전략 병기와 기문병기가 줄줄이 튀어나온다.
중원이었다면 사용할 엄두도 못 냈거나, 악명이 따라붙을 걸 각오해야 할 물건들.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여 외부와 단절된 운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와족이 입고 있었다.
“장비뿐이라고 했나?”
스르릉.
흑전대의 지휘자가 검을 뽑았다.
푸른 광택이 선명한 검날.
막지후의 창만큼이나 제대로 연마한 보검이었다.
“보여주마. 과연 장비뿐인지를.”
쿠쿵, 쿵, 쿠쿠쿵.
흑전대가 방패와 장창을 버렸다.
그리고 전부 자신의 애병을 뽑았다.
도부수(刀斧手)에 검사, 채찍과 륜 같은 기문 병기를 사용하는 자들까지.
공통점은 오로지 공격을 위한 무기란 점이었다.
“제대로 한판 붙어주마.”
흑전대가 포위진을 좁히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매서운 눈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중얼댔다.
“쓸 거 다 쓰고 이제야 제대로 붙자고? 미친 새끼가 장난하나….”
강침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도 컸다.
적진에 달려든 나무표범과 검은 수리가 전투불능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으니….
하지만 시간은 와족의 편이었다.
너른 하늘과 그믐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전세는 뒤집힐 테니까.
그리고, 이쪽 역시 만약을 대비한 패 정도는 있었다.
“오냐. 덤벼라. 형님과 할아범이 합류하기 전에 전부 죽여주마.”
“오오오오! 눈깔! 내가, 먼저 간다!”
매서운 눈이 나서고, 우둔한 땅이 전투함성을 내질렀다.
속도와 힘.
와족을 대표하는 전대 수장들이 땅을 박찼다.
“모조리 죽이고, 부대주님을 돕는다! 쳐랏!”
흑전대 역시 고함을 지르며 돌진했다.
충돌 직전, 흑전대의 지휘자가 어둠으로 덮인 산중을 힐끗거렸다.
그곳엔 와족 전사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찾는 자가 있었으니.
“신호입니다, 장문인. 어쩌시겠습니까?”
검은 옷의 무인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중앙.
의자에 앉아 전장을 내려다보던 공지량이 입술을 뗐다.
“계획을 변경한다. 응목대를 전부 철수시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