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철수… 입니까?”
응목대원이 말을 끌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음성.
미리 언질을 받긴 했지만, 막상 명령이 떨어지자 미련이 남는 눈치였다.
공지량이 그의 심정을 짐작한 듯 되물었다.
“왜, 우리가 가세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다.
공지량이 답변을 기다리자 응목대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장문인의 안목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흑전대의 전력이 예상을 뛰어넘지 않습니까? 와족 놈들이 더 강할 뿐, 저들은 봉검대와 붙어도 될 만한 실력자들입니다. 심지어 저 무구(武具)……. 저걸 착용한 상태라면 봉검대도 압도하겠지요.”
“그러니 힘을 보태서 여기서 끝을 내자?”
응목대원은 이번에도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공지량은 그를 힐끗 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네는 흑전대가 준비한 ‘그걸’ 염두에 둔 것이겠지. 영인에 접근한 자들을 몰살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말이야. 물론 우리의 힘에 그것이 더해지면 와족 놈들을 궁지에 몰 수 있을 거야. 허나 이기진 못한다.”
“왜 그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공지량이 손을 들더니 전장에서 떨어져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놈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사 년 전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른 걸까?
공지량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너른 하늘이 있었고, 응목대원은 곧바로 납득해 버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 놈……. 흑상이 준비한 패는 쓸 만하지만, 저놈에게 통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막지후는 두 명의 부장과 함께 필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흑전대의 막사에서 들은 조롱이 떠올랐다.
공지량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막지후를 노려봤다.
“협검의 목을 따려 했다고? 병신 같은 새끼!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움직였겠지. 이십 년간 납작 엎드려 있던 놈이 감히 누구에게….”
공지량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흑상이 먼저 약속을 어겼다. 내가 원한 건 흑전대주였지, 저런 잔챙이가 아니야. 당가주와의 밀약대로 움직인다. 준비하도록.”
결국, 너른 하늘을 잡으려면 직접 검을 휘둘러야 한다.
어떤 계략을 쓰든 무인이 적을 무릎 꿇리는 최종 수단은 무력일 수밖에 없었다.
공지량이 등을 돌릴 때, 응목대원이 새로 들어온 보고를 올렸다.
“장문인. 영인에 진입하지 못하고 서성이던 첩보조가 전부 철수했다고 합니다.”
“……철수라고? 쉽게 포기할 놈들이 아닌데?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나?”
응목대원은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이동 방향으로 보아 대리로 간 게 확실합니다. 외람되오나 장문인의 개입을 포착한 게 아닐지….”
공지량이 제자리에 우뚝 섰다.
눈알이 핑핑 돌 만큼 머리를 회전시킨 끝에, 그는 첩보조가 이동한 원인을 유추해냈다.
“……와족과 우리의 일을 들은 놈들은 몽념이 처리했어. 아무리 되짚어도 샐 곳이 없다. 이쪽에서 흘러나간 게 아니야……. 중원에 나갔다는 애송이. 저놈의 아들이 입을 연 거로군.”
공지량이 고개를 들어 북동쪽을 바라봤다.
“수왕이라 했던가?”
웃기지도 않는 별호다.
괴물의 자식이니 그놈 또한 괴물이겠지.
허나….
“그래 봤자 스물 초반의 애송이일 뿐이다. 저놈을 없앤 후엔 아들 차례야. 화근이 될 싹은 남겨둘 수 없지.”
공지량이 멈췄던 발을 뗐다.
산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 해를 피하듯, 그는 원시림이 드리운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오오! 형제들이여! 적들을 분쇄하라!”
백전노장(百戰老將).
거친 모래의 함성이 와족 전사들을 독려했다.
부상당한 동료를 안에 두고, 건재한 자들이 바깥을 막아섰다.
좁고 두텁게 밀집한 원형 방진.
공격은 소수정예의 몫이었다.
“뒤를 따라라! 길을 뚫는다!”
꽈르르릉―!
불벼락이 폭발을 일으키고,
투콰앙!
천둥바위가 대기를 울리니,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의 협격은 방파제를 허무는 파도와 같았다.
두 사람과 부딪힌 흑전대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전열이 깨졌다! 들이쳐라!”
와족의 중진을 이루는 전사들.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난입하자, 흑전대는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쪽은 내버려 둬! 정예가 빠져나가게 길을 열고, 남은 놈들을 포위해라!”
흑전대 지휘자의 판단은 빨랐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은 흘리고, 남겨진 놈들을 잡는다.
와족의 대다수가 포위진 안에 있으니 그놈들만 쓸어버리면 승리할 수 있을 터.
“누가 야만인 아니랄까 봐 무식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군! 전술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흑전대의 지휘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놈들의 방어는 무의미하다! 몽땅 갈아버려!”
추아악! 촤악! 스가각―!
피부가 찢기고, 뼈가 잘린다.
칼날을 막을 무기나 방어구가 있었다면 이토록 힘겹지는 않았을 터.
부상자를 지키기 위해 남은 자들이 악전고투를 벌일 때였다.
“아우우우!”
구릉 너머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야수들의 울음이 산중을 채웠다.
“커허헝!”
“푸르륵, 푸륵!”
“샤아아악―!
들불처럼 일어나는 살기.
흑전대가 싸우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이, 이건…!”
반려수.
와족 전사들의 영혼의 벗이 전투에 가세했다.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을 필두로 적진을 돌파한 전사들이 반전했다.
“다시 말해봐라. 누가 전술을 모른다고?”
매서운 눈의 시선은 흑전대 지휘자를 향해 있었다.
매복.
포위될 걸 예상하고 반려수를 외곽에 숨겨두고 온 것이다.
“이 녀석들과 어떻게 합류할지 고민이었는데, 알아서 길을 열어주니 이거야 원.”
매서운 눈의 곁에는 자줏빛 늑대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너희, 친절하다. 고맙다.”
쿵, 쿠웅, 쿵!
“빠오오오~!”
집채만 한 코끼리가 괴성을 터뜨렸다.
긴 코의 덩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꺾일 만큼 압도적이었다.
“뒈질 준비 됐나?”
역포위.
반려수들의 등장으로 전황은 일거에 뒤집혔다.
매서운 눈은 그의 장담대로 너른 하늘과 그믐 없이도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전부 쓸어버려!』
전투함성과 야수의 포효가 메아리쳤다.
산사태처럼 밀어닥치는 병력 앞에서, 흑전대는 압살할 것만 같았다.
분명, 그렇게 보였다.
“아주 좋아.”
와족 전사들을 움찔하게 만든 한마디.
흑전대의 지휘자가 웃고 있었다.
“다시 말해줄 테니 똑똑히 귀에 새겨라. 너흰 힘밖에 없는 머저리들이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미개한 것들아.”
미소가 짙어지고, 왼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지휘자가 힘차게 손을 내리며 외쳤다.
“지금이오! 공 장문인!”
“뭐라고?!”
매서운 눈이 고개를 휙 돌렸다.
여기서 또다시 뒤를 잡힌다면 위험하다.
심지어 그게 약아빠진 공지량이라면…!
휘이이잉―.
하지만 들리는 건 적막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뭐냐?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 혹시 중원에서 유행하는 농담이냐? 못 보는 새 공지량이 바람이 돼버린 거야?”
매서운 눈도 놀랐지만, 흑전대 지휘자는 더 놀랐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저기에…! 어, 어디로 간 거지?”
있어야 할 놈들이 없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매복시켰던 점창의 병력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짐작한 매서운 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로 가긴 뭘 어디로 가? 손을 잡았다면서 우리보다 그놈을 모르냐?”
“무, 무슨 말이냐? 그게?”
매서운 눈이 혀를 차며 말했다.
“뒤통수 맞은 거지. 버림받은 거다, 너희는.”
지휘자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버렸다고? 우리를? 왜,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매서운 눈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라니? 뻔하지 않나. 질 것 같으니까. 이길 견적이 안 나오니까 너희를 버리고 튄 거지.”
지휘자가 입술을 떨며 중얼댔다.
“그, 그럴 리 없다…! 놈은 우리의 힘을 알아. 배신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아무것도 없는 놈이 무슨 배짱으로 우리를….”
매서운 눈은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라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나름의 방법이 있겠지. 너희를 버리고도 흑상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아, 너희 여기 온 놈들을 깡그리 없앴지?”
매서운 눈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했다.
“알 것 같군. 최선을 다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결국 패해서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 공지량은 네 상관에게 그리 말할 거다. 복수의 칼날을 우리에게 돌리면서 말이야. 목격자가 없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지. 대충 그런 것 아니겠어?”
“아, 아니야! 우린 놈의 유일한 희망이란 말이다. 우리가 패하면 그놈은 재기할 방법이….”
매서운 눈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래서 너희가 그 새끼를 모른다는 거다. 확실해? 너희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거? 설령 그렇다 해도 죽을 자리에 머리를 들이밀 놈이 아니지. 그런 새끼다, 공지량이란 놈은.”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흑전대의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가뜩이나 전의를 상실한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졌으니.
“크아악…!”
전장 바깥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경갑을 입은 사내가 양팔이 직각으로 꺾인 채 울부짖었다.
막지후를 도우러 갔던 흑전대의 부장이었다.
퍼어억―!
모두가 고개를 돌렸을 때, 비명이 그쳤다.
상반신에 구멍이 뚫린 그는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끝이 보이는군. 난 분명히 말했다. 최선을 다하라고. 이게 너희의 전부인가?”
무적자의 위용.
너른 하늘이 사색이 된 막지후에게 다가갔다.
흑전대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부, 부대장과 부장 둘이 달라붙고도 밀린다고?”
놀란 건 흑전대만이 아니었다.
매서운 눈도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형님이 상처를 입다니….”
차강창은 신병이기라 불릴 만했다.
강기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너른 하늘이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그의 팔뚝엔 거미줄 같은 검상이 가득했다.
“죽어라.”
하지만, 뒤집힐 수 없는 승부였다.
너른 하늘이 걸음을 옮길수록 흑전대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크아아앙!”
외톨이의 포효가 터졌을 때, 흑전대의 지휘자가 정신을 차렸다.
“내부…! 내부에 있는 놈들을 뭉개라! 그놈들을 없애고 방어진을…!”
허나,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번쩍―!
전사들의 얼굴을 수놓은 문양.
일출을 받은 전투화장은 찬연하기만 했다.
“아아악…!”
“커헉!”
“부, 부장! 퇴로가 없습니다!”
내부에서는 전투화장을 발동한 전사들이, 외부에서는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이 이끄는 반려수들이 흑전대를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병기와 숫자의 우위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지랴앙! 이 개새끼야!”
“우릴 배신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상주님과 대주께서 널 갈가리 찢어 죽일…!”
덧없는 저주가 메아리쳤다.
넋이 나간 듯 멍하게 있던 지휘자가 공지량이 있던 반대편 산중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어…. 그걸 쓸 수밖에….”
어차피 살아남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갈 뿐…!
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올리다 말고 멈칫했다.
“이런 멍청한…. 공지량 그 약은 놈이 그걸 가만히 뒀을 리가….”
공지량은 어느 것 하나 예상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휘자가 허탈한 얼굴로 손을 내릴 때….
불길한 소음이 울렸다.
끼리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