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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85화 (385/463)

385화

“……?!”

육중한 철 뭉치가 마찰하는 소리.

그건 재앙을 불러올 파멸의 전주였다.

찬란하게 번지는 일출이 소음의 정체를 더듬었다.

단단하게 짠 거치대에 놓인 흑색의 쇠뭉치.

길쭉한 몸체에 새카만 입을 벌린 그것은 민간에 통용이 금지된 전략 병기이자 금용 무기였으니.

“저, 저것… 설마 화포(火砲)?!”

여울을 안고 있던 그믐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반면 와족의 전사들은 눈만 멀뚱히 뜬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 쇠뭉치는? 저것도 무기인가?”

“화… 뭐라고? 불? 저게 불이라도 뿜는 거야?”

화포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지금 산 중턱에서 이쪽을 겨냥한 건 광공벽력포(狂工新霹靂砲)였다.

원나라 때 개량을 거듭한 신식 화포에 광공장의 손길이 더해진 것으로, 흑상이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구입한 것이었다.

단순히 철구(鐵球)를 날려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포탄이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며 파편을 쏟아내는 물건.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최첨단 병기나 다름없었다.

“하나도 안 위험해 보이는데?”

문제는 와족의 전사들이 그 위험성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날카로운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설령 저 쇳덩이가 통째로 날아온다고 해도 전혀 무섭지 않다.

화약과 그것이 내는 폭발력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공지량 이놈…!”

흑전대의 지휘자가 입술을 깨물며 파르르 떨었다.

지금 서툰 솜씨로 불을 올리는 자들.

그들은 흑전대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갑이 아닌 무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응목대원이고, 그렇다면 저놈들이 수하들을 죽이고 광공벽력포를 빼앗은 게 틀림없다.

공지량에게 철저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흑전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 저 방향이면…!’

그나마 다행인 건 원래 자신들이 노리려고 했던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곽을 둘러싼 반려수와, 포위된 흑전대.

그리고 그 안에서 흑전대에게 또다시 포위된 와족 전사들.

포구는 정확히 안쪽에 고립된 와족 전사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놈들은 똘똘 뭉쳐 있어! 제대로만 맞으면 야만인 놈들은 전멸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전황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짐승들이 흉포하지만, 야만인 전사들만큼 강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안쪽에 있는 놈들이 전멸하면 흑전대는 똘똘 뭉쳐서 방진을 짤 수 있게 된다.

‘부탁이니 그대로만 발포해다오!’

치이이익―.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흑전대원들은 와족 전사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한마음 한뜻으로 기원했다.

제발 정확히 명중시켜 달라고.

중앙 부근에 있는 자들은 기겁하며 거리를 벌리거나, 방패를 몇 겹이나 덧대는 등 소란이 벌어졌다.

투콰아아앙―!

마침내 포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뇌성벽력이 지근거리에서 터진 듯한 굉음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흑전대 지휘자의 얼굴엔 미소가 그어졌다.

‘정확하다!’

포탄이 날아오는 방향이 절묘할 만큼 정확했기 때문이다.

‘됐어! 놈들은 전멸한다!’

아군도 피해를 입겠지만, 이쪽은 포격 범위에서 벗어나 있고, 어느 정도 대비를 끝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맨몸으로 포탄을 얻어맞은 와족 놈들만 몰살할 뿐.

“영광으로 알아라! 미래의 전쟁 양상을 뒤바꿀 신병기에 뒈지는걸!”

그때, 시간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수백 명 중 단 세 사람만 다른 시간대에 접어들었다.

너른 하늘, 막지후, 그리고… 그믐.

이미 찰나를 쪼갠 영역에서 전투를 벌이던 두 사람과 달리, 그믐은 여울을 내려놓고 이제 막 같은 시간대에 진입했다.

쐐애액―!

노장의 육신이 바람을 갈랐다.

온몸이 뻐근해질 만큼 가해지는 압력.

그믐은 대기의 결을 가르며 전진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쾌애애액―!

둥근 쇳덩이가 인간의 인지 능력을 벗어난 속도로 회전하며 짓쳐 온다.

그믐은 양손에 자연기를 때려 부었고, 포탄이 회전하는 결을 찾았다.

그리고 감싸듯이 손을 가져다 댔다.

‘크흑…!’

뜨겁다.

상상을 불허하는 속도로 회전하는 쇳덩이는 뜨거웠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에 손을 넣은 것처럼.

‘거스르면 안 된다!’

단 한순간이라도 회전의 결과 어긋나면,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포탄이 튀리라.

그러면 끝장이다.

그믐은 눈알이 불거질 정도로 집중했고, 포탄이 회전하는 방향을 따라 양손을 놀렸다.

스아아악―!

살살, 조심히 만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을 만지듯이.

그러면서 슬쩍 포탄의 궤도를 바꾼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와 기교, 켜켜이 축적된 경험이 그걸 가능케 했다.

‘지금…!’

흰자위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집중하던 그믐이 눈을 부릅떴다.

사라락― 툭.

그저 살포시 건드렸을 뿐이다.

포탄이 회전하는 결을 따라 손을 놀리던 그믐이 오른손 검지에 힘을 준 순간!

패애액―!

포탄이 휘었다.

그리고, 작렬했다.

투콰아아아앙―!

그믐을 제외하면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지 못했다.

그의 움직임과 포탄의 속도를 잡아낼 수 있는 두 사람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순간이동을 하듯 전장 위에 나타난 노인과,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린 포탄!

놀라운 일이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크아아악!”

“파, 팔…! 내 팔이…!”

“아, 아아…! 귀가, 귀가 안 들려…!”

비명을 지른 사람들은 축복받은 자들이었다.

포탄이 일궈낸 학살의 현장에서 한 치쯤 비켜난 경우였으니까.

광공벽력포가 적중한 일대는 시신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이 드리워졌다.

물론 거긴 흑전대의 진형 한복판이었다.

“뭐, 뭐야, 이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천둥이 치고, 불꽃이 터졌어…. 저 길쭉한 쇳덩이가 공을 뱉는 것까진 봤는데….”

와족 전사들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만약 저게 자신들에게 날아왔다면?

손도 못 써보고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들은 그믐이 포탄의 궤도를 바꾸었고, 자신들을 살렸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환호를 할 정신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인간이 광공벽력포를 맨손으로 받아낸 거냐?!”

흑전대의 지휘자가 비명을 질렀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구형 화포도 아니다.

단언컨대 광공벽력포는 최소 일이백 년은 시대를 앞선 천재의 작품이었다.

이걸 사용했다는 게 알려지면 황실에서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만큼.

운남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외부의 이목을 끊어낸 뒤에야 발포할 엄두를 낼 무기였는데….

“후우우…….”

경악스런 무위를 선보인 노인.

그믐이 안도의 한숨을 쉴 때, 흑전대는 그의 숨결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아프군.”

벌겋게 익어버린 손바닥.

포탄의 회전을 감당하다가 입은 화상이었다.

지문이 쓸려나갈 만큼 피부가 엉망이 됐지만, 그믐은 웃었다.

가능할지의 여부를 떠나 일단 몸을 날리고 보았는데,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식구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흡족했다.

“쏴, 쏴라…. 뭘 머뭇거리고 있느냐…. 발포해…. 또 발포하란 말이다! 저놈을 죽여어엇!”

흑전대 지휘자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힘의 열세와 전술에서의 패배.

굳게 믿었던 막지후는 적의 수장을 죽이긴커녕 제가 뒈지기 직전이다.

공지량의 배신이 치명타를 안겼고,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화포마저 무용지물이 됐다.

연달아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허용치를 넘어버렸다.

“어차피 다 죽는다! 아무도 살아날 수 없어! 그럼 그냥 이놈들과 같이 죽는 거다! 화포를 쏴! 우리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이놈들을…!”

퍼어억!

동공이 풀려서 횡설수설하는 지휘자를 처리한 건 매서운 눈이었다.

“너나 죽어라. 망할 새끼가 어디서 저런 위험한 물건을 들고 와서….”

끼리리릭―.

“……?!”

그 순간, 불길한 소음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젠장! 진짜로 또 쏘는 건가?!”

매서운 눈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막고 싶었지만, 그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광공벽력포가 있는 곳은 산의 중턱.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할아범! 어떻게 방법이…?!”

이번만큼은 그믐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걱정 마라. 한 번 해냈는데 또 할 수 있겠지. 내가 어떻게든 받아낼 테니….”

하지만, 까딱 실수하면 전부 황천행이다.

손바닥을 다쳐서 조금 전처럼 섬세한 제어도 힘들 터.

그믐이 진의 외곽에서 날뛰는 어둔 날개를 출격시켰지만, 시간을 맞출 리 없었다.

치이이익….

신경이 곤두서서일까?

전장의 소음에 묻혀 들릴 리 없는,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믐의 이마에 식은땀이 또르륵 흐를 때였다.

“끄아아아아…!”

전장의 외곽에서 들려온 비명.

그건 수장들의 전투가 끝난 걸 알리는 타종이었다.

상반신 절반이 으깨진 막지후가 괴성을 지르며 넘어갔다.

한 명 남은 흑전대의 부장은 어느새 머리통이 날아간 채 죽어 있었다.

그그그긍―.

서로 다른 기운이 융합되고,

번쩌어어억―!

와족 역사상 최강의 기예가 섬광을 토했다.

산 중턱을 향해 날아간 빛기둥이 응목대와 화포를 한꺼번에 소멸시켰다.

쿠콰카카캉―!

광공벽력포의 화력을 불꽃놀이로 전락시켜 버릴 대폭발!

서리불꽃은 인간을 학살하는 수준이 아니라 산의 중턱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무, 무슨…?”

“맙소사… 저게 대체…!”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무력.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힘이었다.

너른 하늘은 그 한 수로 흑전대의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완전히 꺾어버렸다.

“준비한 게 또 있나? 있다면 지금 꺼내라. 그게 무엇이든 정면에서 박살 내줄 테니.”

남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선보인 적 없는 비장의 무기까지 꺼내고도 패한 이상, 흑전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면, 이만 죽어라.”

절대자가 흑전대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였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노을은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노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추워…….”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온몸이 떨리다 못해 피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추위.

만년설을 잉태한 설산의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했다.

‘가만. 추운 게 아닌가? 점점 포근해져….’

춥다는 건 착각이었을까?

사고까지 얼어붙게 만들던 한기가 어느 순간부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마치 ‘구름절벽’을 뛰노는 산양의 털 속에 파묻힌 것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그리고… 졸음이 밀려왔다.

‘너무 졸려.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편안….’

꾸벅꾸벅 졸던 노을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정신을 들게 만든 건 목덜미에 와 닿는 숨결이었다.

“훅… 후욱, 훅…!”

짧고 간결하게 끊어지는 숨소리.

소리로 짐작건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려던 노을이 그대로 굳었다.

‘이거… 설마…….’

목덜미를 돌아 코로 들어오는 악취.

맡아본 냄새였고, 끔찍한 혐오감을 주는 구취였다.

‘오, 옹개…!’

죽여 버릴 테다.

이 새끼가 감히 나를 뒤에서 껴안고…!

울컥 치솟는 살의 덕분에 노을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근데 이 새끼가 왜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지?’

지금껏 한 짓으로 볼 때 자신의 몸을 더듬거나 주물럭거려야 정상이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도 남을 놈이 아닌가.

‘그게 뭐가 중요해!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당장 목줄을 따버릴…!’

노을이 몸을 돌리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다리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

감각으로 볼 때, 이건…!

‘부, 부러졌어!’

심각한 상황이다.

다리를 다쳤다면 전투는 물론이고,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노을은 당황했지만, 침착하려 노력했고, 결국 떠올렸다.

자신이 설산의 균열로 떨어졌다는 걸.

‘아…!’

그래서 얌전했던 거다.

아니, 얌전한 걸 넘어 옹개는 죽어가고 있었다.

온몸이 완전히 박살 난 채.

‘이놈 덕분에 산 거구나.’

옹개는 의식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자신을 붙들었다.

걱정이 돼서? 아니, 죽이기 위해.

어쨌든 그 덕분에 추락했음에도 살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세상일,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쳐다보기도 싫은 놈 덕분에 목숨을 구할 줄이야.

노을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상황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 놀라는 바람에 잊고 있던 추위가 엄습했다.

‘으, 으윽! 추워…! 이대로는 얼어 죽을 거야…!’

어떻게든 수를 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죽는다.

노을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어둠에 덮인 옹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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