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 * *
따스한 기운이 스민다.
봄볕이 한겨울 산천을 녹이듯 포근한 무언가가 얼어붙은 육신을 어루만졌다.
혈관에 피가 돌고, 힘주면 그대로 깨져버릴 것 같던 사지가 말랑말랑해졌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날카로우면서도 정겨운 눈동자였다.
“삐익, 삐이이…!”
이번 전쟁에서 칼바람은 백수교도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늘에서 퍼붓는 하얀 폭격은 보고도 막을 수 없는 재앙과 같았다.
하지만 노을에게 있어 녀석은 귀엽기만 한 친구였으니.
그녀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던 흰 수리가 머리를 비볐다.
“삐이이, 삐이…!”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참 귀엽게도 운다.
칼바람이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본 순간, 노을은 자신이 살았다는 걸 실감했다.
“아…! 고마워. 네가 자연기를 불어넣었구나. 덕분에 살았어.”
어스름이 균열에서 올라오자마자, 칼바람은 잡아채듯 노을을 데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체온을 이용해 꽁꽁 얼어붙은 그녀를 녹였다.
그것뿐이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으리라.
영혼으로 이어진 벗.
자연기를 공유할 수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칼바람은 자신의 기운이 바닥날 때까지 자연기를 전이했고, 노을의 몸속에서 휘돌렸다.
그 결과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노을을 회생시킬 수 있었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 정말 고마워.”
노을이 칼바람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 비아…! 비아는?!”
뒤쪽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엔 장난기와 약간의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깨자마자 비아부터 찾고! 그놈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무한 거 아닙니까? 여기 족장님 걱정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산이었다.
투덜대는 말투와 달리 그의 눈시울은 붉었다.
그도 노을이 무사하길 마음 졸이며 기도한 건 마찬가지였다.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꽁꽁 언 동태 같았죠. 심지어 온몸이 피에 절어서 기겁을 했습니다. 저 아래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안개걸음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
노을이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자신을 구한 사람을 묻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안개걸음이 심정을 눈치채고 고갯짓을 했다.
“부족장입니다. 어스름 형님이 족장님을 구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어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뛰어들더군요.”
“아저씨가…!”
이건 정말 의외였다.
어스름이 성년식 때 자신을 담당했고, 2년 가까이 지켜봤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윗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였고, 그믐의 총애를 받아 일찌감치 수리의 눈 수장 자리를 굳혀 놓을 만큼 출중했다.
그래서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윗자리에 오른 게 편치만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군말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고, 스스로 족장의 호위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그냥 임무에 충실한 분이라고만 여겼는데, 목숨을 걸고 나를….’
묘한 기분이었다.
말이 쉽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런데 나는….’
너무 보고 싶어서였을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눈에 비친 건 비아의 얼굴이었다.
다른 건 가물가물하지만, 그건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이 뱉은 말까지도.
‘아악! 미쳤어, 미쳤어! 다른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거야?!’
겨우 살아났다는 것도 잊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리고 어스름에게 너무 미안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살았네요.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하러 온 사람을 다른 이와 착각한 건 서운할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어스름은 다 안다는 듯, 괜찮다는 듯 촉촉한 눈동자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족장님.”
그러곤 묵묵히 자신의 몸을 추슬렀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을에게 있어 어스름은 예나 지금이나 존경하는 전사이자 대하기 어려운 웃어른일 뿐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저 밑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죽었….”
노을이 말을 하다 말고 움찔하며 멈췄다.
어스름의 손가락이 이상한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저씨! 손가락이 왜 그래요? 이리 줘 봐요! 얼른…!”
거뭇거뭇하게 변색된 손가락.
동상의 흔적이었다.
노을은 기겁을 했지만, 어스름은 태연했다.
“꼬박 만 하루를 기어 올라왔습니다. 자연기를 흘려 넣어도 버틸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죠.”
그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버텨준 것만으로도 이 녀석들에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우리 둘 다 죽었을 테니까요.”
어스름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 손가락과 족장님의 목숨. 대어볼 가치도 없습니다. 저는 만족합니다. 그간 고련을 거듭한 보람이 있었어요.”
우직하다 못해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 남자.
노을이 울먹였다.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저씨의 손가락은…!”
그믐의 진전을 이은 사내.
기술을 창안한 본인을 제외하면, 부족을 통틀어 어스름만큼 올빼미 사냥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는 없다.
그는 그 기술 하나만을 파고들었고, 노력으로 하늘이 정한 한계를 극복해냈다.
은신과 결합된 올빼미 사냥이 어스름을 강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인데…….
손가락을 잃는다면 전사로서의 생명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이리 줘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터무니없는 소리다.
여울이 있다면 모를까, 이건 누구도 고칠 수 없다.
피부가 검게 변색됐다면, 조직의 괴사가 시작됐다는 뜻이니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마십시오.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했습니다.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질 않아요. 이미 늦었습니다.”
지켜보는 자들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정작 본인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제 손가락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이런 것보다 할아범께서 보낸 전갈을 확인하셔야….”
노을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러워! 늦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손을 써야 하잖아! 손가락, 안 내놓을 거예요?!”
노을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러곤 기다리지 않고 강제로 어스름의 손을 끌어당겼다.
“어, 엇?”
어스름이 당황하건 말건 노을은 손가락에 집중했다.
‘심각해…!’
예상보다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았다.
피부 곳곳이 검게 물들었고,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부러질 것만 같다.
손으로 만지자, 소스라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날 구하려고 이렇게까지….’
가슴이 울컥했지만, 지금은 감동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노을은 눈을 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떠올렸다.
‘……한기. 그래, 이것도 결국은 차가운 기운에 지나지 않아.’
그렇다면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다.
전 세대의 전사들을 뛰어넘는 현 세대의 재능.
윗대에선 너른 하늘만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세 명이 속성기를 연성하는 데 성공했다.
산, 안개걸음, 그리고 자신.
앞의 두 사람이 각각 뇌기와 화기를 전투에 활용한다면, 설산의 정수를 얻은 자신은 냉기를 다룰 수 있다.
그것도 훨씬 익숙하게.
‘이론일 뿐이지만 가능할 거야. 아니, 무조건 해내야 해!’
화기를 다룬다고 해서 불에 타죽지 않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냉기를 활용할 줄 안다고 추위에 면역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운을 끌어내고, 다루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노을이 까맣게 변색된 어스름의 손가락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피부, 혈관, 뼈…….’
느껴진다.
골수까지 스며든 한기가.
그건 생명 활동을 정지시킬 만큼 치명적이었다.
‘나와! 하나도 남김없이!’
자연기를 섬세하게 조율하여 도인(導引)한다.
피나는 고련으로 속성기는 언제든 뜻대로 발현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졌다.
그리고 설산의 힘이 깃든 자연기.
그 두 가지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스스스―
골수까지 치민 한기가 뽑혀 나온다.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자연기를 증폭시켜서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명확히 느끼는 건 어스름이었다.
“……!”
어지간한 일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내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잘라낼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던 손가락.
일생의 노력이 담긴 신체 부위가 회복의 조짐을 보이자, 심장이 뛸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괴사된 조직까지 살릴 순 없다.
그건 노을의 역량을 벗어난 일이었다.
회복할 가능성이 생긴 것만 해도 어딘가.
이 뒤는 기적의 능(能)이 허락된 술사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됐어! 됐다고…!”
가장 기뻐한 건 노을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도 잊고 펄쩍 뛰었다.
그러다가 억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봐요. 하니까 되잖아! 쓸데없긴 뭐가 쓸데없어요? 아저씨 손이 어떤 손인데 포기를 해?”
노을은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족장님. 이 은혜, 목숨을 다해 평생토록 족장님을 지키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어스름은 생각했다.
저 미소를 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거면 목숨을 걸 이유가 차고도 넘친다고.
노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갚긴 뭘 갚아요? 아저씨가 절 살렸는데 제가 갚아야지.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엄격한 표정으로 신신당부했다.
“알고 있죠? 한기를 뽑아낸 것뿐이라는걸. 최대한 빨리 여울 언니를 만나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여울은 완전히 아물어버린 흉터까지 없앨 정도로 뛰어나다.
그 덕에 성년식 기간 중에 생긴 징그러운 상처가 말끔해지지 않았나.
노을이 안개걸음을 돌아보며 말했다.
“걸음이 오빠. 이리 와 봐.”
“응? 저 말입니까?”
난데없는 부름에 안개걸음이 멀뚱멀뚱 다가왔다.
“오빠. 불 피울 수 있지? 그걸로 아저씨 손가락 좀 덥혀줘.”
당장이라도 승낙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안개걸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불을 피우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게….”
“……?”
안개걸음이 그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러다가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직 족장님만큼 속성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가 않아서……. 불벼락을 쓰는 바, 발에만 불이….”
“…….”
노을이 멍하게 있다가 피식 웃었다.
“모양이 빠진다 이거지? 무슨 상관이야. 불만 있으면 됐지. 불 쬐요, 아저씨.”
안개걸음이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발을 들어 올렸다.
화르륵 불이 오르자, 어스름이 그의 발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음……. 자세가 참 거시기하네요, 형님.”
“허, 허흠…. 그렇구나. 아무튼 고맙다.”
청년 전사들 중에서 가장 묵직한 분위기를 지닌 두 사람이 묘한 자세로 우정을 싹틔울 때, 노을은 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놓쳤다고?”
“예, 족장님. 백수교 잔당의 저항이 거세서 그만….”
노을과 옹개가 균열로 추락한 뒤에도 싸움은 계속됐다.
하지만 어스름이 빠졌고, 후방의 전사들까지 노을에게 달려가는 바람에 몰아치는 힘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이구나….’
물론, 그럼에도 와족은 이겼다.
하지만 맹신도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했고, 황보숭과 옥예린을 탈출시키기 위해 와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수투사라는 놈들은 물론이고, 수령사라는 고위 술사들까지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살아서 설산을 빠져나간 건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죠.”
몰살에 가까운 타격이었다.
노을이 얼굴을 찌푸린 건 하얀 깃을 빼앗겼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그게 말이 돼? 수령사의 우두머리야 그렇다 쳐도, 하얀 깃을 운반하는 놈들까지 놓쳤다고? 전사들은 전투화장의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흰 수리들이 있잖아? 녀석들이 제공권을 장악했는데도….”
그러자 칼바람이 답했다.
〔잡을 수 있었다. 놈들이 도망치는 내내 아버님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했지만, 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되찾을 수 있었어. 우리가 포기한 건 아버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하얀 깃의? 그게 무슨 말이야?”
노을이 의아해하며 묻자, 칼바람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큰 위협이 될 일을 막아야 한다고. 우리로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신 모양이야.〕
“그냥 두라고 했다고? 자신이 잡혀가는걸?”
듣고 보니 생각난다.
하얀 깃이 의지를 보낼 때,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하얀 깃은 그때 여인을 돌아봤어. 그녀와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에게 스스로 잡혀가다니…….
노을이 무슨 일인지를 고민할 때였다.
“족장님. 전투 중에 들어온 보고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영묘의 파손. 여울의 납치. 그리고 전대 전사들의 진격.
전투에 이어 설산의 균열로 추락하는 바람에 노을은 이제야 소식을 접했다.
“맙소사! 그걸 왜 이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 어찌하랴.
노을이 칼바람의 몸을 붙잡고 일어서며 외쳤다.
“움직일 채비를 갖춰! 몸은 가면서 회복해! 지금 당장 영인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