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 * *
부서지고 깨진 건물들.
아늑했던 산속의 마을은 절반 이상이 완파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시체가 나뒹굴고,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쫓아라.”
너른 하늘이었다.
그는 와족 전사들과 함께 흑전대를 전멸시킨 참이었다.
검은 경갑을 착용한 무인들이 공포에 절은 눈으로 죽어 있었다.
“이놈들 말대로라면 공지량은 급하게 움직였을 터. 흔적이 남아 있을 거다. 샅샅이 뒤져서 놈을 추적하라.”
도망쳤다고 놔둘 리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놈을 처단하리라.
너른 하늘은 다시는 악인을 살려두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사삭―
부상을 입지 않은 검은 수리들이 추적에 나섰다.
전투 화장의 시간이 다해 기진맥진한 전사들은 엎어진 채 쉬고 있었다.
그때, 여인이 깨어났다.
“아…!”
연녹색 옷과 앙증맞은 장신구들.
잎의 노래의 뒤를 이어 부족의 주술사가 된 여울이었다.
정신이 든 그녀는 시체로 뒤덮인 참상을 보고 흠칫했다.
하지만 납치됐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청년 전사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성장한 것이다.
여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움직였다.
“어머니 대지시여. 상처 입은 생명들을 치유하소서.”
술력을 펼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기력이 고갈된 자들의 원기를 북돋웠다.
치명상을 입어서 숨을 할딱이는 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술력의 깊이는 아직 잎의 노래에 비할 수 없지만, 침착함과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크게 뒤지지 않을 듯했다.
“깨어났구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행여 다친 곳이라도 있는지 여울을 꼼꼼히 살폈다.
“전 괜찮아요, 할아범. 구하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여울이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봤는지 손을 내밀었다.
“할아범도 다치셨네요. 손 이리 주세요.”
광공벽력포를 받아내다가 입은 화상.
푸른빛이 내려앉자 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허어…! 술력을 다루는 게 굉장히 능숙해졌구나.”
그믐이 감탄했다.
여울은 배시시 웃은 뒤에 너른 하늘을 바라봤다.
“족… 아니, 아저씨. 음… 장로님. 감사해요.”
이십 년 넘게 족장이라 불렀기 때문일까?
다른 이들과 달리 너른 하늘에게는 아저씨란 호칭이 영 어색하다.
그건 여울만이 아니라 청년 전사들 모두가 난감해하는 부분이었다.
“편히 아저씨라고 부르래도. 뭐 삼촌 이런 호칭도 좋다. 족장님, 장로님……. 왜 나만 항상 딱딱하게 부르는 거냐? 녀석들, 참.”
너른 하늘이 너스레를 떨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믐과 마찬가지로 여울이 다치진 않았는지 살폈다.
“노, 노력해 볼게요.”
어색하게 대꾸하던 여울이 흠칫했다.
너른 하늘의 팔뚝이 자상으로 덮인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저씨께 상처를 입힐 만큼 강한 사람이 있었나요?”
눈치로 보아 여울은 막지후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지량이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여울이를 넘겼다고 했지?’
너른 하늘이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여울은 경청하는 가운데 치유의 술을 펼쳤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듣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청년 전사들이 설산 쪽으로 갔다고 했죠?”
“그래. 마지막에 주고받은 연락에서 그리 들었다.”
여울은 눈을 감고 술력과 자연기가 전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없어요. 느껴지지 않아요. 설산 쪽에서 늘 감지되던 거대한 기운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하얀 깃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너른 하늘이 과거에 녀석과 싸우다가 남은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하얀 깃에게 변고라도 생겼단 말이냐? 엄청난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모를까, 어지간한 놈들에게 쓰러질 하얀 깃이 아니야. 녀석은 강하다.”
너른 하늘이 공언할 정도의 힘.
와족 전사들로서는 설산의 제왕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울의 기감이 틀릴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내가 보낸 전갈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답이 없는 걸로 보아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설마 공지량이 아이들을 노린 건가?”
그믐이 중얼댔지만,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방금 공지량과 응목대를 여기서 확인했으니까.
허나 중원에서도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백수교를 와족 전사들이 짐작할 방도는 없었다.
“형님. 공지량과 응목대의 흔적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놈은 북쪽으로 튀었습니다.”
추적을 지휘하던 매서운 눈이 다가왔다.
“여울이 덕분에~ 체력 회복 됐다아~.”
우둔한 땅도 전사들이 다시금 움직일 수 있음을 알려왔다.
“…….”
하얀 깃의 기운이 사라지고, 노을과 소식이 끊겼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 싶으면서도 너른 하늘은 자꾸 북서쪽으로 시선이 갔다.
‘지금 그쪽으로 가면….’
공지량을 놓친다.
그러면 그 미꾸라지 같은 놈은 숨어서 또 악랄한 계책을 짤 게 분명했다.
“……아이들을, 그리고 노을이를 믿죠. 공지량이 지척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놈을 놓치면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오겠죠.”
너른 하늘이 결단을 내린 순간, 전사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할아범. 전투가 벌어지면 여울이를 데리고 후방으로 빠지세요. 싸움은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어둔 날개도 함께 있을 테니 누가 오든 문제없어. 마음 푹 놓고 싸우거라.”
너른 하늘의 눈이 번쩍였다.
“악연의 끝을 보죠. 북쪽으로 갑니다.”
영인을 넓게 둘러싼 구릉.
와족 전사들이 북쪽 언덕에 서 있었다.
그믐이 발아래 펼쳐진 평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부터 사천이다.”
그저 쭉 이어진 풍경일 뿐인데, 그렇게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한족에 의해 구분된 영역.
그믐을 제외하면 여기까지 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아도 여기를 지났겠구나.’
이 길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간 자가 그믐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너른 하늘이 운남으로 달려오고 있을 마른 비를 떠올릴 때였다.
“웃기는 일이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뛰는 건지. 난생처음 운남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구려.”
매서운 눈이 평야를 넓게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전사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심호흡을 하며 가벼운 흥분을 달랬다.
“나도 그렇구나.”
중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지량 때문에 여길 오게 될 줄이야.
“적과 싸우기 위해 온 것임을 잊지 마라. 각오를 다지도록.”
너른 하늘이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가자.”
와족의 전사들이 마침내 사천의 경계를 넘었다.
첫 전투는 사천에 접어들자마자 벌어졌다.
평야 한복판에 듬성듬성 모여 있는 수백 명의 무인.
옷도, 무기도 통일되지 않은 그들에게선 자유분방함이 물씬 묻어났다.
좋게 말해서 자유분방함이지, 사실 엉망진창이었다.
“왔다! 저놈들이다!”
한 놈이 외치자 모두가 와족 전사들을 돌아봤다.
“허…! 진짜 야만인 놈들이 쳐들어왔잖아?”
“세상이 어지러우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군. 근데… 병력이 저게 전부야? 중원이 우스운 모양이지?”
“의뢰인 얼굴이 궁금하구만! 저깟 놈들을 잡는데 그렇게 큰돈을 쓴다고?”
“크큭. 이거 완전 거저먹긴데? 야, 이 원숭이들아! 누가 대장이냐? 앞으로 나와라!”
겉모습만큼이나 규율도 개판이었다.
아니, 아예 그런 게 없는 듯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놈들은 개중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자들이었는데, 전체를 총괄하는 지휘자도 없는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다.
“뭐냐? 저것들은?”
너른 하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들을 기다린 걸로 볼 때 공지량이 끌어들인 놈들인 건 확실한데, 앞의 두 집단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혈조단이나 흑전대는 명확한 체계가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강했다.
자신이나 그믐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들 만큼.
하지만 이놈들은….
‘엉망이다. 체계, 진형, 전술, 아무것도 없어. 그냥 우르르 몰려왔을 뿐이야.’
심지어 강자도 없다.
수백 명 중 힘깨나 쓰는 놈이 와족 평전사의 수준에도 못 미쳤으니까.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그토록 영악하고 철저한 놈이 왜 이런 놈들을 준비한 거지?
“끼요오옷! 내가 죽일 거다! 내가 목을 딸 거야! 다 비켜라!”
“케헤헤! 딱 보니까 네가 대장이구나! 목을 내밀어라! 야만 원숭아!”
너른 하늘은 생각하는 걸 멈췄다.
고민해도 어차피 알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상대를 가늠할 능력도 안 되는 하룻강아지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뻐어억―!
일격에 다섯 놈을 처 죽이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너른 하늘은 적들이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수준이 어떻든 먼저 칼을 겨눈 놈들이다. 모조리 죽여라.”
와족 전사들이 몸을 날린 뒤에야 적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 자, 잠깐!”
“들은 것과 다르잖아?! 이놈들, 강해! 우,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컥!”
수백 명이 몰살하는 데는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믐이 적들의 복장과 무기를 훑어본 뒤에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낭인인 듯하구나.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도는 자들이지.”
그믐이 낭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용병처럼 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건 같다. 하지만 이들은 훨씬 자유분방한 편이야. 좋게 말했을 때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뜨내기들이지. 실력도 들쭉날쭉하고, 성향도 제각각이다.”
흑상과 용병단에 이어 운남에서 빠져나간 자금의 마지막 사용처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앞의 두 집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기 때문에 일 할에도 못 미치는 자금으로 수백 명을 고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공지량이 왜 이런 뜨내기들을 불러들였냐는 것이었다.
“알 필요 없겠지. 앞을 막는 놈들은 모조리 부순다.”
개활지를 지나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공지량은 평야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건 높다란 산길로 이어졌다.
“운남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산세가 상당히 험하군요.”
너른 하늘의 말에, 그믐이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사천은 오래전 촉(蜀)이라는 한족의 나라가 들어섰던 곳이다. 초대 황제는 신하의 조언을 따라 중원에서 여기까지 내려와 나라를 세웠지.”
그믐이 서적에서 읽은 소열제 유현덕의 고사를 떠올렸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사천은 험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이야. 촉나라가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지.”
과연 그럴 만하다.
운남이 아니고선 이토록 험한 산을 보기 힘들 테니까.
‘산속에 무언가 준비를 해놓은 건가?’
너른 하늘이 공지량의 의도를 짐작할 때,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진짜 왔다! 야만인 놈들이야!”
“죽여! 목 하나만 따도 한 달은 놀고먹을 금액을 벌 수 있어!”
이들 역시 낭인이 분명했다.
와족은 멈추지 않고 파죽지세로 적들을 격파했다.
“컥! 카악…!”
“이, 이럴 수가! 속았다! 이런 괴물들이란 이야기는 없었…!”
그렇게 오 일 동안 일곱 번의 전투를 더 거치며, 와족은 전속력으로 산길을 주파했다.
그동안 와족이 목숨을 빼앗은 적은 자그마치 구백 명에 육박했다.
오 일째 아침을 맞아 일출이 떠오를 때, 시야가 트였다.
휘오오오―.
사방에서 불어 내린 산풍이 휩쓰는 땅.
붉은빛을 띠는 사암이 지반 전체를 구성한 곳이었다.
적색분지(赤色盆地).
와족은 마침내 그곳에서 숙적과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