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89화 (389/463)

389화

천루

『“묻지 않았으면 좋겠군.”

허름한 모옥.

짚으로 지붕을 인 초라한 집이었다.

낡아서 한쪽이 주저앉아 버린 툇마루에 늙수그레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거든.”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왼쪽 무릎 아래가 휑한 데다 오른팔 소매도 축 늘어져 있다.

소매와 바짓단 사이로 비치는 절단의 흔적.

표정으로 볼 때 스스로 잘라낸 게 분명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노인이 툭 뱉었다.

“살려면 어쩔 수 없었네. 절반 이상이 잘려서 덜렁댔거든. 끊어내고, 동여매는 게 최선이었어. 판단이 조금만 늦었다면 나 역시 거기서 뼈를 묻었겠지.”

삭월이 설립되기 전, 모태가 됐던 조직.

월주께서 월주라 불리기 전, 루주라 불리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다.

월주를 흠모하여 그를 따라나선 하오문의 정예들.

삭월의 초창기 구성원인 그들은 ‘동월루’라는 조직을 세웠고, 한창 힘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이 불과 두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으니…….

무림사의 굵직한 사건 중 하나인 수왕의 남하를 도우면서였다.

눈앞에 있는 노인은 당시 운남에 진입했던 동월루의 요원들을 지휘했던 조장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선배님. 무례를 용서하시길.”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팔다리를 잃었고, 그로 인해 미래를 잃었다.

전 동월루 첩보대 1조장 방사윤은 루주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떠났으며, 여생을 책임지겠다는 것마저 거절했다.

그런 사내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지 못한 건 불찰이었다.

“오해하고 있군.”

“……?”

모옥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노인의 말이 발길을 붙들었다.

“내가 지금껏 괴로워하는 건 신체의 일부분을 잃어서가 아닐세.”

“말씀,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공손한 자세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방사윤은 혼자 읊조리는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좀 더 뛰어났다면, 좀 더 강했다면 응목대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을 거야. 내 부족함 때문에 전우들을 잃었지. 그게 내가 지금껏 괴로워하는 첫 번째 이유일세.”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오른 걸까?

노인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둘째는 루주의… 아니, 지금은 월주라 불리겠군. 그분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하지 못했단 거야. 그런 내가 무슨 염치로 그분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나. 교관직 제의와 보상을 거절한 건 그 때문일세.”

처음엔 듣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그건 선배님께서 지나치게 자책하시는 겁니다! 당시 훨씬 큰 조직이었던 개방도 낭패를 겪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들었…!”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어려운 상황이었지. 지형이 낯선 건 물론이고, 숫자와 무공에서까지 밀렸네. 허나 그건 변명일 뿐이야. 내가 적보다 뛰어났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마치… 그 남자처럼.”

방사윤의 눈이 아련해졌다.

먼 과거의, 하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광경을 회상하는 듯한 눈빛.

그의 기억은 불꽃처럼 타올랐던 한 사내를 그리고 있었다.

“그 남자라시면?”

회상에서 깬 노인이 또박또박 말했다.

“적색분지의 대회전. 그 처절했던 핏빛 전쟁을 난 똑똑히 보았네. 하늘이 내린 사내…… 누구도 믿지 못할 전설적인 무위를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사윤이 은거를 택한 세 번째 이유가 지금 언급한 사내와 연관이 있다는걸.

“진로, 동선, 정보가 전파된 시점, 병력의 이동과 변수까지. 모든 게 간발의 차로 어긋났어….”

그는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결과 한 놈의 농간에 모두가 놀아나고 말았지.”

그 ‘한 놈’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내가 혼세록의 초안이 된 무림 서사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릴 때, 노인이 말했다.

“월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들었네. 그분의 능력을 알면서도 과거엔 그저 허황된 꿈이라 여겼지. 그게 결국 현실이 되어가는군.”

방사윤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아련함과 흡족함, 그리고 아쉬움.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과, 걸출한 사내를 모셨다는 자부심, 그리고 그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분명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그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예? 아… 그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선배님께는 아픈 기억일 텐데….”

방사윤은 손을 들어서 내 말을 잘랐다.

“폐인이 된 내가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겠지. 말해주겠네.”

“……!”

그로부터 밤낮이 두 번 바뀔 동안, 나는 현장에 있었던 요원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혼세록 대담 편

「전(前) 동월루 첩보대 조장 방사윤」

삭월 월목대원 태인 저

붉은 사암으로 뒤덮인 대지.

산에서 내려다보는 적색분지는 인간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너른 하늘이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분지에 포진한 수백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그러자 굉장한 기세가 엄습했다.

날카롭고, 삼엄하며, 촘촘한 동시에 강인하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낭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부류.

크게 네 무리로 나누어진 무인들은 눈빛만으로도 인간을 옭아맬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

허나 너른 하늘은 수백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누군가를 찾을 뿐이었다.

수백 명의 얼굴을 눈으로 훑은 끝에, 그는 마침내 찾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 있었구나. 여기냐? 네가 스스로 정한 무덤이?』

언령이 분지를 뒤덮었다.

산에서부터 밀어닥치는 기파.

분지에 모인 자들이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음……. 이건…!”

“……아무래도 공 장문인의 말이 사실인 것 같구려.”

“그런 것 같소. 저런 엄청난 자가 있다니…!”

하지만 놀람의 정도는 생각보다 미미했다.

너른 하늘과 와족에 대해 충분히 전해 들은 느낌.

분지에 모인 무인들이 이를 깨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네 덩이로 뭉친 자들은 집단별로 기운을 응집했고, 어깨를 짓누르는 야수 제어의 위압을 견뎌냈다.

이 역시 지금껏 보지 못한 조직력이었다.

“이건… 상당하구나. 이게 놈이 준비한 최후의 패인가.”

그믐이 너른 하늘의 옆에 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힘이나 조직력도 놀랍지만, 그를 가장 의아하게 만든 건 적에게서 전해지는 기운이었다.

“삿된 느낌이나 어두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용병도, 낭인도 아니야. 이건…!”

정대하면서도 올곧은 기상.

봉검이나 운검, 여휘 같은 남자들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다.

한평생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바른길을 추구해온 자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적색분지에 모인 건 정도의 문파들이 틀림없었다.

“헉! 허억…!”

그때, 거친 숨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사내 한 명이 우측 능선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와족과, 공지량이 끌어들인 무인들이 첨예한 대치를 이루는 가운데, 허겁지겁 달려온 중년의 사내가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자, 잠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

너른 하늘이 눈으로 누구냐고 묻자, 사내가 얼른 대답했다.

“동월루 첩보대 1조장, 방사윤이라 합니다! 저들과 싸워선 안 됩니다! 저들은 적이 아니에요!”

“동월루?”

너른 하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믐이 나섰다.

“수리와 달이가 몸담은 조직이다. 백강, 그 친구가 수하들을 보낸 모양이로군. 한데 적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방사윤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음……. 노사, 정파에 대해 아시지 않습니까? 저들은 사천에 위치한 구파일방의 구성원들입니다.”

“……!”

그믐이 흠칫하자, 방사윤이 빠르게 말했다.

“청성, 아미, 당가…. 사천을 주름잡는 최강의 문파들이지요. 그중에서도 각 집단을 대표하는 정예들이 몰려나왔습니다.”

그렇게 셋.

나머지 한 무리는 말할 것도 없이 공지량이 이끄는 응목대였다.

방사윤이 초조한 얼굴로 적색분지를 힐끗거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지량이 저들을 여기까지 불러냈습니다! 정사대전에도 내보내지 않은 노른자위 전력을요!”

그리고 덧붙였다.

“심지어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문인, 당가의 가주까지 나와 있습니다. 새로 선출된 당가주는 몰라도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은 그릇된 행동을 할 분들이 아니에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절대 싸워선 안 돼요!”

응목대뿐인 점창은 빼더라도 정파를 대표하는 세 개의 무력집단이 힘을 합쳤단 뜻이 아닌가.

그믐은 이제야 공지량이 상대도 되지 않는 낭인들을 배치한 이유를 깨달았다.

“……일부러 던져준 거군. 저들을 끌어내기 위해.”

그 외에도 무수한 밑 작업이 있었겠지만, 결정적으로 구백 명의 인간을 죽인 일이 저들을 움직인 게 틀림없다.

정사대전으로 경각심이 극에 달한 이때, 갑자기 사천 끄트머리에 나타나 학살을 벌이는 정체불명의 야만인들.

사정을 모르는 청성과 아미는 기겁을 하며 달려 나왔으리라.

거기에 공지량이 누명을 씌우고, 당건휘가 거짓 증언을 하며 말을 거들었다.

그 결과, 사천 최강의 무력집단들이 와족을 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자그마치 구파일방 셋과 당가가 힘을 합쳤습니다! 이길 수도 없지만, 저들과 부딪히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요! 절대 싸워선 안 됩니다!”

방사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절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월루의 모든 걸 쏟아부어 수왕과 와족을 돕고 있는데,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설마 청성, 아미, 당가가 움직일 거라고는 백강조차 예상치 못했다.

이들을 확인한 순간, 방사윤은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고, 충돌을 말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라….”

너른 하늘이 분지에 밀집한 자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상황을 되짚듯이 중얼거렸다.

“먼저 칼을 겨눈 건 공지량이 아닌가. 영묘를 훼손하고 여울이를 납치한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뒤이은 한마디는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이었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물러설 수 없다. 나는 오늘 기필코 공지량의 머리통을 부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방사윤을 돌아보며 웃었다.

“우릴 도와주어 고맙네. 나 또한 불필요한 피를 볼 생각은 없어. 우선 공지량을 넘겨 달라고 말해보겠네.”

“그, 그런 요구를 들을 리가….”

너른 하늘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힘으로 빼앗을 것이네. 이길 수 없다고 했나? 똑똑히 지켜보게. 우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뭉클뭉클 번지는 기파.

와족의 정예와 그들의 반려수가 너른 하늘의 뒤를 받치며 길게 늘어섰다.

“우린 공지량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으며, 우릴 막는 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백 명이 채 되지 않는 전력이다.

반려수까지 합쳐도 이백에도 못 미치는 숫자건만, 와족의 기세는 적색분지를 갈아엎을 것만 같았다.

패배?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정파의 무인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가운데, 전사들이 걸음을 옮겼다.

여울과 함께 뒤에 남은 그믐이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조심하거라. 아버지 하늘이시여……. 부디 저들을 굽어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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