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한 걸음, 또 한 걸음…….
와족은 서둘지 않았다.
당당히 허리를 편 채 평범한 사람이 걷는 속도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산을 내려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건 정파 무인들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여유롭다. 자칫하면 구파의 셋과 당가를 상대로 싸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중원의 인물들이 아니라서 우리를 모르는 건가?’
‘강하다! 한 명 한 명이 그야말로 최정예…! 본파의 청운검대(靑雲劍隊)에게도 밀리지 않아. 이런 자들이 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저건 뭐야? 짐승? 설마 야수들을 거느리는 건가? 잠깐만… 최근에 이름을 날리는 수왕이란 자도 짐승을 데리고 다닌다고 했는데?’
청성파와 아미파의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당가는 와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은비대와 장로들이 정사대전에 참전한 상황.
당건휘가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당가의 무인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이상하구려.”
긴장감과 의문이 극에 달한 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진영의 후방에 서 있는 네 사람.
그중 청색 무복을 입은 노인이 입술을 열었다.
“살육에 미친 야만인들이라 하지 않았소? 허나 저들에게선 악기가 느껴지지 않는구려. 기상은 정대하며, 품고 있는 기운은 청정수처럼 맑고 깨끗하오. 악인은 절대 이런 느낌을 줄 수 없소이다.”
노인이 가슴까지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일흔 살에 가깝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으며, 목소리부터 손짓 하나하나에서 품격이 묻어났다.
검을 쥐고 있지만 않았다면 깊은 산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는 도인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면서도 잘 벼린 칼날 같은 기세를 지녔으니, 어디에 있든 대번에 주목을 받을 남자였다.
청성파의 번영을 이끈 장문인이자 절정의 검객, 청운진인(靑雲眞人)이었다.
“동의해요. 무척이나 사납지만, 저들에게선 삿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점창 장문인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머리를 깨끗하게 민 여인이었다.
세월이 선사한 주름과 연륜이 깃든 목소리.
문파의 구할 이상이 여승들로 이루어진 아미파의 장문인, 금정신니(金釘神尼)였다.
그녀는 사 년 전 마른 비와 인연이 닿은 월연의 스승이었는데, 눈빛에서 아득한 현기가 느껴졌다.
두 거물이 의아함을 표하자, 공지량이 허둥지둥 외쳤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악랄한지는 직접 겪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이걸 보십시오!”
공지량이 소매와 바짓단을 걷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긁고 지나간 흔적.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상흔이었다.
“저놈들은 사 년 전에 가만히 있는 본파를 공격하여 수백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족장이란 자는 격전 끝에 제 사지근맥을 끊어놓았지요!”
“사 년 전? 점창이 저들과 전쟁을 벌였단 말이오?!”
“장문인의 사지근맥을 끊었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알려지지 않은 거죠? 아니, 그전에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지금 멀쩡히….”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경악하여 말을 더듬었다.
공지량은 그들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심대한 타격이었지요……. 본파는 그로 인해 봉문한 것과 다름없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것은 저 야만인들이 나중에라도 올바른 길을 걷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공지량이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의 일이 알려지면 저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탄을 받는 건 물론이고,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혀 중원의 문파들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겠죠. 저는 저들이 죄를 뉘우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공지량이 상처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사지근맥이 잘리고, 단전까지 깨진 제가 어떻게 회생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괴의! 화 선배님께서 저를 고쳐주셨지요. 그분께서도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공지량은 원래 몸이 낫는 대로 화통달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는 전쟁의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놓쳤다.
자신이 개심했다고 믿고 마음을 놓은 줄 알았는데, 그 여우 같은 늙은이는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괜찮다. 몽념이 기습으로 중상을 입혔다고 했어. 그 몸으론 야수들이 날뛰는 운남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가 나중에 무슨 말을 하든 와족은 세상에서 지워진 후일 테니까.
금광을 먹고, 점창을 ‘정상화’시켜서 권력을 되찾으면 공지량은 어떤 비난이 쏟아지든 무마할 자신이 있었다.
힘만 있다면, 정사대전까지 발발한 상황에서 점창을 밀어낼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공지량이 바쁘게 머리를 굴릴 때, 탄성이 터졌다.
“괴의…! 과연. 그라면 그토록 중한 상처도 회복시킬 수 있겠지요!”
“몇 년간 신의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는데, 장문인을 돌본 것이었구려!”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여 혼을 빼놓는다.
그리고 구 할의 진실 속에 교묘히 거짓을 섞는다.
공지량은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놨다.
“제 실수였습니다. 금수나 다름없는 자들이 인간이 되길 바란 건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았어요. 저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며, 운남에 들어온 중원의 첩보조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죽이기 위해 사천까지 쫓아올라왔죠.”
공지량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정도의 길을 걷길 원하는 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들은 떠돌이부터 거지, 낭인, 용병과 같이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었죠. 사정을 들은 이들이 저를 돕기 위해 왔지만….”
공지량은 아예 목 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결국…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구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저 멀리 와족 전사들이 산을 내려오는 가운데, 공지량의 목소리가 분지를 울렸다.
“그런 일이…!”
“살해당한 자들이 장문인을 돕기 위해 온 것이었소?”
구백 명의 몰살.
그들이 누구든 간에 끔찍한 참상이다.
금정신니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며 말했다.
“자, 잠깐만…!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걸로 보아 저들은 수왕의 식구가 아닙니까? 연이가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맑고 순수한 청년이었다고….”
청운진인도 말을 거들었다.
“송이도 마찬가지요. 그 녀석이 처음 만난 사람을 호형호제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한 건 수왕이 유일했소. 세간에 퍼진 소문도 수왕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친교를 다질 뿐 정파인의 기질에 가깝다고….”
월연과 청송.
도강언에서 마른 비와 만나 인연을 쌓은 그들은 각자의 스승에게 소감을 전했다.
마른 비의 출중함과, 그가 충분히 믿어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들이 여기에 있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검후로 선출된 월연과 청성파 검대의 대주가 된 청송은 정사대전에 나가 있었다.
설령 그들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바로 당건휘의 존재 때문이었다.
“수왕이 이름을 알리기 전, 본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북벌 때도 보았고, 그래서 그에 대해 잘 아는 편이지요.”
침묵을 지키던 당건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수왕은 분명 악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행보는 정파인에 가깝지요. 허나 잊어선 안 됩니다. 그가 마교도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음……. 마교…!”
“분명…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구려.”
당건휘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수왕이 어떻든 그건 개인의 성향일 뿐, 그의 부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쩌면 저들이 싫어서 중원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식구를 버리고 홀로 중원을 떠돌 리 없지 않습니까?”
점창 장문인과 당가의 가주.
확실한 아군들이 정체불명의 야만인을 적으로 지목한다.
직접 겪은 바를 토대로 말이다.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는 와족에게서 전해지는 맑은 기운에도 불구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그사이, 와족은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막강한 기운을 흘렸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살기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으, 크윽…!”
공지량이 사색이 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게 야만인들의 선두에 선 남자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청나구나…!’
청운진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야생의 살기를 담은 두 눈.
푸르게 번쩍이는 눈빛이 주변의 풍경을 집어삼켰다.
야만 부족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터무니없는 존재감으로 자신 이외의 존재를 모조리 지워버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너는 항상 이런 식이구나. 무고한 이들을 앞에 세우고, 쥐새끼같이 뒤에 숨어 있어.』
두쿵―!
순간, 정파 연합군은 현기증이 일었다.
근거리에서 가해진 너른 하늘의 언령은 심장을 쥐어짤 것만 같았다.
『자라날 아이들과 서로의 미래를 위해 자비를 베풀었다. 한데 또 이런 짓을 벌여? 겨우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한 점창의 식구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단 말이냐?』
가중되는 압력!
혼백을 찢어발길 듯한 살의…!
보고도 믿기지 않는 존재감이다.
정파 연합군이 저도 모르게 검을 빼 들었다.
그건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의 생존본능이었다.
『중원인들에게 고한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공지량에게 있으며, 우린 전쟁을 원치 않는다. 놈만 내준다면 우리가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살기가 잦아들었다.
너른 하늘은 방사윤의 조언을 떠올렸고, 당장이라도 공지량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은 걸 눌러 참았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설명해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는 답답함에 가슴이 터지더라도 인내할 준비가 돼 있었다.
『공지량. 앞으로 나와라. 내 손에 죽는 게 싫다면, 깨끗이 자결해라. 너를 갈가리 찢어놓고 싶지만, 무고한 이들이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 거기까진 눈감아주겠다.』
너른 하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성파와 아미파의 무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피에 미친 야만인이라고? 저자가?’
‘천검? 패군? 아니면… 천마나 오스트갈? 안 돼! 누구도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자를 능가할 무인이 떠오르지 않아!’
‘그런데도 싸움을 피하기 위해 자제하고 있다!’
‘이런 자가 학살을 저질렀다고? ……아냐.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청성과 아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수장을 돌아봤다.
청운진인과 금정신니 역시 같은 생각인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너른 하늘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고, 대화를 위해 한 발짝 나설 때였다.
「뭐 하고 있나! 당장 나서지 않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전음이 적색분지를 가로질렀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사내가 입술을 깨물며 나섰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비통하게 외쳤다.
“너 이 야만인 놈! 그때의 짐승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군자인 척하느냐?! 네가 범하고 죽인 내 딸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손쓸 틈도 없었다.
응목대원이 검을 뽑으며 날아올랐다.
“소연이의 원수! 죽어라아아!”
“이게 무슨?!”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너른 하늘은 분노에 눈이 뒤집힐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응목대원의 검을 튕기는 동시에 그의 목을 붙잡았다.
“컥…!”
“이게 무슨 짓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공지량이 시키더냐?!”
응목대원이 부들부들 떨었다.
코앞에서 너른 하늘을 마주한 그는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말해라! 진실을 말하란 말이다!』
야수 제어.
강렬한 위압이 사내의 정신을 짓눌렀다.
공포에 질린 그가 뭐라고 입을 열 때였다.
“저것 보아라! 저 뻔뻔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저것이 놈의 실체다! 당가의 가솔들이여! 지금 당장 점창의 제자를 구하라!”
당가 무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를 깨물더니 땅을 박찼다.
틱! 티틱! 틱! 화아악―!
당건휘가 양손 엄지를 튕기는 순간, 독구름이 와족을 뒤덮었다.
“이, 이런…! 이게 무슨 짓인가?! 멈추시게!”
청운진인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할 때였다.
“뭣들 하고 있나?! 동료가 죽을 판인데 구경만 할 것이냐? 쳐라!”
공지량의 목소리가 청운진인의 외침을 덮었다.
그러자 응목대가 일제히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