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죽어라! 사형의 원수!”
“너희가 토막 낸 막내는 일곱 살이었다! 아직 피지도 못한 아이를 어떻게…!”
“금수만도 못한 놈들! 곱게 목을 내밀어라!”
응목대는 저마다 한마디씩 외치며 와족에게 달려들었다.
핏발 선 눈과 원통함이 담긴 목소리.
누가 첩보 조직 아니랄까 봐 연기력 하나는 일품이었다.
너른 하늘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매서운 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형님!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힙니다! 공지량, 그 약은 놈은 전부 대비를 해놨을 거예요!”
매서운 눈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형님! 결단을…!”
녹색 무복을 입은 당가의 무인들과 검은 옷의 응목대가 썰물처럼 쇄도했다.
와족 전사들도 자연기를 끌어올리며 너른 하늘을 바라봤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가!’
너른 하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응목대원의 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와족! 응전하라!”
명이 떨어진 순간, 누르고 눌러온 전투함성이 터졌다.
『오오오오!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네놈들, 착각하지 마라! 형님 때문에 참았을 뿐, 너희를 때려죽이고 싶은 건 우리 쪽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 전부 죽여 버려!』
사람을 지키고, 불필요한 피를 보는 걸 싫어할 뿐, 와족의 본질은 전사다.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남은 전투 민족.
너른 하늘의 결정이 옳다고 믿기에 따랐지만, 그들의 가슴엔 씻기지 않은 분노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먼저 칼을 들이민 놈들이 어디서 억울한 척이냐! 전부 때려눕혀서 무릎 꿇린 뒤에, 네놈들의 입으로 진실을 듣겠다!”
가장 먼저 치고 나간 건 매서운 눈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분을 쏟아내지 않으면 열이 뻗쳐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투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솟구쳤다.
“개새끼들! 싹 다 뒈져버려!”
퍼버버버벅!
손과 발이 무한의 권각을 쏟아낸다.
그의 속도를 적들이 잡아낼 리 없었다.
푸른빛이 번쩍인 순간, 매서운 눈은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컥…!”
“크아악!”
“뭐, 뭐냐?!”
먼저 달려들었으나 선공을 얻어맞은 상황.
응목대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아우우우!”
그건 그들의 실수였으니,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두 번째 빛이 번쩍였다.
부아아악―!
너무나 선명해서 소름이 끼치는 절단음.
응목대 최전선이 사선으로 잘렸다.
후드득 무너지는 풍경 끝에는, 입가에 묻은 피를 핥는 자줏빛 늑대가 있었다.
“하독하라!”
응목대가 박살 나는 와중에 들려온 소리였다.
눈을 돌리니 오색빛깔의 구름이 전선을 뒤덮고 있었다.
푸르고, 희며, 검붉은 데다 새카맣다.
당가는 자신들이 지닌 독을 모조리 쏟아부었고, 그건 생명체를 핏물로 녹여버릴 절독의 구름이었다.
하지만….
“뭐야, 이건? 이놈들, 독도 쓰나?”
“가지가지 하는군. 약하니까 이런 걸 쓰는 거겠지.”
“쿨룩, 쿨룩! 카악~ 퉤! 그래도 제법 매운걸?”
아동기(兒童期)부터 청죽사를 씹어 먹으며 형성된 내독성.
와족 전사들에게 독이 통할 리 없었다.
바위 곰 전사들이 웅성거릴 때,
투콰아아앙!
당가의 최전선이 터져 나갔다.
폭음의 정체는 그들보다 머리 두세 개는 큰 거인이었다.
주먹 한 방으로 일곱 명을 날려버린 우둔한 땅이 양팔로 적들을 끌어안았다.
“어, 어엇?!”
“놔라! 이게 뭐 하는 짓…?!”
푸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어 터뜨려버렸다.
인간을 터뜨린다는 비현실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당가의 무인들은 얼어버렸다.
“저,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럴 수가! 명아야! 크흐흑…! 괴물 놈, 죽여 버리겠다!”
슬퍼할 틈이 있는가?
그들은 입을 놀릴 시간에 발을 움직였어야 했다.
독이 안 통한다는 걸 깨달은 당가가 비수를 뽑는 순간, 웅장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빠오오오오!”
거수의 코가 휘둘러졌다.
장정의 팔뚝보다 두꺼운 채찍이 마당을 쓸 듯 당가의 무인들을 날려버렸고, 날카로운 상아가 적들을 꿰뚫었다.
긴 코는 개미를 짓밟듯이 당가의 무인들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짓이겨버렸다.
“당하고만 있을 것이냐?! 반격하라!”
은빛 비수가 하늘을 날았다.
긴 코는 놓치려야 놓칠 수 없는 표적이었고, 삼백여 자루의 비수가 하나도 빠짐없이 적중했다.
따다다당! 투퉁―! 티티팅!
문제는 긴 코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는 것.
당가는 사 년 전의 공지량이 그랬듯이 강노 같은 공성병기를 준비하거나, 흑전대처럼 무기 하나하나에 돈을 처발랐어야 했다.
평범한 비수 따위에 긴 코의 피부가 뚫릴 리 만무하니까.
“뿌아오오~!”
길게 뽑아내는 울음소리.
철 기둥 같은 두 발이 하늘로 들리자, 당가의 무인들이 넋을 놓았다.
“마, 맙소사….”
투콰아아앙―!
미처 피하지 못한 십여 명이 육포가 되어 으스러졌다.
붉은 대지가 그보다 짙붉은 피로 채색됐다.
콰르르릉―!
허나 긴 코의 목적은 살육이 아니라 아군의 난입을 돕는 데 있었으니.
방사형으로 번지는 균열이 적들의 신체 균형을 흔들었다.
“어엇?!”
“주, 중심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적들이 휘청하는 순간, 와족 전사들이 들이쳤다.
“진형 따윈 필요 없다! 힘으로 뭉개라!”
거친 모래의 함성이 뿜어지고, 바위 곰의 기예가 작렬했다.
바위 부수기, 산 허물기, 거목 쪼개기…!
거한들이 쏟아낸 일격은 당가의 진형을 통째로 부숴 버렸다.
“크악…!”
“아아아악!”
차라리 응목대였다면 피해가 덜했을 텐데.
바위 곰의 강격 앞에서 비수는 이쑤시개나 다름없었다.
육신의 강도는 애초에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당가의 무인들은 피를 뿜고, 하늘을 날며 양측의 무력 수준이 다르다는 걸 몸소 증명해 주었다.
“크아아앙!”
“커허헝!”
“샤라라락…!”
와족 전사들의 영혼의 벗.
반려수들까지 따라붙자, 전장은 완전히 와족의 놀이터로 바뀌어버렸다.
“장문인! 이대로 두고만 봅니까?!”
“저대로 두면 전멸합니다! 속히 하명을…!”
청성과 아미의 제자들이 수장들을 재촉했다.
당가는 은비대가 빠진 상태고, 점창 역시 전면전이 가능한 전력은 전부 정사대전에 파견되었다.
반면 청성과 아미의 주력 검대는 여기에 있다.
당장 돕지 않는다면 전부 뼈를 묻을 상황.
사정이 어찌 됐든 전투가 시작된 이상 아군이 몰살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
침묵 속에 전황을 지켜보던 청운진인이 입술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구나. 청성파의 제자들은 검을 들라.”
금정신니도 자파의 제자들에게 명했다.
“아미타불. 적들이 너무도 강하구나. 이대로 두면 아군이 몰살할 터. 일단 저들을 무력화한 뒤에 사태를 해결하자꾸나.”
청성의 청풍각(淸風閣)과 아미의 복호전(伏虎殿).
각파를 대표하는 정예들이 검을 뽑는 순간이었다.
스산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너희는 공지량을 내줄 리 없어.”
막강한 기운이 응집된 뒤꿈치.
응목대를 돌파한 매서운 눈이었다.
그는 청성과 아미가 참전하리라 예상했고, 청풍각이 움직일 조짐을 보이자 재깍 달려들었다.
“싹 다 뒈져라.”
꽈르르릉―!
매서운 눈이 창안한 필생의 절기가 청성 무인들을 덮쳤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불벼락이 내리꽂혔고, 전투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십여 명이 쓸려나갔다.
“너희들, 여인이지만 훌륭한 전사다. 악감정은 없다. 전장에서 만났으니, 이해하길.”
매서운 눈이 청성파를 쳤다면, 우둔한 땅은 아미파에게 돌진했다.
다른 게 있다면 기습에 성공한 매서운 눈과 달리, 우둔한 땅은 아미파 무인들에게 훤히 노출됐다는 점이었다.
“적은 느리고, 크다! 둘러싸고 검을 꽂아라!”
아미파 복호전 무인들이 움직였다.
전원이 여승인 그들은 힘보다는 정교한 검격에 특화되었으며, 노을처럼 급소를 노려서 적을 침몰시키는 게 장기였다.
“하압!”
복호대라검(伏虎大羅劍),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에 이어 수미혜심검(須彌慧心劍)까지…!
아미를 구파에 올려놓은 비전 절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교하면서도 사납게 몰아치는 검술.
불가의 문파답지 않게 실전적인 검이 우둔한 땅의 전신요혈을 노렸다.
피피핏― 촤악! 스가각!
강피가 찢기고, 살점이 튄다.
우둔한 땅은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주먹으로 턱과 얼굴을 가린 채 수십 번의 공격을 견뎌냈다.
그리고 검격이 잦아드는 순간, 발을 내디뎠다.
쿠웅!
그가 전진하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쐐애애액―!
우둔한 땅답지 않게 재빠른 움직임.
그는 자세를 낮춘 채 여승들 사이를 파고들었고, 왼 주먹과 오른 주먹을 번갈아 쏟아냈다.
퍼버버버벅―!
얕지만, 쾌속한 연타다.
워낙에 무겁고 힘이 세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스치기만 해도 아미파 여승들은 펑펑 나가떨어졌고, 제대로 맞으면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산이 성년식이 끝난 시점부터 죽어라 연습해온 대인 전투자세.
주먹으로 인간을 때려눕히기 위해 만들어낸 투술의 완성형이 거기에 있었다.
“함부로 달려들지 맛! 대장로님에 필적하는 무위다! 숫자와 진형으로 압박해!”
혼비백산한 아미파가 훌쩍 물러나며 거리를 뒀다.
청성파 역시 굳게 뭉쳐서 매서운 눈이 파고들 틈을 없애며 진형을 짰다.
“칫! 열 명 정도는 더 눕혔어야 했는데….”
매서운 눈이 아쉬운 어조로 투덜댔다.
그러곤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이 이상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우둔한 땅 역시 투우(鬪牛)를 하는 듯한 아미파의 대응 때문에 돌진력이 많이 꺾인 상태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매서운 눈이 씨익 웃으며 뒤를 흘깃거렸다.
“아…!”
“이런…!”
청성과 아미의 무인들은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에 집중하는 사이, 당가와 응목대 수십 명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와족 전사들이 마음껏 날뛰도록 단 두 명이서 삼백 명을 묶어놓은 것이다.
검대를 이끄는 청풍각주와 복호전주가 이를 깨물었다.
“전력을 다한다. 수리건곤진(袖里乾坤陣)을 준비해라!”
“항마복룡진(降魔伏龍陣)을…! 최단 시간 안에 저자를 베고 아군을 구하러 간다!”
결국, 끌어내고 만다.
청성과 아미를 대표하는 최강의 검진을.
정심하고도 막강한 기세가 치솟으니, 우둔한 땅과 매서운 눈의 표정이 변했다.
“……눈깔. 이건, 안 된다.”
“워워…. 물러나라, 우둔아. 갇히면 손도 못 쓰고 죽겠다.”
이만하면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두 사람이 슬슬 내빼려는 순간, 후방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솟구쳤다.
“음…?!”
“아니?!”
전장 전체를 밀어붙이는 투기.
마침내 ‘그’가 나섰다.
후방에서 전사들을 지휘하던 너른 하늘이 앞으로 나오는 순간, 정파 연합군은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들었다.
“음…! 저자는 제자들만으로는 막지 못하오.”
“네, 진인. 우리가 직접 나가야겠죠.”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도 각파를 상징하는 보검을 빼 들었다.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진 화살이다.
싸움이 시작된 이상 일단은 이기고 봐야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양 진영의 수장들이 부딪히려는 순간,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를 말린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잠시만. 진인, 신니. 고귀한 손을 야만인의 피로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게 맡겨주시지요.”
“……?”
“장문인께서… 저자를 상대하겠단 말인가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뒤에 숨어 있을 줄만 알았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내공의 상당 부분을 잃지 않았나.
놀랍게도 싸우겠다고 나선 건 공지량이었다.
“사정이 어떻든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수장 된 자가 어찌 바라만 보겠습니까?”
공지량은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주위에 포진한 응목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올까 봐 준비했습니다. 믿고 지켜보시지요.”
공지량의 얼굴엔 비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안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응목대와 당가가 우수수 쓰러지고, 청성과 아미가 적의 힘을 정확히 알게 된 시점. 저 야만인 놈이 앞으로 나설 때!’
이 순간을 위해 흑상에게 거금을 주고 구입한 물품이다.
백강이 유통 경로를 포착하고도 고개를 갸웃하며 흘려 넘긴 그것.
응목대의 손에는 분말이 담긴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