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둘러싸라.”
응목대가 와족을 포위하기 위해 넓게 퍼지는 걸 보며, 공지량은 아쉬워했다.
‘전략 병기를 쓸 수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산과 밀림으로 뒤덮인 운남의 지형.
거기에 더해 사 년 전엔 호르찰이, 이번엔 응목대와 흑전대가 외부의 이목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 덕분에 군문의 전략 병기와 화포 같은 금용 병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선 절대 안 되지.’
사천에서 그런 걸 썼다가는 황실의 추궁을 감당할 수 없다.
아니, 당장 눈앞에 있는 고리타분한 작자들부터 요란법석을 떨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슬슬 모이기 시작했다!’
적색분지를 둘러싼 산맥.
산등성이에서 하나둘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놈들 때문에라도 전략병기는 쓸 수 없었다.
‘빠르군. 머저리뿐인 줄 알았는데 제법 유능한 놈들도 있는 모양이야.’
능선에 나타난 자들은 마른 비의 말을 듣고 대리로 몰려갔던 중원의 첩보조였다.
그들 중 일부가 냄새를 맡고 쫓아 올라온 것이다.
‘입산을 불허했으니 아무것도 캐내지 못했겠지. 허나 감이 좋은 놈들이라면 눈을 돌렸을 거야.’
첩보조는 수왕이 남하하는 이유와 점창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응목대가 외부인이 창산에 오르는 걸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첩보조의 상당수는 여전히 대리에 머물러 있지만, 능력 있는 요원들은 다른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전투의 흔적을 더듬어서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나쁘지 않은 변수다. 이용가치가 충분해.’
요원들은 와족의 흔적을 쫓으며 그들이 쓰러뜨린 첩보조를 봤을 거다.
응목대가 살해한 자들 또한 일부러 권각에 당한 듯한 상흔을 남겼다.
결정적으로 낭인 구백 명이 몰살한 현장까지.
이로써 와족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이삼백 명을 죽인 살인마들이 됐다.
심지어 지금은 사천을 대표하는 정파 연합군과 싸우고 있지 않나.
누가 봐도 오해를 할 만한 광경이며, 이제 점만 찍으면 그림이 완성된다.
바로 그 점을 찍기 위해 거금을 들였으니, 이제 붓을 들어 올릴 때였다.
‘전략 병기 따윈 없어도 돼. 이거면 충분하다!’
공지량이 둥글게 퍼지는 응목대를 보며 웃을 때였다.
맹수의 포효가 분지를 흔들었다.
“커허허헝!”
지난 사 년간, 너른 하늘과 함께 꿈에 나와 공지량을 괴롭혔던 대호였다.
어마어마한 덩치도 여전하며, 파괴적인 기운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 세진 것 같았다.
“크아아앙!”
푸른 눈은 너른 하늘보다 앞서 움직였다.
대호가 훌쩍 뛰어올라 전장에 난입하자, 피의 길이 열렸다.
“크아아악!”
“아아악! 사, 살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푸른 기운을 두른 이빨이 응목대를 물어뜯었고, 앞발이 휘둘러질 때마다 당가 무인들이 종잇장처럼 찢겼다.
저벅, 저벅.
그리고 대호의 주인은 활짝 열린 길을 걸었다.
“자, 장문인…!”
정예고 나발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겁을 먹는 건 똑같다.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이 나서자, 둘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응목대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 나왔습니다! 장문인! 놈이 나왔다고요…!”
“저희 힘으론 안 됩니다! 다 죽어요! 빠, 빨리 계획대로…!”
전선에 나가 있는 응목대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사 년 전에 목격한 절대적 무위.
응목대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자들이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가 역시 기가 죽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 짐승이 전장 전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왔나?”
거친 모래가 숨을 고르며 너른 하늘의 옆에 섰다.
“이것들, 별거 아니던데? 우리만으로 충분한데 뭐 하러 나왔어?”
친근하게 말을 건넨 자는 너른 하늘과 같은 연배인 뭉게구름이었다.
그의 어깨엔 검독수리가 앉아 있었는데, 녀석은 가을 수리와 백강에게 그믐의 서신을 전했던 투덜이였다.
쉬지 않고 뺙뺙대는 걸로 보아 여전히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긴? 이 형님, 하늘 형님 왔다고 또 허세 부리네. 아까 칼 맞는 거 내가 못 봤을 줄 아쇼?”
다른 와족의 전사들도 따라붙었다.
너른 하늘이 나서자 자연스럽게 그를 중심으로 뭉친 것이다.
“흐흐. 저거 봐요. 응목대 새끼들, 하늘 형님 얼굴을 보자마자 쫄았소.”
전사 한 명이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다른 이가 낄낄대며 맞장구쳤다.
“안 쫄고 배겨? 나라도 그렇게 당했으면 보는 순간 불알이 쪼그라들겠다.”
전장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전사들은 태연히 농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말투는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보다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흠. 꽤 많이 죽였는데 아직도 육칠백 명은 남은 것 같지? 진짜 센 놈들은 멀쩡하고 말이야.”
“그치. 확실히 엄청 불리해. 불리한 건 맞는데…… 희한하게 질 거란 생각이 들질 않네? 하늘 형님 때문인가?”
직책을 내려놓은 뒤에는 결국 한 식구라는 소속감만이 남을 뿐이다.
나이에 따라 호칭을 달리할 뿐,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이자 형제나 다름없었다.
“형님. 눈깔과 우둔이가 가로막혔소. 저 너머에 있는 놈들은 만만치 않아요.”
유쾌한 사람이 있다면, 진지한 자도 있었다.
전사 한 명이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왔다. 저 뒤에 있는 자들은 강해.”
너른 하늘이 청풍각과 복호전 무인들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곧이어 그의 눈은 청운진인과 금정신니에게로 향했다.
“여휘, 그 친구에 못지않은 강자들이다. 저들이 구파의 수장이겠지.”
전성기를 훌쩍 넘긴 나이.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고, 구파 수장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십좌와 같은 무림 서열에선 제외된 자들이다.
허나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는 오히려 전성기를 뛰어넘는 무력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너른 하늘이 전사들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전투화장을 발동해라. 푸른 옷과 여인들 사이를 꿰뚫고, 적들의 수장을 친다.”
가장 확실한 공략법이었다.
적들이 하나로 뭉치기 전에 당가와 점창을 깨부순다.
그리고 우둔한 땅, 매서운 눈과 합류하여 양 날개로 삼고, 청성과 아미를 분단시킨다.
그사이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이 최강자 두 명의 목을 따면 끝.
압도적인 무력이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며, 수적 열세를 딛고 승리할 수 있는 필승법이었다.
“알겠네. 맡겨두게. 확실히 뒤를 받치지.”
거친 모래가 선두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백수십 개의 무늬가 번쩍였다.
반려수까지 한꺼번에 발동한 전투화장.
단기간에 모든 걸 쏟아붓는 총력전이었다.
“악연은 여기서 끝낸다.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공지량의 흉계에 휘말리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너른 하늘이 발을 내디딜 때였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적들이 멈췄다.
희망적인 말이라도 들은 걸까?
공포에 질린 얼굴에 화색이 돌고, 녹수대 무인들의 손이 움직였다.
티티틱― 티틱―. 푸화아악―!
그들이 손가락을 튕기자,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또 독인가? 쓸데없는 짓을….”
최후의 발악일까?
무용지물이란 걸 알면서도 독을 살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독무의 목적은 살상이 아닌 와족의 시야를 가리는 데 있었다.
「지금이다! 던져라!」
와족은 들을 수 없는 전음이 번졌다.
그러자 전장을 둘러싼 응목대가 일제히 손에 든 주머니를 집어 던졌다.
“무언가 날아온다! 방어하라!”
응목대라면 또 어떤 희한한 병기를 준비했을지 모른다.
와족 전사들이 급소를 가리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거친 모래가 중얼거렸다.
“뭐지? 뭔가를 던졌는데?”
바람에 쓸린 건지 독무는 이미 걷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녹수대의 절묘한 제어였으니.
와족의 시야를 가리고, 응목대가 던진 주머니를 녹인 뒤에 독무는 말끔히 증발해버렸다.
“뭐 하는 수작이야? 저 비열한 놈이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와족 전사 한 명이 전장 끄트머리에 있는 공지량을 노려봤다.
자연기를 휘돌려 봐도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독은 물론이고, 해로운 성분이 침투한 흔적은 없었다.
와족 전사들이 의아해할 때, 반려수 쪽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크, 크릉….”
“푸르륵, 푹….”
쿵! 쿠쿵! 털푸덕!
전투화장을 발동한 채 날뛸 준비를 하던 야수들이 머리를 처박으며 엎어져 버렸다.
“무슨 일이냐?! 왜 반려수들이 갑자기…?!”
놀란 전사들이 눈을 번뜩였다.
공격을 받지도 않았고, 독에 중독된 것도 아니다.
한데 정신을 잃고 갑자기 쓰러지다니?
뭉게구름이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다가 기절하듯 거꾸러진 투덜이를 살폈다.
그러곤 너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냥 잠이 든 거야!”
“잠이 들었다고?”
너른 하늘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수십 마리의 반려수 중 거꾸러지지 않은 건 푸른 눈뿐이었고, 나머진 전부 엎어진 채 잠이 들었다.
흔들고, 때려도 깨지 않을 만큼 깊게.
그건 잠이라기보다는 혼절에 가까웠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공지량 놈이 뭔가 수를 쓴 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말을 하던 뭉게구름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엎어진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와족 전사들까지 무릎을 꺾으며 거꾸러졌다.
쿵! 쿠쿵! 털썩!
“아, 아니?!”
너른 하늘도 이 순간만큼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전사들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반면,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인가?! 아냐. 그건 확실히 아니야. 자연기가 몸에 해로운 성분을 놓칠 리 없다! 대체 뭐지?’
이 순간에도 전사들은 쓰러지고 있었다.
초조함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너른 하늘은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자연기를 휘돌려서 몸을 샅샅이 훑은 끝에 발견했다.
외부에서 침투한 무언가를!
‘약 기운? 하지만 이건… 문제될 게 없는데?’
심지어 대부분이 한 번쯤은 섭취해본 것들이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약재들 수십 종류가 뒤엉키며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자연기를 끌어 올려라! 몸에 들어온 것들을 종류를 가리지 말고 밀어내!”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지만, 짚이는 건 이것밖에 없다.
너른 하늘의 고함을 들은 전사들이 황급히 그의 말을 따랐다.
“정말이야! 무언가가 몸에 흡수됐어!”
“공지량 이 새끼!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천만다행인 건 너른 하늘이 빠르게 원인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벌써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의식을 잃었지만, 나머진 늦지 않게 약 기운을 잡아낼 수 있었다.
“밀어낸 것들을 구석으로 몰아라! 몸에 흡수되지 않도록 제어해!”
전사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팔다리 중 한곳에 약 기운을 가두었다.
그러자 정신을 잃는 사람이 없어졌다.
와족이 겨우 위기를 넘기고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쐐애애액―!
쇠붙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와족 전사들이 기겁하며 급소를 가렸지만, 표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퍼억! 퍼퍼퍽! 푸욱―!
“……!”
은빛 비수들이 노린 건 먼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반려수들이었다.
혼절한 야수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치명적인 급소를 내줬다.
“큭…!”
“으윽!”
영혼으로 이어진 벗.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려수가 목숨을 잃으면 와족 전사 또한 심대한 정신적 타격을 입는 건 여러 차례에 걸쳐 증명된 사실이다.
당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수를 날렸고, 그것들은 무방비한 반려수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자 전사들이 일제히 휘청였다.
쿵! 쿠쿵! 털썩―!
정신에 타격을 입고 자연기의 제어를 놓쳤다.
약 기운은 해방됐고, 버티고 서 있던 전사들이 모조리 쓰러져버렸다.
거친 모래가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았지만….
“자, 잠이 밀려와… 버, 버틸 수가…!”
쿠웅!
“형님…!”
너른 하늘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거친 모래를 부축했다.
비수가 한차례 쏟아진 뒤에 서 있는 건 너른 하늘뿐이었다.
“이, 이게 대체…!”
푸른 눈도 정체불명의 가루를 흡입했지만, 녀석은 너른 하늘의 조언대로 약 기운을 다스렸다.
그리고 날아오는 비수까지 모조리 쳐냈다.
그 결과 멀쩡할 수 있었지만, 분말과 비수가 휩쓸고 간 뒤에 남은 건 너른 하늘과 푸른 눈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멍한 건 청성과 아미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지막지한 기세를 뿜어내며 전장을 압박하던 야만인 전사들이 전부 쓰러져버렸다.
특히 얼굴에 그린 무늬들이 빛난 직후에는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죽거나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수로 저들을 혼절시킨 것인가?
모두가 얼이 빠져 있을 때,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카하하! 역시! 통할 줄 알았다!”
공지량이 희희낙락하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태를 야기한 분말의 정체를 밝혔다.
“이게 바로 천하제일신의라는 화통달의 비방이다! 마비산! 들어는 봤나?!”
무인의 내공은 본능적으로 해로운 성분을 밀어낸다.
그건 평소엔 유익하나, 치명상을 입은 무인들을 수술할 때는 걸림돌이 되곤 했다.
그래서 화통달은 이로운 성분만을 추출하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마취약을 개발해냈다.
팔을 자를 때 직접 그 효능을 경험한 뒤, 공지량은 병석에 누워 있는 내내 와족을 잡을 비책으로 마비산을 준비해온 것이다.
“크하하!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공지량은 와족을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하며,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살기로 점철된 표정은 아군조차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