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이게 무슨….”
청운진인이 공지량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를 젖히며 광소를 터뜨리는 모습에서 구파의 장문인다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비산이라면….”
금정신니도 공지량의 광기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청운진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마비산에 좀 더 집중했다는 점이다.
“신의의 역작……. 수많은 무인의 목숨을 살린, 의술계의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들었어요. 그걸 전투에 활용하다니….”
활인(活人)을 위해 만든 물건이 전쟁도구로 쓰였다.
같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한 줌의 마비산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들었는데, 허공에 뿌릴 만한 양이라니……. 어떻게 구한 거지?’
공지량이 천금을 들이고, 흑상은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호르찰의 비밀창고로부터 이어진 악인들의 발자취가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다.
“승패가 갈렸군요……. 무인답지 않은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는 자들을 줄일 수 있겠어요.”
불제자다운 생각이었다.
정파의 수장다운 반응이기도 했다.
와족이 무력화되자, 금정신니는 싸움이 끝났다고 여긴 것이다.
청운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지독히도 안이한 생각이었으니.
두 사람은 공지량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족의 사내여. 저항을 멈추시오.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인원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소이다.”
청운진인이 너른 하늘에게 말했다.
금정신니 또한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달랬다.
“마비산에 취했다면 동료들은 한동안 일어날 수 없을 거예요.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죠.”
분명 저들은 나름의 사연이 있다.
두 사람은 너른 하늘 같은 남자가 이유 없이 살육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충분한 대화를 통해 양측의 입장을 듣고, 더 이상 피를 보지 않는 쪽으로 해결을….
“그건 불가하오, 장문인.”
공지량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와족이 쓰러지기 전엔 극존칭을 쓰더니, 이젠 말투까지 달라졌다.
“야만인 놈들과 원한 관계를 맺은 건 우리요. 그렇다면 놈들의 처분을 결정짓는 것 또한 점창의 몫이지.”
이치를 따져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도움을 준 아군에게 할 소린 아니었다.
“장문인. 물론 그대의 말이 맞소. 허나 지금 그 말은….”
청운진인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공지량이 먼저 외쳤다.
“소중한 이를 잃은 자들이여! 저놈들 때문에 우린 스승과 사형제, 가족을 떠나보냈다! 그대들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응목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복수를 막을 수 없소!”
공지량은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 우린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 식구를 잃었다! 정사마를 막론하는 강호의 불문율이 무엇이냐?!”
그러자 응목대가 목 놓아 부르짖었다.
“피에는 피를…!”
광기에 사로잡힌 건 응목대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벌인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와족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권력을 되찾는 것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눈이 벌게져서 고함을 지르는 응목대의 모습은 광신도를 방불케 했다.
“이, 이게 무슨…!”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공지량이 짠 각본은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할 만큼 엄밀하고도 치밀했다.
“원한을 갚을 시간이다! 응목대, 돌격하라!”
공지량의 외침이 터진 뒤에야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런…!”
“잠깐! 기다리시오, 장문인!”
들을 리 없었다.
공지량은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건 금광을 나눠 갖기로 한 당건휘였다.
‘물렁해! 약해빠졌다! 야만인 놈들을 죽이는 데 망설일 이유가 뭐란 말이냐?’
명분이니 도의니 쓸데없는 것에 얽매이는 건 당문휘와 똑같다.
그는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를 한심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러곤 등을 돌리며 외쳤다.
“점창은 우리의 혈맹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적은 곧 우리의 적일지니! 녹수대! 야만인 놈들의 숨통을 끊어라!”
응목대가 도약하고, 당가의 무인들이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눈이 뒤집힌 자들이 있었으니, 마비산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이었다.
“공지랴아앙! 이 개새끼야!”
전투화장이 폭발하고, 푸른 궤적이 적색분지를 수놓았다.
청성파의 수리건곤진이 앞을 막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
“멈추시오! 우린 당신들과…!”
푸화아아악―!
매서운 눈에게는 청성이든 아미든 전부 공지량의 끄나풀로 보일 뿐이다.
평생토록 쌓아 올린 와족의 기예가 작렬하자, 피가 폭죽처럼 솟구쳤다.
“크아악…!”
“빌어먹을! 막아라! 저자를 저지해!”
아미파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죽인다! 공지량, 뒤에 숨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투콰카카캉!
자연기를 두른 등판이 아미파의 선두를 날려버렸다.
“뿌오오오!”
우둔한 땅의 심정에 동화된 긴 코가 몸을 돌보지 않고 돌진했다.
좌충우돌 들이받는 거수의 돌격은 그 자체로 심대한 위협이었다.
“아아악!”
“사저! 너무 강합니다! 그냥은 막을 수 없어요! 응전 명령을…!”
복호전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어쩔 수 없다! 아미의 제자들이여! 살계를 열어라!”
항마복룡진이 금광을 뿜고, 우둔한 땅과 긴 코를 가두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일인일수의 질주가 덜컥 멈췄다.
반대편 전장, 수리건곤진에 갇힌 매서운 눈이 비통하게 외쳤다.
“비켜라! 막는 놈들은 다 죽여 버리겠다! 공지량, 저 개새끼를…!”
“크아아앙!”
매서운 눈이 짙붉은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권각을 뻗었다.
외톨이가 그의 뒤를 받쳤지만, 둘만으로 구파의 검진을 부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천 최강의 문파.
하나로 똘똘 뭉친 청성의 벽은 높았다.
“흐흐, 흐흐흐흐.”
동선 하나하나까지 고려하여 선정한 위치다.
공지량은 청성과 아미를 이용하여 손도 대지 않고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을 저지했다.
추아아악―!
“컥…!”
결국, 쓰러지고 만다.
피를 보지 않고 제압하기에는 둘의 힘이 너무도 강했다.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었고, 그들의 살기는 청성과 아미의 무인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쿨럭…!”
“안 돼……. 복수를….”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이 수십 자루의 검에 난자되어 쓰러졌다.
“크흐. 흐흐, 흐하하!”
공지량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때, 노성이 터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당장 멈추지 못해!”
청운진인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저자를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이냐? 예전에도 그늘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여휘와 다니던 시절부터 봐온 공지량을, 구파의 수장된 자를 믿었다.
허나 그는 청운진인의 믿음을 배신했다.
청운진인은 바보가 아니었고, 이상 징후를 확인한 뒤에도 손을 놓고 있을 만큼 물렁한 성격도 아니었다.
꼭꼭 숨겨놓은 광기, 그리고 청성과 아미를 방벽 삼은 행동.
와족이 구백 명을 몰살했다는 사실이 청운진인의 판단을 흐렸지만, 공지량이 본색을 드러내자 그는 깨달았다.
점창과 당가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공 장문인! 두 번 말하지 않소이다! 지금 당장 병력을 물리시오! 그리고 난 그대가 숨기고 있는 걸 들어야겠소!”
스르릉.
고색창연한 검이 휘황한 빛을 뿜었다.
청성을 상징하는 청옥상천검(靑玉上天劍)이 공지량을 겨눴다.
금정신니 또한 검을 뽑았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무슨 꿍꿍이인 거죠? 만약, 그대가 본파를 이용한 거라면….”
온화하기만 하던 기운이 날카롭게 변했다.
만마를 제압하고, 범을 무릎 꿇린다는 아미의 명성처럼.
전전대 검후였던 여인은 공지량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지고한 검사였다.
“……점창은 오늘 아미의 검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서릿발 같은 기세가 심신을 옥죈다.
두 거물의 추궁은 공지량의 폭주를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그, 그게…!”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호기롭게 공격 명령을 내리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공지량은 단번에 쪼그라들었고, 식은땀을 흘리며 우물쭈물 댔다.
“당장 말하라! 어서 진실을 고하지 못할까!”
허연 눈썹이 하늘로 치솟고, 한 자루 검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본신의 기운을 드러낸 청운진인은 진정한 구파 장문인의 위용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투콰아아앙!
“……?!”
그때, 전방에서 들려온 폭음이 그들을 강제로 돌려세웠다.
청운진인이 일으킨 기세를 일거에 찍어 누르는 압력.
하늘을 놀라게 할 무력이 전장에 피 분수를 뿜어 올렸다.
덥석! 콰드드득!
솥뚜껑 같은 손아귀가 응목대원의 얼굴을 가루로 만들었다.
빠가가각―!
횡으로 휘두른 주먹이 녹수대 십여 명의 상체를 날려버렸다.
퍼억! 빠각! 우드득!
정직하고도 순정한 일격.
왼 주먹과 오른 주먹을 번갈아 휘두를 뿐이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푸른 기운이 실린 주먹은 인간의 골육을 분쇄하는 철추와 같았다.
“히, 히이익! 장문인, 사, 살려…!”
퍼어어억!
겁에 질려서 주춤거리던 응목대원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나, 나왔다…!”
공지량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저놈만은 마비산으로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예상했기에 당가를 끌어들였다.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청성과 아미까지 불러낸 게 아니었나.
붉은 대지 위, 시퍼런 안광이 지옥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전황은?! 야만인 놈들을 얼마나 죽였지?’
응목대가 돌진하고, 녹수대가 비수를 뿌리는 것까진 봤다.
그때까지 너른 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몸에 침입한 마비산을 태우고 있던 게 틀림없으리라.
그사이 정신을 잃은 와족을 정리하라고 일렀는데.
‘좋아! 나쁘지 않아!’
와족 전사들이 뭉쳤던 곳엔 핏물이 내를 이뤘다.
수백 자루의 비수가 혼절한 자들을 덮친 것이다.
자연기를 일으키지 못하니 내공이 실린 비수를 막을 순 없다.
전사들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졌다.
‘흐흐. 제아무리 괴물이라도 그걸 전부 막을 순 없지.’
청운진인이 공지량을 추궁한 게 딱 그 시점이었다.
그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면 상황은 변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검이 날아오더라도 공지량은 응목대와 당가를 계획대로 움직였을 테니까.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이렇게 빨리 제동을 걸 줄은 몰랐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공지량의 예상을 벗어난 건 딱 하나, 너른 하늘의 무력이었다.
추아아아악!
사선으로 그은 손날이 공간 자체를 찢어발겼다.
쿠웅! 우지직―! 으지지직!
하늘로 들린 다리가 대지에 내리꽂히는 순간, 반경 십 장 안에 든 적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터져버렸다.
『오오오오!』
무적자의 권능이 깃든 언령이 울려 퍼지자, 응목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고막이 생으로 터진 것이다.
쐐액― 쾌액― 스파팟!
와족 전사들을 살해한 비수가 너른 하늘 하나만을 노리고 쏟아졌다.
허공을 뒤덮은 그것은 은빛 비어(飛魚)떼의 비행을 보는 것 같았다.
티티팅, 투투투퉁― 티딩팅팅!
하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비수들은 철 기둥에 부딪히고 튕겨 나온 쇳조각처럼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너른 하늘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한 자루의 비수도 그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으, 으으….”
독도, 비수도 안 된다.
숫자로 밀어붙여도 저런 괴물이 지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녹수대는 난생처음으로 처절한 무력감을 맛봐야 했다.
“…….”
너른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공지량만을 노려보며 나아갈 뿐이었다.
유형화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자, 기세에 눌려 얼어 있던 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 어억…!”
“아아아악!”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적들이 얼굴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퍽! 퍼퍽! 퍼퍼퍽―!
야수 제어의 물리적 구현.
따로 수련한 적도, 그런 걸 떠올린 적도 없지만, 의식까지 태울 듯한 분노가 적들의 머리를 터트려버렸다.
“저, 저게 뭐냐?! 더 강해졌어?!”
공지량이 신음을 삼켰다.
그가 기겁하는 순간, 너른 하늘이 오른손을 뻗었다.
덥석!
“……?!”
둘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다.
중간에 장애물이 없을 뿐, 가까이엔 응목대와 녹수대가, 멀리엔 청풍각과 복호전이 좌우로 포진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조화냐?!’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무형의 기운이 공지량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으스러뜨릴 듯이 비틀었다.
넓게 퍼뜨렸던 야수 제어의 기운.
그것을 한곳에 집중하자 나타난 현상이었다.
“끄, 끄어어…!”
공지량이 버둥댈 때, 너른 하늘의 입술이 열렸다.
『이리 와라.』
후우욱―!
공지량의 몸이 덜컥 멈췄다.
그러곤 너른 하늘을 향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공지량은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지만, 무형의 힘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너른 하늘 스스로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그저 혼백까지 사를 듯한 분노에 몸을 맡길 뿐.
“놔, 놔라! 이 괴물 놈아! 으아아아!”
공지량이 공포에 질려서 비명을 질렀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기현상에 적색분지가 시끄러울 때, 마른 비가 사천의 경계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