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 * *
장성(長城)이 초라해 보일 만큼 웅장한 산맥.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성벽이 녹색의 수림과 어우러져 기막힌 절경을 그려냈다.
평소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헉, 허억…!”
탄탄한 체구의 사내가 숲을 헤쳤다.
그의 곁에는 흰 범이 달리고 있었는데, 둘 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숨을 토했다.
죽자 사자 달리던 사내가 옆을 돌아봤다.
“힘내, 별비야!”
마른 비가 쥐어짜내듯 외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둘 다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가 멍해…….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였지?’
수적들을 물리치고 배 위에서 잠들었던 게 끝이다.
백의서원을 나온 다음부터 섬서를 넘는 내내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장 거꾸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력 질주.
그건 마른 비의 초인적인 체력을 바닥낼 정도였다.
눈앞에 나타난 절벽을 그대로 건너뛰며, 마른 비가 해 뜰 무렵에 헤어진 요원의 말을 떠올렸다.
‘대협! 거의 다 왔습니다! 산맥만 넘으면 붉은 땅이 나타날 겁니다! 사천의 동부, 적색분지로 향하십시오!’
섬서와 사천의 경계를 넘을 때였다.
동월루의 요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총타가 하오문의 급습을 받아서 돌아가야 합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급습?! 하오문이 쳐들어왔다고?!’
하북에서부터 섬서에 이르기까지, 마른 비의 눈과 귀가 되어줬던 동월루가 철수했다.
그의 남하를 돕느라 위치가 노출됐고, 결국은 총타까지 발각된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미안한 마음이 절로 일었다.
가을 수리와 겨울 달이 있다고는 해도, 그 둘 말고는 일면식도 없는 자들이 아닌가.
요원은 마른 비의 심정을 짐작한 듯이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쇼. 저희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대협의 식구들도, 그리고 저희도 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요원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 대신 나타난 건 소속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기운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수왕이 남하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또는 굵직굵직한 사건에 연루돼 온 그를 따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혹은 원한 관계에 의해서 뒤를 밟는 자들이었다.
다양한 이유만큼이나 많은 숫자였고, 그건 날파리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만큼 마른 비를 귀찮게 했다.
‘동월루가 지금까지 이들을 차단해줬구나.’
요원들이 철수하고 나서야 마른 비는 동월루의 실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개방은?’
희한한 건 줄기차게 따라붙던 개방이 조용하다는 점이다.
분명 주위에 있을 텐데 전처럼 말을 걸거나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뭔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상관없겠지.’
동월루도, 개방도 차고 넘칠 만큼 도움을 줬다.
화음을 나와 섬서성을 최단거리로 가로질렀고, 중부에선 흑상의 본거지인 서안을 우회하는 일도 있었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창고가 털리는 바람에 흑상은 특급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서안에 주둔하는 흑전대의 병력이 쏟아져 나와 앞길을 차단했다.
사천까지 가려면 화음의 서쪽에 있는 서안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쪽 일대를 틀어막아버린 것이다.
만약 그들과 충돌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마른 비가 안전하게 사천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건 동월루와 개방이 필사적인 교란을 펼친 덕분이었다.
‘큰 도움을 받았어. 후개가 제대로 힘을 써줬구나.’
구칠의 정체를 밝힌 것에 대한 보은이라면 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후개도 같은 생각인지 흑전대를 따돌린 뒤로는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리라.
마른 비의 눈이 붉어지며 위험한 조짐을 보인 것도 한몫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알지 못하니 보은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거의 다 왔어! 저것만 넘으면!’
지금껏 지나온 지형을 동네 뒷산으로 전락시키는 산맥.
구름 위로 치솟은 험산이 킬킬대며 웃는 듯했다.
인간 주제에 나를 넘을 수 있겠냐고.
‘느낌이 안 좋아.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마른 비가 초조함을 누르며 외쳤다.
“서둘러, 별비야! 한달음에 뛰어 넘자!”
〔우라질! 싸우기도 전에 뒈지겠네! 알았다! 가자!〕
산중제왕의 포효가 산맥에 울려 퍼졌다.
산 너머에 있는 적색분지를 향해 일인일수가 내달렸다.
* * *
“전투의 흔적이야.”
완파된 건물과 대지에 스민 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백 단위의 싸움이 벌어졌으며, 인간이 떼로 죽어 나갔다는걸.
노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얼마 전까지 영인이라 불렸던 마을을 둘러봤다.
“누군가 뒷수습을 했군요.”
추적이라면 이 남자를 따를 사람이 없다.
새벽 어스름이 조각난 시체를 살피더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대 전사들과 정체불명의 집단이 맞붙었습니다. 바위 곰, 나무표범, 검은 수리. 세 집단의 전투흔(戰鬪痕)이 전부 남아 있어요.”
그러다가 어스름은 신경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뒷수습을 한 건 당사자들이 아니군요. 전투가 끝난 뒤에 또 다른 세력이 개입해서 뒤처리를 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 노을을 올려다봤다.
“상흔을 꾸미고, 주변을 정리하는 솜씨가 우리가 아는 놈들과 흡사합니다. 응목대. 싸움이 끝나고 놈들이 다녀갔습니다.”
어스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돌아갔다.
“전사들이 운남을 넘은 게 확실합니다, 족장님.”
그때, 검은 수리 전사 하나가 좌측 능선에서 달려 내려왔다.
“족장님! 표식이 남아 있습니다! 전사들은 공지량을 쫓아 사천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일대의 가장 높은 지형에 표식을 남기는 와족의 소통 방식.
그믐이 뒤를 쫓아올 청년 전사들을 위해 간단한 내용을 남겨둔 것이다.
“공지량 이놈, 무슨 생각이지? 지 구역을 놔두고 왜 다른 곳으로 도망간 거야?”
산이 뻐근한 듯 어깨를 돌리며 중얼댔다.
“혼자선 안 되니 다른 놈들을 끌어들였나 본데? 족장님, 쫓아갑니까?”
안개걸음이 물을 때, 노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바로 따라간다.”
선두로 나서며, 노을은 좌측 언덕을 힐끔거렸다.
서리불꽃의 작렬흔(炸裂痕).
누구도 너른 하늘과 전대 전사들을 해할 수 없다고 믿지만, 마음 한 켠에선 불안감이 일었다.
‘제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도 아무 일 없기를…….’
마른 비가 섬서의 끝자락을 달리던 시각, 와족의 청년 전사들은 한발 앞서 사천에 진입했다.
그들은 노을의 지휘와 어스름의 추적 아래 평야와 산맥을 거쳤고,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들을 목격했다.
“압도적이군요. 우리 측 시체는 보이질 않아요.”
청년 전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족 역사상 최강의 전력이라고 불리는 전대 전사들의 힘은 과연 엄청났다.
그들이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는 데 반해, 노을과 어스름의 표정은 추적이 계속될수록 점점 굳었다.
“여기도 응목대가 다녀갔습니다.”
쫓기는 놈들이 여유 있게 전투의 현장을 방문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건 자신이 준비한 전장으로 끌어들이려는 공지량의 흉계가 분명했다.
“……계속 간다.”
자신들이 눈치챈 걸 어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알고도 이길 자신이 있으니 쫓아간 거다….
노을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그렇게 달랬다.
마침내 산맥이 끝나고, 붉은 대지가 나타났을 때.
청년 전사들은 충격을 받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아아아아악!”
공포에 절은 외침이 바람을 타고 번졌다.
야수 제어에 사로잡힌 공지량이 질질 끌려가며 발버둥을 쳤다.
하나 남은 손으로 검을 휘둘러보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아냐! 있다! 이 앞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어…!’
내력이 부족한 거다.
단전이 깨지기 전이라면 싹둑 잘라냈으리라.
하지만 지금 자신의 힘으론 턱을 붙잡은 무형의 기운을 뿌리칠 수 없었다.
“흐읍!”
너른 하늘은 본능적으로 새롭게 터득한 야수 제어의 운용을 깨우쳤다.
그가 오른손을 잡아당기자, 공지량의 몸이 쭈욱 끌려왔다.
“히이이익!”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지만, 공지량은 단 한 발짝도 너른 하늘에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몽념! 보고만 있을 것이냐?!”
공지량의 외침을 들은 응목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일제히 날아올라서 너른 하늘에게 달려들었다.
“장문인을 놓아라, 이놈!”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너른 하늘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 눈에 푸른 불꽃을 담은 채 공지량만을 노려볼 뿐이다.
응목대? 그깟 놈들은 왼손 하나면 충분하니까.
“죽어… 컥!”
“카아악!”
왼손을 휘두를 때마다 응목대가 부서진 감자처럼 으깨졌다.
전쟁을 거치고 살아남은 최정예가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너른 하늘은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응목대의 검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이걸 맞고도 버티는지 보자.”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른 하늘이 뒤를 돌아봤을 때, 백색의 강기가 활활 타올랐다.
“차압!”
회풍무류사십팔검(回風無流四十八劍).
분광검과 더불어 점창을 대표하는 절기다.
검광이 번쩍인 순간, 피가 튀었다.
몽념의 검은 너른 하늘의 강피를 찢고, 철골까지 가 닿았다.
“흐흐흐…!”
“뭘 쪼개나?”
덥석.
위협이 되지 않으니 맞아준 것이다.
너른 하늘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몽념의 머리통을 붙잡았고,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카악…!”
그는 유일하게 너른 하늘의 눈길을 받은 걸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대주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응목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미, 미친…!”
놀랄 틈이 있는가?
곧 황천으로 갈 텐데?
스가가각―!
횡으로 길게 휘두른 손날이 응목대의 잔존 인원을 두 동강 내버렸다.
후우우욱―!
청성과 아미보다도 뒤에 있던 공지량은 어느새 녹수대 근처까지 끌려와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응목대가 몰살하자, 공지량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 진인! 신니!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이 없다.
적색분지를 둘러싼 산자락엔 중원의 첩보조들이 와 있었고, 그들은 공지량이 애걸복걸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흠!”
하늘빛 검광이 번쩍였다.
극의에 이른 검은 빛마저 끊어낼지니.
어느새 앞으로 나온 청운진인이 공지량을 붙든 무형기(無形氣)를 절단했다.
청성 지고의 무학이라는 사전절광검(射電絶光劍)이었다.
“이족의 사내여! 공격을 멈추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공지량의 곁에는 청운진인만이 아니라 금정신니와 당건휘까지 서 있었다.
청운진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이미 많은 피가 흘렀소. 더 이상 피를 볼 필요가 있겠소이까? 그대의 사정을 말해주시오. 그걸 듣고, 시시비비를 가린 후에 사태를 종결지읍시다. 청성 장문인의 이름을 걸고, 지금껏 그대가 살해한 자들은 불문에 부치겠소.”
무림의 생리를 아는 자라면, 파격적인 조건임을 알 것이다.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응목대가 전멸했다.
그뿐인가.
아미도 손해를 봤으며, 녹수대는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다.
그 모든 걸 무마해주겠다는 것.
문제는 한 가지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지량은? 그놈을 내줄 텐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청운진인의 얼굴이 굳었다.
우물쭈물하던 그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는…… 점창의 장문인이오. 구파의 수장이란 말이외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체적인 징계를 가할 테니….”
너른 하늘이 피식 웃었다.
“불문에 부친다……. 참으로 편한 사고방식이로군. 공격을 받았고, 묘가 훼손되었으며, 아이가 납치됐다. 그리고… 형제들을 잃었지.”
잠시 말을 끊었던 너른 하늘이 숨이 끊어진 전사들을 돌아봤다.
“누가, 무엇을 묻지 않는단 말이냐? 선심 쓰듯 말하지 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너희가 아니다! 그건 비명에 간 내 형제들의 몫이란 말이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기세!
질식할 듯 뜨거워지는 기온!
공기 자체가 증발해버릴 듯했다.
수장이란 이유로 꾹꾹 눌러온 너른 하늘의 분노가 폭발했다.
『감히 내 앞에서 타협을 논하는가?! 나와 말을 섞고 싶다면, 공지량을 내놓아라! 대화는, 너희를 살리고 죽이는 건 그놈을 갈가리 찢어놓은 후에 결정할 일이다!』
차차차창!
너른 하늘의 살기에 반응한 청성과 아미의 무인들이 검을 겨눴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장을 보호하는 한편,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을 겹겹이 둘러쌌다.
기세는 좋았지만, 검을 든 손이 처량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콰르르릉―!
와족의 한과 분노가 하늘까지 닿은 걸까?
어두워진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소나기라기엔 너무도 굵직한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지량을 내놓을 테냐? 아니면…….”
꽈르릉! 콰앙―!
번쩍이는 뇌성을 뚫고, 너른 하늘의 입술이 열렸다.
“전부 죽을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