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95화 (395/463)

395화

“기어코… 피를 볼 생각인가요?”

금정신니가 신음하듯 물었다.

너른 하늘이 물러서지 않을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언뜻 들은 내용만으로도 공지량이 벌인 일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른 하늘의 뒤편, 와족 전사들이 전멸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금정신니는 돌덩이가 가슴에 콱 얹히는 것 같았다.

“침공을 시작한 이유. 말해주지 않을 것이오?”

청운진인이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그건 충돌을 피하고 싶은 간절함의 발로였다.

어쩐 일인지 너른 하늘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아야…….’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에 아련함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본 게 수 년 전이니,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으리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똑 닮은 그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하지만 삶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가야만 한다.

그리움을 갈무리한 너른 하늘의 눈에 결심이 차올랐다.

“이해를 구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떤 말을 듣던 너희는 공지량을 내주지 않겠지.”

그 말을 끝으로 너른 하늘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청운진인이 다급히 외쳤다.

“그, 그대는 수장이 아니오?! 뒤에 남을 식구들을 생각하시게! 그대가 살아야 그들을…!”

그때, 겨우 정신을 차린 공지량이 외쳤다.

“아니오! 저놈은 족장이 아닙니다!”

“……?!”

공지량은 필사적이었다.

와족의 씨를 말리려는 그가 청년 전사들을 간과할 리 없었다.

“저자가… 족장이 아니라고?”

청운진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묻자, 공지량이 얼른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족장의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지요! 저놈을 죽이고, 어린놈들까지 모조리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환을…!”

공지량이 말을 하다 말고 딸꾹질을 하며 멈췄다.

난생처음 자신에게 공포를 안긴 존재.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부러 쳐다보지 않을 뿐, 너른 하늘은 분지 끝에 나타난 청년 전사들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포함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언령에 목소리를 실었다.

『쓸데없는 소리. 내가 건재하거늘, 누가 날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와족의 유일무이한 족장은 나다.』

그건 선언이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의 책임은 내게 있으며,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는.

공지량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거, 거짓말 마라! 어린것들을 지키고 싶은 모양인데, 누가 속을 줄 알고…!”

청운진인이 손을 들어 공지량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너른 하늘의 뒤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산맥 위를 힐끗거렸다.

그는 너른 하늘의 속내를 짐작하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하긴,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족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대답 역시 광범위 전음이었다.

청운진인도 이제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지만, 너른 하늘의 의지를 존중해 주었다.

너른 하늘이 고맙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무의미한 대화는 이쯤하지. 준비하라. 들어갈 테니.”

전투화장이 빛을 뿜는 순간, 때를 맞춘 것처럼 먹구름 사이로 전광이 번뜩였다.

곧이어 천지를 삼킬 듯한 뇌성이 울려 퍼졌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를 뚫고, 시퍼런 불길 두 쌍이 타올랐다.

“크르르르…….”

운남 최강의 영수가 벗의 옆에 나란히 섰다.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은 둘만으로 군단에 버금가는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청운진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또르르 흘렀다.

‘이자… 정말 우릴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구파의 장문인 셋과 당가의 가주를 상대로?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백중세를 이룬다 쳐도, 청풍각과 복호전까지 감안하면 너른 하늘의 승산은 무에 가까웠다.

‘이자는…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구나!’

승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분명하다.

죽여야 할 놈이 눈앞에 있고, 물러설 수 없으니 나아갈 뿐.

청운진인이 검을 고쳐 쥘 때, 자연기가 타올랐다.

쿠아앙―!

왼발 진각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온몸의 관절이 일시에 가동되고, 땅으로부터 뽑아 올린 기운이 증폭을 거듭한다.

휘아아악―!

동작 하나하나에 스민 회전의 묘.

극한까지 압축된 자연기가 오른손 정권에 실렸다.

“받아봐라.”

너른 하늘이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더없이 고요하고, 지극히 평온하게.

마치 주먹으로 대기를 밀치듯이.

자세는 바위 부수기가 분명한데, 그건 아예 다른 기술처럼 보였다.

콰우우웅―!

진가가 드러난 건 주먹을 끝까지 뻗은 후였다.

공간을 말살할 듯 광포하게 내달리는 기운!

푸른빛이 번쩍인 순간, 빛기둥이 대지를 달궜다.

“마, 막아…! 아니, 전부 뒤로 빠져라! 내가 간다!”

청풍각주 염상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제자들을 물린 채 홀로 달려 나갔다.

저런 비상식적인 기운에 숫자로 맞서면 희생자만 늘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각주님…!”

“뭣들 하나! 각주님을 지원하라!”

대신 청성의 정예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를 도왔다.

주위에 있던 이십여 명의 내공이 검진을 타고 염상에게 흘렀다.

격체전력(隔體傳力).

진법의 묘용을 빌려 다수의 내공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그것은 강대한 적을 꺾기 위한 비기였다.

“차아아압!”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염상을 각주의 자리에 올려놓은 절기였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노을이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듯.

검으로 구현한 강기의 방벽이 빛기둥을 가로막았다.

꽈아아앙―!

“컥…!”

하지만, 단번에 뚫렸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기의 응집체가 유리벽을 부수듯 검강을 깨뜨린 것이다.

염상은 피를 뿜으며 날아올라 수리건곤진 한복판에 처박혔다.

“가, 각주님!”

“이런 말도 안 되는…!”

내공의 일부만 전이할 수 있다곤 해도 자그마치 스무 명의 기운을 받은 검벽(劍壁)이다.

한데 궤도조차 비틀지 못하다니?

너른 하늘이 뿜어낸 권강은 공지량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으, 으아악!”

공지량이 검을 곧추세웠으나, 그걸로 어림없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안다.

얼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지량의 앞에 푸른 검날이 끼어들었다.

“흡…!”

청옥상천검.

희대의 명검에 청성파 도인들의 도력(道力)을 불어넣은 신물이다.

권강의 회전을 따르는 절묘한 검놀림이 공지량을 살렸다.

끼기기깅―!

회전을 타고, 경로를 비튼다.

그러자 권강이 슬쩍 궤도를 이탈했다.

말이 쉽지, 평생을 수련한 검사들도 흉내 낼 수 없는 기가 막힌 한 수였다.

“후우우….”

청운진인도 쉽진 않았는지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그가 한숨을 내쉴 때, 비명이 터졌다.

“크아악!”

정면 돌파.

너른 하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십좌라도 회피할 검진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부쉈다.

강철 같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부러진 검편과 박살 난 인간의 육신이 하늘을 날았다.

전투화장을 발동한 너른 하늘은 마치 천상의 투신이 강림한 것만 같았다.

스가각! 푸슉―!

청성파의 정예들을 으깨고 짓이겼지만, 너른 하늘도 멀쩡하진 않았다.

한 발짝 전진할 때마다 육신에 검상이 새겨졌다.

허나 꺼지지 않는 투혼이 그를 전진케 했다.

‘지켜보아라! 형제들이여!’

너른 하늘은 비명에 간 전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똑똑히 보아라! 우리의 힘을!’

그는 분지를 둘러싸고 관전하는 중원인들의 시선을 느꼈다.

‘가서 전하라! 와족의 투혼을!’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는다.

형제들이 쓰러진 지금, 너른 하늘을 속박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자들은 현 족장이 책임질 것이다.

그렇다면 보여주리라.

생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워, 적들을 사른다.

내 대에서 시작된 악연을 끊고, 아이들의 미래를 창창히 열어줄 것이다.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너른 하늘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지량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런 괴물이…! 개인의 힘으로 덤비지 마! 청풍파상진(靑風波狀陣)을 펼쳐라!”

염상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중첩되며 가다듬어지는 기파!

검기의 해일이 출격을 앞두고 있었다.

“청성만으로는 안 돼! 우리도 가세한다!”

만마를 무릎 꿇리고, 용마저 굴복시킨다.

아미의 항마복룡진이 눈부신 금광을 토했다.

점창과 아미의 검사들이 검기를 뽑아 올릴 때!

『오오오오!』

돌풍처럼 불어 닥친 언령이 전장을 휩쓸었다.

너른 하늘이 전투함성을 터뜨리자, 수리건곤진과 항마복룡진이 통째로 출렁였다.

“커허허헝!”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개의 빛줄기가 폭사됐다.

지상을 가로지르는 유성우.

푸른 눈 일족 고유의 기술이 작렬하자, 단단히 응집됐던 검기가 와해됐다.

대호가 검진 한복판에 난입하며 발톱을 휘둘렀다.

부아아악! 추아악―!

“아아악! 팔…! 내 팔이!”

“끄아아아! 살려줘!”

갈가리 찢긴 인간이 후드득 무너져 내렸다.

하늘이 울리도록 포효하며 날뛰는 푸른 눈은 운남을 제패한 야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아아아악!”

“각주님! 너무 강합니다! 아, 아예 상대가…!”

번쩌어억―!

정신없이 밀리는 그들을 나락으로 떨굴 일이 벌어졌으니.

서리불꽃, 그 파멸의 빛이 번쩍인 순간, 청풍각과 복호전의 무인 절반이 증발해버렸다.

“저, 저건 또 무슨…!”

최강이라 자부해온 검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은 그들이 잊고 있던 공포를 일깨웠고, 안온한 환경에서 병정놀이나 하던 것들에게 진짜 전투가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오오오오!』

“커허허허헝!”

육신을 찢어발길 살기!

영혼까지 사를 듯한 투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야생의 힘이다!

“이, 이런 자가 세상에 있다니…!”

청운진인과 금정신니는 싸워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몸이 굳어버렸다.

칠십 년 가까운 세월을 무림에서 보내며,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을 무수히 보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런 자는 없었다.

모든 힘을 개방한 너른 하늘은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진인! 신니! 정신 차리십시오!”

두 사람을 일깨운 건 당건휘였다.

그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는데, 예상이 완전히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공지량, 이 찢어 죽일 새끼! 저런 괴물이란 말은 없었잖아…!’

아니. 공지량은 말했다.

금광까지 털어놓은 마당에 너른 하늘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의 무력이 공지량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을 뿐.

그 결과 응목대가 전멸하고, 녹수대의 절반이 날아갔다.

가뿐히 이길 줄 알았던 당건휘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저런 걸 정면으로 잡으려다간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짐승을 먼저 공략해야 합니다!”

“짐승이라고요?”

금정신니가 아! 하며 눈을 반짝였다.

반려수가 쓰러지자 와족 전사들이 타격을 받은 게 떠오른 것이다.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검진에 합류하며 외쳤다.

“우리가 저자를 막겠소!”

“당 가주! 서두르세요!”

여기까지 온 이상 이판사판이다.

청운진인과 금정신니가 너른 하늘에게 달려들고, 당건휘가 녹수대와 함께 날아올랐다.

“남은 걸 전부 쏟아부어!”

죽은 응목대의 품을 뒤져 마비산을 입수한 녹수대가 푸른 눈에게 주머니를 집어던졌다.

“합!”

당건휘가 손을 휘젓자, 주머니가 산성독에 녹으며 마비산이 뿌려졌다.

사납게 날뛰던 푸른 눈이 주춤했다.

“가랏! 비도집결세(飛刀集結勢)!”

비수 수백 자루가 하늘을 날았다.

녹수대의 손을 떠난 그것들은 당건휘의 인도를 따라 하나로 뭉쳤고, 은빛 기둥이 되어 푸른 눈을 덮쳤다.

투두두두두―!

“카항…!”

푸른 눈이 마비산을 태우다 말고 신음을 토했다.

견갑골을 집요하게 두드리는 수백 자루의 비도.

콰드득! 소리와 함께 대호의 오른쪽 앞발이 뜯겨나갔다.

“푸른 눈…!”

너른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도우러 갈 수 없었다.

구파의 장문인과 검대의 수장들이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비켜라! 이놈들!”

돌아가는 등판.

중첩되는 자연기!

먼저 간 아우의 기술이 적들을 물러서게 했다.

그때, 절망적인 광경이 너른 하늘의 눈을 채웠다.

“커허허헝!”

푸른 눈은 하나 남은 앞발로 적들을 날려버리고, 녹수대를 물어뜯었다.

기가 질릴 광경이지만, 다친 몸으로 백오십이 넘는 숫자를 당할 순 없었다.

“무시무시하구나. 마비산이 없었다면 이쪽이 당할 뻔했어.”

푸욱!

당건휘의 비수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힘.

스르륵 엎어지던 푸른 눈의 안광이 번쩍였다.

“커허헝!”

우드드득!

당건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곧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끄, 끄아아아아!”

푸른 눈은 최후의 힘으로 당건휘의 어깨를 물었다.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우측 견갑골을 부순 야수가 풀썩 엎어졌다.

“푸, 푸른 눈…!”

너른 하늘이 비통한 절규를 터뜨릴 때였다.

누군가가 급격히 다가오며 히죽거렸다.

“후하하!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구나!”

공지량이었다.

그는 푸른 눈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너른 하늘의 숨통을 끊으러 온 것이다.

“이 순간을 양보할 순 없지! 너의 목은 내가 딸 것이다!”

구파의 셋과 당가를 밀어붙인 야만인의 목을 날린다.

그걸로 입지를 굳히고,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절치부심의 시간을 지나, 장밋빛 미래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덥석!

공지량의 망상을 날려버린 건 두터운 손아귀였다.

얼굴을 붙잡힌 그가 기겁하며 온몸을 떨었다.

“이, 이럴 수가…! 왜, 왜 멀쩡한 것이냐? 너희는 짐승이 쓰러지면 분명히…!”

붉게 물든 눈시울.

그 너머에서 귀화(鬼火)가 타올랐다.

지옥을 뚫고 나온 듯한 목소리가 공지량의 혼백을 빼놓았다.

“……멍청한 놈. 네 꾀에 네가 넘어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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