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공지량은 넋 나간 얼굴이었다.
너른 하늘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왜 너른 하늘이 멀쩡한지 의문을 품는 것뿐이었다.
“아, 아직 범이 죽지 않았나? 그래, 그것 때문이구나!”
공지량이 머리통을 붙잡힌 채로 눈만 돌렸다.
그러곤 소리를 빽 질렀다.
“당건휘! 이 멍청한 새끼야! 확실히 숨통을 끊어라! 당장 범을 죽이란 말이다!”
그건 공지량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푸른 눈은 피투성이가 돼서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외침은 아군의 심기를 건드는 결과만 낳았다.
“큭, 커헉…! 머, 멍청한 새끼라고?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망발을…!”
당건휘는 견갑골이 부서지고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가의 비방으로 겨우 통증을 억눌렀는데, 막말이 들려온다.
그것도 가장 꼴 보기 싫은 놈에게!
당건휘가 눈을 부릅떴지만, 공지량은 그러거나 말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다! 네가 똑바로 하지 않아서 이놈이 멀쩡한 걸 모르겠나! 심장을 쑤셔라! 골통을 부수고, 장기를 파헤쳐! 영수라서 쉽게 죽지 않는 게 분명해! 빨리 그 짐승을…!”
우드드득!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다.
너른 하늘이 손아귀에 악력을 더하자, 공지량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아아악…!”
이미 구파 장문인으로서의 체통은 온데간데없었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그에게, 너른 하늘이 속삭였다.
“나와 할아범의 반려수는 우리에게 자연기를 받지 않아. 스스로 기의 운용을 터득한, 완전히 독립된 개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공지량이 깜짝 놀라며 눈을 치떴다.
머리만큼은 비상하기에 그게 무슨 뜻인지를 대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돼….”
공지량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는 너른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떨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입김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피부를 도려낼 듯한 살기가 엄습하자, 공지량은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사 년 전, 난 네게 기회를 줬다. 이제 와서 살려달라는 헛소리는 하지 마라. 그럴수록 더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너른 하늘의 눈가를 타고 빗물이 흘렀다.
비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그는 원수에게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살해당한 형제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독기만큼이나 네 명이 질기길 바라마.”
말이 끝나자마자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한 번 경험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겨우 복구한 단전이 또다시 박살 나버렸다.
“끄, 끄어…!”
힘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공지량이 눈물을 흘렸다.
항상 적에게 간결한 죽음을 내리던 너른 하늘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고통이 연장되도록 천천히 공지량의 육체를 부쉈다.
“으아아악! 카아악!”
이쯤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도 하련만.
허나 공지량은 그럴 용기도 없는 인간이었다.
어쩌면 이 지경이 되고도 살고 싶은 걸지도.
“그, 그만하시오!”
하나 남은 팔이 잘근잘근 부서지고, 우두둑 뜯겨 나간 뒤였다.
청운진인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외쳤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구파의 장문인이오! 살려줄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시게!”
공지량이 벌인 일을 모르는 자로서는 저런 말을 할 법도 하다.
너른 하늘은 신경 쓰지 않았다.
팔에 이어 다리를 붙잡았고, 뼈마디 하나하나를 가루로 만들었다.
매 손길마다 형제들의 이름을 되뇌며….
“어, 어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이 날아간 걸까?
공지량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뼈가 부서질 때부터 움찔거리며 떨고 있을 뿐.
“우, 우웩…!”
아미파의 여승들이 토악질을 했다.
필요에 의해 검을 들긴 하나, 불제자가 인간을 고문하는 장면을 보았을 리 없다.
그들은 허리를 꺾으며 뱃속에 든 걸 전부 게워냈다.
“아미타불! 이런 악독한…!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요? 당장 그 손을 멈추시오!”
금정신니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자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공지량이 산 채로 붙잡혀 있어서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때, 침통한 음성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당건휘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어차피 이 상황에선 살리지 못합니다. 공 장문인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제가 너무 힘들군요. 편안한 죽음을 내리지요.”
그러고는 누가 입을 열 새도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푸아아악―!
옅은 독무가 너른 하늘과 공지량을 뒤덮었다.
너른 하늘의 시선이 향하자, 당건휘가 겁을 먹고 움찔했다.
꿰뚫을 듯이 노려보던 시선이 거둬진 뒤에야 당건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크, 어, 커컥…!”
공지량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곧바로 죽지 않고 거품을 물며 경련했다.
당가의 무인들만 상황을 눈치챘는데, 당건휘가 하독한 건 옅게 희석한 오보단장독(五步斷腸毒)이었다.
‘너 때문에 녹수대의 절반이 날아갔다. 한데 감히 내게 욕을 해? 뒈지기 직전까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맛봐라!’
욕망이, 그리고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켰다.
본디 당건휘는 심성이 악하지는 않았다.
야망이 컸고, 당문휘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그래서 본능적인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마른 비가 그를 싫어하진 않았던 것이다.
허나 북벌을 거치고 가주의 자리에 오른 그는 곧바로 운가를 멸문시켰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간당간당하게 줄타기를 하던 당건휘가 선을 넘어버린 것은.
천북표국을 먹기 위해 운가를 없앴고,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공지량을 도왔다.
그리고 지금 죽기 직전의 아군에게 더욱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공지량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당건휘의 생각은 온통 금광에 쏠려 있었다.
‘흐흐흐. 잘 가거라. 금광은 내가 독식해주마.’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최상이다.
그래서 당건휘는 끔찍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네, 네놈이…!”
당건휘의 미소가 사라진 건 끊어질 듯 말 듯 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꿈틀대던 공지량이 고개를 돌렸다.
보랏빛 얼굴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
그는 안팎으로 가해진 고통에 정신을 차렸고, 쥐어짜듯 외쳤다.
“이 개새… 끼가! 근… 본도 없는 천한 놈을… 계획에 끼워줬더니…! 감히 날… 중독시켜?!”
악인의 민활한 머리는 대번에 상황을 유추해냈다.
공지량은 죽기 직전까지도 탐욕을 버리지 못했고, 당건휘와 같은 걸 떠올리고 있었다.
“쿨럭…! 후흐, 후하하하! 네가 혼자 처먹는 걸… 내가 두고 볼 것 같으냐!”
“이, 이런…!”
당건휘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썼지만, 공지량이 더 빨랐다.
「모두, 잘 들어라! 운남 남부, 야수족의 영토엔 어마어마한 순도의 금광이 있다! 전쟁이 벌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지! 당가의 애송이가 그걸 차지하게… 컥!」
회광반조. 생기까지 쥐어짠 최후의 힘.
공지량은 그걸 광범위 전음을 터뜨리는 데 썼다.
말을 쏟아내던 그가 덜컥 멈췄다.
삽시간에 절명할 독이 살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독에 죽지 못했다.
그보다 앞서 손을 쓴 자가 있었으니까.
“이놈이 끝까지…!”
퍼어억!
분노한 너른 하늘이 공지량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운남을 넘어 사천까지 전란에 빠뜨린 악인은 시체도 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몹쓸 짓을 하고 떠났으니, 누구도 그가 이 시점에 금광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금광이라고?”
청성파와 아미파의 무인들이 웅성댔다.
청운진인이 당건휘를 무섭게 노려봤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금광이라니?! 당 가주, 그대는 처음부터 이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당건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여기서 시인하면 끝장이라는 걸 깨닫고 표정을 바꿨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저 역시 점창의 지원 요청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저 간악한 놈이 죽기 직전에 되는대로 떠든 것입니다! 분란을 일으키려고요!”
금정신니가 눈을 매섭게 뜨며 추궁했다.
“계획에 끼워줬다고 했고, 혼자 먹을 거라고도 했죠. 그리고 당신은 와족의 악행을 증언했어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죠? 정황이 이런데도 아니라고 할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놈이 멋대로 떠든 것입니다! 저들의 행보를 아는 건 일찌감치 운남에 첩보조를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수왕과 알게 된 직후지요! 못 믿겠다면, 얼마든지 조사해보십시오!”
책잡힐 부분을 놔뒀을 리 없다.
정황상 충분히 의심스럽겠지만, 심증만으로는 자신을 어쩔 수 없다.
공지량과 응목대가 전멸해서 증언할 사람도 없으니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당건휘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산맥 쪽이 소란스럽다! 빌어먹을, 공지량 이 개 같은 놈이…!’
전쟁을 지켜보던 중원의 첩보조.
그들이 금광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몸을 숨긴 채 죽은 듯이 있던 자들이 은신을 풀고 일어섰다.
그러곤 사방으로 달려갔다.
금광을 독식하려는 꿈은 끝났다.
‘이렇게 되면 싸울 이유가 없다. 아무리 지쳤어도 저놈을 잡으려면 얼마나 죽어 나갈지 가늠이 안 돼. 여기서 빠진다!’
당건휘는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한편,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물러났다.
그때, 그를 옭아맬 목소리가 들렸다.
“공지량 못지않게 비열한 놈이구나. 쥐새끼처럼 어딜 슬금슬금 도망가나?”
너른 하늘이었다.
공지량을 죽여 원한을 갚았음에도 그의 눈에선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형제들의 목숨을 빼앗는 데 일조한 놈들.
앞서 선언했듯이 그는 한 놈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가주. 그대가 이 일에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차후 알아보겠소.”
청운진인이 무서운 눈초리로 당건휘를 쏘아봤다.
그러곤 청옥상천검을 겨누며 말했다.
“눈앞에서 구파의 수장을 잃었소. 칠십 명의 제자들도 차가운 땅에 몸을 뉘었지. 행여나 발을 뺄 생각이라면, 그대는 내 검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오.”
당건휘를 공범이라 확신하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금정신니까지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당건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다, 당연한 말씀을…. 본가의 식구들도 백오십 명이 쓰러졌습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지요…….”
화살은 쏘아졌고, 여기까지 온 이상 누구도 발을 뺄 수 없다.
시시비비는 적의 목을 벤 뒤에 가릴 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빗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검을 들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는다! 덤벼라!』
우레와 같은 언령이 분지를 휩쓸고, 푸른 불꽃이 추모의 눈물을 태운다.
죽음을 각오한 전사가 날아오르니, 수백 명의 검사가 악을 쓰며 마주쳐갔다.
투콰아아앙―!
격렬한 충돌음이 빗소리를 뚫고 번졌다.
* * *
“왜 말리는 겁니까! 족장!”
산이 벌게진 눈으로 외쳤다.
비가 아니었다면 흐르는 눈물이 상체를 적셨으리라.
노을이 족장이 된 이후, 한 번도 말을 놓은 적 없던 그가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 난 갈 거다! 저길 봐! 어른들이, 식구들이 쓰러졌잖아! 전대 족장님만 남았어! 그런데 가만히 서서 지켜보란 말이냐!”
산이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비통한 심정을 알기에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전장을 내려다보던 노을이 겨우 입술을 뗐다.
“……나도 가고 싶어. 당장 뛰어 내려가고 싶다고. 나도 저 새끼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
노을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분노와 살의에 정신이 먹혀버리려는 걸 참는 것만도 벅찼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아버님이 왜 언령을 발했는지 모르겠어?! 그건 내게, 우리에게 한 말이야! 절대 내려오지 말라고!”
이건 나의 싸움이다.
내 대에서 벌어진 악연은 내가 끊겠다.
너희는 미래를 살아라.
남은 식구들을 지켜라.
그러기 위해….
‘살아남아라!’
너른 하늘은 살아남을 것을 명령했다.
전대 전사들이 건재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목숨을 잃었고, 푸른 눈마저 쓰러졌다.
너른 하늘도 서리불꽃을 쓴 이후로는 기력이 소진된 게 보일 정도였다.
지금 저기에 내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너무 가혹해요!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이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죽여 울며,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등을 바라볼 뿐이다.
“족장령(族長令)이야. 아무도 움직이지 마. 그리고 적들의 얼굴을 뇌리에 새겨. 절대 잊지 않도록.”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청년 전사들이 뿌예진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족장령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내가 있었으니.
어느 순간, 노을의 고개가 북동쪽으로 홱 돌아갔다.
“이, 이 기운은…?!”
하북에서부터 사천까지.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중원을 가로지른 남자가 마침내 적색분지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