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 * *
나무, 돌, 나무…!
단조로운 풍경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된다.
산등성이를 달리고, 수직에 가까운 봉우리를 넘었다.
어느 순간 나무는 사라지고, 키 작은 풀들만 듬성듬성 나타났다.
“허억, 헉…!”
새들이 발 아래로 난다.
구름이 안개처럼 흐른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자, 지금껏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자. 진짜 죽을 것 같아…….〕
입으로만 투덜댈 뿐 여간해선 지치지 않는 별비가 앓는 소리를 했다.
돌아보니 다리가 풀려서 후들대고 있었다.
그건 마른 비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후우… 안 돼. 느낌이 안 좋단 말이야. 거의 다 온 것 같아. 나 먼저 갈 테니까 쉬었다가 따라와.”
평지였다면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허나 사천의 산맥은 운남 못지않게 높고 험준했다.
마른 비는 봉우리 너머에서 전장의 냄새를 맡았고, 가까워질수록 불길함을 느꼈다.
〔젠장. 뛰다가 죽으면 천하의 얼간이라고 놀림 받을 텐데…….〕
별비가 혀를 빼물고 헥헥댔다.
녀석은 가물거리는 눈에 힘을 주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만 보내면 불안해서 안 돼. 가자, 가!〕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리듯 날씨가 변했다.
어두컴컴한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본 마른 비가 다리에 힘을 더했다.
쐐애애액―!
영영 계속될 것 같던 오르막이 끝났다.
비탈길을 따라 다리가 제어하기 힘들 만큼 굴러 내려간다.
자연기는 고갈된 지 오래고, 육신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식구들에 대한 염려가 마른 비를 일으켰고, 강철 같은 정신력이 그를 나아가게 했다.
“다 왔어…!”
천신만고 끝에 겨우 도착했다.
붉은 사암이 빼곡히 박힌 대지.
피를 흠뻑 머금은 듯한 땅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마른 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왜, 왜 하나밖에…?”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인간의 육신이 파괴되는 음향이 선명하다.
한데 자연기가 딱 하나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너무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기운.
수백 명의 적과 싸우는 건 아버지가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없는 거야?”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뭉클뭉클 샘솟는 불안감을 외면하고 싶었다.
허나 잔인한 현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 아냐…….”
적색분지가 내려다보이는 위치까지 왔을 때, 마른 비는 굳어버렸다.
“이럴 리가 없어….”
콰르릉― 쾅!
귀청을 찢는 뇌성과 암천을 밝히는 전광.
피부가 따가울 만큼 퍼붓는 폭우 아래, 식구들은 전부 땅에 엎어져 있었다.
“왜,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마른 비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창백한 안색과 파리한 입술.
북벌에서 수만의 적을 떨게 만든 수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른 일어나야지…. 아버지가 혼자 싸우고 있잖아요…. 빨리 일어나서 같이 싸워요!”
공허한 외침이 빗물에 부딪혀 소멸했다.
“으아아아!”
너무나 보고 싶던 얼굴들.
수년 만에 본 그들은 더 이상 웃을 수도, 울 수도, 화낼 수도 없었다.
모두가 짠 것처럼 비슷한 자세로 엎어져 있을 뿐.
전사들은 핏물 고인 차가운 땅에 몸을 누인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누, 누가 저렇게…… 우리 식구들을…!”
바닥을 드러냈던 자연기가 꿈틀댔다.
마른 비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곧 붉은빛이 푸른빛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마른 비가 섬뜩한 눈으로 너른 하늘과 싸우는 자들을 훑었다.
그들은 전부 북벌에서 본 적이 있는 문파들이었다.
“청성…!”
푸른 옷을 입고 막강한 검진을 형성한 자들이다.
“아미…!”
승복을 입고 머리를 민 여인들.
그들 역시 청성에 못지않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진녹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마른 비가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당… 가…!”
심지어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우측 어깨가 박살 난 채 후방에서 지휘를 하는 자.
당건휘의 얼굴을 본 순간, 마른 비의 이성은 날아가 버렸다.
“죽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몰랐다.
마른 비는 혈광을 뿌리며 날아올랐고, 적색분지를 향해 거칠게 쇄도했다.
〔이런…! 안 돼!〕
별비 또한 푸른 눈의 사체를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
허나 최소한의 이성은 붙들고 있었고, 냉정하게 전력을 분석했다.
그 결과 지금의 몸 상태로 전장에 뛰어들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비아, 이 멍청한 놈아! 멈춰!〕
별비는 마른 비를 말리기 위해 뛰쳐나갔지만, 몇 걸음도 못 가서 거꾸러졌다.
〔이런 젠장! 다리가…!〕
완전한 탈진.
북방 초원에서 중원 남서쪽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기간에 주파했다.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기 전에 당도할 수 있었지만, 이 상태로 전장에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네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걸 식구들이 바랄 것 같냐! 멈춰! 멈추란 말이다!〕
별비가 간곡히 외쳤지만, 마른 비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채 원수들을 향해 달려갈 뿐.
“이야아아!”
비탈을 내달린 마른 비가 적색분지로 뛰어 내리려는 찰나였다.
억센 손아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큭…! 뭐야?!”
반사적으로 휘두른 주먹.
상대는 그걸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마른 비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후우욱― 콰앙!
다리가 꺾이고, 지면이 급속도로 다가온다.
마른 비가 땅에 얼굴이 처박힌 채 발버둥을 쳤다.
“놔! 죽여 버릴 거야! 어떤 새끼가…!”
마른 비가 살벌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움찔하며 저항을 멈췄다.
“……할… 아범?”
마른 비를 멈춰 세운 건 그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리로 올 줄 알았다. 몰라보게 강해졌구나, 비아야.”
그러곤 마른 비를 누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진정해라! 머리를 식혀! 지금 저길 내려가선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놔요!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게 안 보여? 식구들이, 식구들이…!”
분노에 몸을 떨던 마른 비가 눈을 번뜩였다.
“……할아범이 왜 여기 있죠? 식구들이 죽는데, 여기서 뭘 한 거예요? 설마…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거야?!”
그믐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마른 비가 모를 리 없다.
차분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을 뿐.
그믐이 입을 꾹 다물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아야. 할아범이 그럴 리 없잖아. 나 때문이야. 날 지키기 위해서 남으셨어.”
“……여울이 누나?”
여울은 울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도 그녀의 눈물을 가리진 못했다.
그 처량한 얼굴을 보고서야 마른 비는 머리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었다.
“응목대가 쫓아왔어. 아마 후방에서 식구들을 급습하려는 계획이었겠지.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말이야.”
운남에서부터 전대 전사들의 뒤를 따르며, 시체의 상흔을 조작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맡은 또 하나의 임무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와족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뒤를 따르던 응목대는 여울을 발견했고, 기를 쓰며 달려들었다.
와족의 주술사가 전쟁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할아범은 날 지키기 위해 백 명에 가까운 적을 쓰러뜨렸어. 그래서 참전하지 못했지. 비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구(舊) 응목대의 완전한 궤멸이었다.
적색분지에 모인 자들과 운남에 퍼져 있던 자들.
사 년 전 전쟁에서 살아남은 정예들은 그렇게 공지량과 함께 전사했다.
“전사들과 반려수가 순식간에 쓰러져 버렸어. 주술을 펼칠 틈도 없었지.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여울이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주술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밤낮으로 술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식구들이 목숨을 잃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가 느낀 절망감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저기에 뛰어들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비아야.”
그믐이 힘들게 입술을 뗐다.
마른 비는 그제야 자신을 누르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겉으론 침착해 보이지만, 그믐이 마음속 깊이 절규하고 있다는 것도.
“전세가 역전되고, 전대 족장은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했다. 건너편엔 노을이와 청년 전사들이 와 있어. 그들에게 분지에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것은 동시에 그믐에게 하는 부탁이기도 했다.
마른 비가 전쟁 중에 당도한다면, 그를 막아달라는.
분지 남서쪽에 있던 그믐이 여울을 데리고 북동쪽으로 이동한 이유였다.
“가선 안 된다. 네 아비의 마지막 부탁이야. 살아남아서 후일을 기약해라. 비아, 네가 없인 저들을 이길 수 없다.”
그믐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친자식처럼 생각해온 전사들이 전멸하는 걸 지켜본 심정이 오죽할까?
노을이 그랬듯이, 그믐은 갈가리 찢기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참고 있었다.
『오오오오!』
그때, 전투함성이 폭발했다.
빛이 번쩍이고, 비명이 터졌다.
너른 하늘은 구파의 정예 수백 명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권각이 뻗어 나가고, 어깨와 등판이 공간을 밀어젖혔다.
푸르게 타오르는 자연기는 인간의 힘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천 년간 쌓아 올린 와족 무력의 정수가 거기에 있었다.
“헉, 허억…!”
하지만, 끝이 다가왔다.
청성과 아미의 검진이 좌우로 그를 압박했고, 녹수대의 비수가 빈틈을 노렸다.
십좌에 비견되는 장문인 둘과 절정을 넘어선 검대의 수장들이 맹공을 퍼부었다.
신이 아닌 한 홀로 그들을 당할 순 없었다.
추아아악! 촤악―!
결국, 너른 하늘의 무릎이 꺾였다.
상반신에 새겨진 수십 줄기의 검상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선 불길이 꺼질 줄 몰랐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청운진인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왼팔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있었다.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도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반면 금정신니의 눈동자엔 공포감이 가득했다.
“뒤를 받칠 병력이 있었다면…… 뼈를 묻는 건 우리였을 거예요. 공 장문인이 왜 그토록 이자를 두려워했는지 알겠군요.”
너른 하늘은 청성과 아미의 검사 사십 명을 추가로 짓이겼다.
희생자 중에는 부대주급도 네 명이나 있었으니, 보고도 믿지 못할 무위였다.
“후욱, 훅….”
하지만 너른 하늘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더는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었다.
“뭘… 망설이나. 들어… 와라.”
허나,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도 투혼을 불사르는 위대한 전사의 모습에, 정파 연합군은 숙연해졌다.
“인연이 어긋난 점……. 진심으로 안타깝구려. 그대와 같은 자는 다시없을 것이오. 청성의 이름으로 경의를 표하오.”
청운진인이 고개를 숙였다.
금정신니 또한 합장하며 최상의 예를 다했다.
‘여기까진가…….’
너른 하늘 또한 자신의 천명이 다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찌 두렵지 않을까.
물러설 수 없기에 나아갔을 뿐이다.
자신에게 허락된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태웠고, 형제들의 몫까지 싸웠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이은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비아야. 잘 커주었구나.’
너른 하늘은 마지막 힘을 짜내 허리를 세웠다.
‘함께 중원을 여행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른 하늘은 마른 비가 있는 북동쪽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청운진인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남길 말은… 없소이까?”
이럴 줄 알았다면 언령을 보낼 힘은 남겨둘 것을….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건만.
너른 하늘이 점점 흐려지는 눈을 치켜떴다.
아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믿으며.
“없다. 끝내라.”
청운진인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청성 장문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분지에 진입하지 않은, 그대가 지키려는 자들은 쫒지 않을 것이오.”
그러곤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잘 가시게.”
푸우욱―.
심장을 파고드는 쇠붙이는 싸늘했다.
소스라칠 듯한 감촉에도, 너른 하늘은 북동쪽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 아아…!”
마른 비는 아비의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걸 똑똑히 지켜봤다.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웃는 그의 얼굴도.
“아버지이이!”
마른 비가 절규하는 순간, 혈광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