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98화 (398/463)

398화

“으아아아!”

붉어진 눈!

북받치는 살의!

하늘의 빛을 담은 자연기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원한과 증오, 분노로 이어진 살기가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그 강렬한 감정은 그믐 같은 노장을 경악케 할 정도였다.

“아, 아니! 이게 무슨…?!”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이 또렷이 전해진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긴 마음이 울부짖고 있었다.

저것들을 죽일 테니, 날 놓아달라고!

“안 된다, 비아야! 절대 안 돼! 너까지 보낼 수는 없다!”

그믐이 황급히 자연기로 막을 쳤다.

살성에게서나 풍길 법한 지독한 살의를 바깥으로 내보낼 순 없으니까.

이게 발각되면 당장이라도 적들이 쫓아 올라오리라.

“놔! 놓으란 말이야!”

“흡…!”

그믐의 몸이 덜컥 들렸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났단 말인가.

기력이 바닥나서 자신을 뿌리치지 못했는데…….

마른 비가 몸부림칠 때마다 그를 누른 손이 요동을 쳤다.

그믐이 힘을 더욱 끌어 올리며 외쳤다.

“족장령이다! 저 밑으로 내려가선 안 돼! 부족의 규율을 어길 셈이냐?!”

자유분방한 와족에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이 있으니, 바로 족장령이다.

그건 때와 장소, 여건을 불문한다.

족장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것은 무조건 따라야 할 지상명령이 된다.

족장령을 어기는 자, 부족에서 추방되며 즉참에 처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마른 비에겐 먹히지 않았다.

“추방? 마음대로 해! 죽일 테면 죽이라지!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혈광이 더욱 짙어졌다.

그믐의 손이 밀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노장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자연기는 고갈된 게 분명해! 한데 어떻게 이런…….’

그러다가 그믐은 무언가를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것 설마…!’

생기(生氣).

후천적으로 습득한 내외공과 달리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기운.

생기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으며, 개체마다 많고 적음이 다르다.

그건 어떠한 노력으로도 쌓을 수 없는, 타고난 형질과 같다.

생기를 활용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지만, 소진이 되면 복구할 수 없다.

생기가 바닥나는 순간, 숨이 끊기는 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비아, 이 녀석! 생기를 끌어다 쓰고 있구나!’

마른 비는 생기를 소모하고 있었다.

의식적인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눈치로 보아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붉은 기운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으며, 그럼 짚이는 게 있다.

그믐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아버지에게서 이와 비슷한 현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원한과 광기에 사로잡힌 전사……. 감정에 먹혀버려 폭주한 자가 있었다고 했다!’

특출한 전사였다.

누구보다 맑고 선한 마음을 지닌 자였다고도 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모종의 일로 분노에 사로잡혔고, 자연기가 변질돼버렸다.

이성이 날아간 채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고, 부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자도 붉은 기운을 흩뿌렸는데, 생기가 고갈될 때까지 날뛰다가 결국 절명했다고 들었다.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은 아니야. 원한과 분노가 하늘에 닿은 자. 자연기의 성질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만큼!’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언가.

그것이 마른 비의 자연기를 변화시킨 게 틀림없다.

그믐이 마른 비를 힘겹게 억누를 때였다.

연녹색의 기운이 스며들 듯 내려앉았다.

“할아범! 조금만 버티세요! 제가 진정시킬게요!”

여울이 술력을 발동했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술언을 외더니, 마른 비의 이마에 지팡이를 가져다 댔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그리고 어머니 대지시여. 여기 ‘포용자’의 천명을 타고난 이가 있나이다. 그에게 천품을 내리셨다면, 바른길로 인도하소서. 부디 전과 같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살피소서.”

휘오오옹―

희고, 푸르며, 밝고, 노랗다.

여울에게서 뿜어진 기운은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따스하고 포근해 보였다.

그것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마른 비를 뒤덮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토닥토닥 진정시키듯이.

하지만…!

“아아아악!”

마른 비가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이, 이런…!”

여울의 술력은 깊지 않다.

자연기가 그렇듯이 그건 세월이 뒷받침되어야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혈기(血氣)를 억누르지 못한 술력은 도리어 그걸 자극하는 결과만 낳았다.

옅어지는 듯했던 붉은 기운이 원래대로 돌아가며 거세게 날뛰었다.

자연기가 바닥나서 끌어 쓸 기운이 없자, 혈기는 마른 비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크, 크으… 아아아!”

이 순간에도 마른 비의 수명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또 저러는 건가!〕

혼으로 이어진 벗.

별비가 멀쩡했다면 어떻게든 수를 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의서원을 나왔을 때와 달리, 별비는 지금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그믐이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릴 때였다.

기절을 시키든, 움직이지 못하게 팔다리를 분지르든 손을 쓰려는 찰나,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

“사 년 만에 보는 건데 왜 이 모양이야.”

눈물 젖은 음성.

노을은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른 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크, 크으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른 비는 명료한 언어를 구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붉어진 눈을 부라리며 짐승처럼 그르렁댈 뿐이었다.

“많이 슬프구나. 내가 이렇게 힘든데 비아 너는 훨씬 더하겠지.”

노을은 느껴졌다.

마른 비의 갈가리 찢긴 마음이.

부족을 떠난 게 후회되고, 좀 더 빨리 달려오지 못한 게 한스럽다.

내가 더 강했다면.

똑똑해서 이런 일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아버지와 식구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텐데.

마른 비는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울고 있었다.

“아냐. 그게 어떻게 네 탓이 될 수 있겠어.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여기지 마.”

노을은 무릎을 꿇고, 마른 비를 끌어안았다.

볼과 볼을 맞대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힘들지? 그래도 감정에 먹히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해.”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비아 너밖에 없어. 우리 서로 의지하자. 지금은 내가 힘이 되어줄게. 그러니까, 모든 걸 잊고 잠시만 쉬어.”

자연기도, 술력도 아니다.

그건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속삭임이었다.

“크, 으으….”

놀랍게도 마른 비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야수처럼 울부짖던 그가 얌전해졌다.

비통함이 가시고,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던 살기가 잠잠해졌다.

“쉬이……. 눈을 감아. 한숨 자고 일어나. 그러면 한결 나아져 있을 거야.”

마른 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러곤 고개를 툭 떨궜다.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는 영면을 취하듯 잠이 들었다.

사 년 만에 재회한 노을의 품에서.

그믐도 놀랐지만, 여울은 아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포용자의 폭주는 술력으로만 멈출 수 있다고 했는데?!”

문자가 없는 와족의 특성상 과거의 일은 구두로만 전해진다.

하지만 잎의 노래가 전사하는 바람에 여울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이럴 경우, 나이 많은 전사들의 기억과 영묘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 과거의 일을 습득한다.

후대에 전해야 할 정도로 특수한 일일 경우에는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림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 분명해! 어떻게 속삭이는 것만으로 폭주를 멈출 수 있지? 대체 이 두 사람은…!’

‘아우르는 자’와 ‘보듬는 자’.

여울이 하얀 깃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대자연의 이치에 귀 기울여온 영수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와족의 역사에서 극히 드물게 출현했던 ‘포용자’의 자질은 하얀 깃이 언급한 ‘아우르는 자’와 일맥상통하는 게 틀림없었다.

허나 와족에겐 ‘보듬는 자’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

어쩌면 하얀 깃도 그런 게 있다는 걸 아는 것에 그칠지 모른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마른 비를 진정시켰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언니. 포용자라는 게 뭐야?”

노을이 마른 비를 다독이며 물었다.

그믐도 궁금한 얼굴로 여울을 바라봤다.

그 역시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뿐 처음 듣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아, 그건….”

여울은 자신이 아는 바를 간단히 설명했다.

순백에 가까운 영혼.

선하고 맑은 품성을 타고난 자.

백색의 도화지 같은 성품은 다양한 색을 지닌 자들을 자신의 안에 담고, 연결시킬 수 있다고 했다.

운남의 특성상 그건 인간보다는 야수들을 아우르는 결과로 나타나곤 했다.

반려수를 넘어 거의 모든 동물과 가깝게 지내고,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는 존재.

마른 비의 야수 친화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너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어떤 색으로든 물들 수 있어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선과 악의 경계를 극단적으로 넘나들 수 있다는 뜻이죠.”

여울이 우려스러운 얼굴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지만, 자신 또한 다른 색에 물들 수 있어요. 뚜렷한 색채를 지닌 자들보다 더욱 쉽게.”

감정에 먹힐 뻔한 것도 그 일환이리라.

노을이 없었다면 원한과 분노, 증오에 사로잡힌 복수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마른 비의 무력 수준을 감안했을 때, 그건 대살성의 출현을 떠올릴 만큼 아찔한 일이었다.

“후우… 이놈은 정말 볼 때마다 놀래키는구만.”

산이었다.

당장이라도 분지로 뛰어 내려가려던 그는 족장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스스로를 자제했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였지만, 자신마저 그러면 안 된다고 느꼈는지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게 말이다.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야.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안개걸음이 눈물을 훔치며 중얼댔다.

항상 침착했던 그도 머리가 하얘져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새벽 어스름이 노을에게 다가왔다.

“족장님. 이동해야 합니다. 우리 쪽으로 눈길이 모이고 있어요.”

그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청년 전사들도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른 하늘이 남긴 여파는 컸다.

전투가 끝났지만, 분지에 있는 자들은 털썩 주저앉아서 움직이질 않았다.

청성과 아미는 적이지만 경외할 수밖에 없는 남자를 추모했다.

그리고 저주했다.

추악한 탐욕 때문에 산출 불가능한 피해를 입힌 공지량을.

“만약 당가가 이 일에 연루되었다면 절대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오.”

증거가 없어서 추궁하지 못할 뿐, 구파의 생존자들은 당건휘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

하지만 당건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온통 금광에 쏠려 있었으며, 눈은 와족의 청년 전사들을 쫓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것들을 여기서 잡아야 하는데……. 청성의 늙은이 때문에…!’

저들이 금광을 움켜쥐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지경이 되고도 당건휘는 금광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욕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건 전쟁을 지켜본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절대 놓치지 마라. 구파의 장문인이 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금광이야.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붙도록.”

“고작 이십 대 초중반의 어린것들이다.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밟아. 총타에서 병력이 오는 순간 들이친다.”

“수왕? 황제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중론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이민족 놈이 아닌가. 신경 쓸 것 없다.”

공지량은 죽어서도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는 폭우도 욕망의 불길을 꺼뜨리지는 못했다.

탐욕에 찬 눈길이 와족 전사들을 쫓는 가운데, 한탄하는 자도 있었다.

분지의 서쪽 끝, 수풀에 몸을 숨긴 노인이었다.

몸이 불편한지 복부를 움켜쥔 그는 눈가를 떨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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