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 * *
“준비해. 곧바로 빠져나간다.”
시선이 집중되고, 적의가 뭉클거린다.
중원인들의 이목이 모였다는 걸 깨닫자마자, 노을은 이동 명령을 내렸다.
“언니. 별비부터 도와줘.”
마른 비에게 손을 뻗었던 여울이 술력의 방향을 돌렸다.
기력을 북돋는 치유의 술.
연녹색의 기운이 내려앉자, 별비가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 번에 회복되진 않아. 서서히 나아질 테니까 움직여보려무나.”
“가르르릉.”
‘고맙다.’는 의미였다.
노을은 별비가 발을 떼는 걸 확인하고, 산을 바라봤다.
“오빠.”
“알겠습니다. 제가 업지요.”
산이 재깍 다가와서 탈진한 마른 비를 건네받았다.
“어이쿠. 비아 이놈, 그새 엄청 컸네?”
사 년 전엔 자신과 키 차이가 제법 났는데, 이제는 반 뼘 정도로 좁혀졌다.
덩치도 청년 전사들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우람했다.
무엇보다 산의 눈길을 끈 건 상흔이었다.
마른 비의 상체에는 전사의 훈장이나 다름없는 흉터가 빼곡했다.
중원에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강해질 수밖에 없겠어. 대체 어떤 수라장을 거친 거냐.”
흉터라면 산과 안개걸음도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그들의 상처는 대부분 야수의 이빨과 발톱에 의한 것이었다.
마른 비는 달랐다.
검치호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다란 발톱 자국부터 검, 도, 창, 활, 비수 등 인간의 병장기가 남긴 자상흔(刺傷痕)까지.
그야말로 백전노장에게서나 볼 수 있는 흔적들이다.
이토록 다양한 싸움을 겪어본 건 와족에서도 그믐이 유일했다.
“나중에 무용담을 들어야겠어. 청죽사주 한 사발 들이켜면서.”
마른 비의 여정을 다 들으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리라.
운치 있게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
산은 고개를 흔들어서 상상을 털어냈고, 노을을 바라봤다.
“족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설산의 균열에서 추락하며 부러진 다리가 벌써 나았을 리 없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부축을 받아야 했다.
노을이 미간을 찌푸리자, 사내 한 명이 무릎을 꿇으며 등을 내밀었다.
“업히십시오.”
새벽 어스름이었다.
그새 여울에게 치료를 받았는지 그는 손가락을 꿈틀대며 노을을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노을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맡겼다.
그러자 안개걸음이 앞으로 나섰다.
“전력으로 달려야 할 겁니다. 제가 방향을 잡죠.”
“아니, 잠깐만.”
“……?”
이동할 준비가 끝났을 때, 의외의 인물이 선두로 나섰다.
“제가 앞장설게요. 모두 제 뒤를 따라와요.”
여울이었다.
그녀는 주술사 특유의 복장인 긴 치맛자락을 부욱 찢으며 말했다.
“아…! 맞아! 언니, 오감이 굉장히 뛰어났었지!”
노을이 탄성을 터뜨린 반면, 산은 우거지상이 됐다.
“음……. 사 년 전에도 여울이가 우리를 이끌긴 했는데….”
점창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때, 여울은 청년 전사들을 인도한 바 있다.
그때보다 월등히 강해졌음에도 산은 걱정스런 눈치였다.
‘여울이는 족장님과 달라서 연약한데…. 안 되는데….’ 따위의 말이 흘러나오자, 노을이 피식 웃었다.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꼭 티를 내요, 티를 내. 이거, 걱정해줄 이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어?”
실제로 걱정도 되겠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꿍얼거림이었다.
그 덕분에 침울한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이다.
‘꽈앙!’ 소리와 함께 산의 머리통에 주먹이 꽂혔다.
“내가 털끝 하나도 안 다치게 할 테니까 헛소리 좀 작작해라. 벌써부터 이러는 걸 보면 네 미래가 보인다, 이놈아.”
그믐이 노을에게 호응하며 앞으로 나섰다.
슬픔이 너무 큰 탓에 잊고 있었다.
와족의 전설이 건재하다는걸.
그믐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청년 전사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걸음이는 뒤를 맡아라. 족장과 비아를 중심으로 기다란 원진을 짜. 앞을 막는 놈들은 모조리 부수며 나아간다.”
그믐이 남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힘들겠지만…… 현실에 집중해라. 남겨진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우린 살아 돌아가야 해.”
심호흡을 한 그믐이 눈을 빛냈다.
“운남으로 복귀한다.”
* * *
쐐애애액―!
바람이 따갑다.
나무와 풀이 스쳐 지나간다.
줄기차게 퍼붓는 빗방울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얼굴을 때렸다.
와족의 전사들이 사천의 산맥을 순식간에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스름의 등에 업힌 노을이 어렵사리 눈을 뜨며 뒤쪽을 힐끗거렸다.
‘……따라붙는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데도 적들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다.
우선은 중원의 첩보조가 자신들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다는 게 컸다.
주력(走力)이 떨어진다 해도 방향을 아는 이상 어떻게든 쫓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운남의 특성을 고려한 것일까?
중원의 문파들은 험난한 지형에 익숙한 자들을 파견했다.
적색분지에 있던 자들은 와족만큼은 아닐지라도 숲과 늪, 산악지형을 읽는 눈이 상당했다.
‘괜찮아. 당장은 덤비지 않아!’
천만다행인 건 적들에게 싸움을 걸 만한 병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른 비와 운남의 상황을 살피고자 파견된 첩보조일 뿐 전투수행능력은 떨어졌다.
전부 합치면 상당한 숫자지만, 풍기는 기운도 제각각이다.
자기들끼리도 견제하는 걸로 볼 때, 적들은 다양한 집단에서 파견된 자들이 분명했다.
‘녹색 옷을 입은 자들. 그놈들이 쫓아왔다면 곤란했을 거야.’
노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른 하늘을 공격한 적들 중 녹색 옷을 입은 자들의 수장이 전사들을 끝까지 노려본 것을.
그의 눈은 탐욕에 불타고 있었고, 그건 단순한 적의보다 훨씬 위험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집요함이 담긴 눈빛.
오늘 처음 보았지만, 공지량이란 놈의 눈이 딱 그랬다.
‘푸른 옷. 그리고 주황색 옷을 입은 여인들. 그들은 왜 녹색 옷을 말린 거지?’
영민한 노을은 청성과 아미가 당가를 제지한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들 역시 공지량의 계략에 휘말렸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사정을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으리라.
그들이 전대 전사들을 살해하고, 너른 하늘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우측으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노을의 상념을 깼다.
여울은 타고난 오감에 술력까지 가미하여 와족이 나아갈 길을 밝혔다.
여울 덕분에 지금껏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고, 그녀의 감각은 그믐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했다.
“아…!”
하지만, 결국 맞닥뜨리고 만다.
지금 와족의 앞에 있는 자들은 뒤늦게 대리에서 북상한 요원들이었다.
경로가 비슷하고, 이쪽의 숫자가 많다 보니 모두를 따돌릴 순 없었다.
“엇…!”
말끔한 복장과 정순한 기운을 지닌 무인.
그는 전사들을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멈췄다.
쾌애애액―!
그 순간, 그믐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살수를 펼쳤다.
정파의 요원으로 짐작되는 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슴이 꿰뚫렸다.
“왜, 왜 나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억울한 표정.
그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요원의 숨이 끊기기도 전에 우측 전방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2인 1조였던 게 분명하다.
몸을 드러낸 자와 숨은 자.
그믐은 은신해 있는 요원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숨통을 끊었다.
“피아를 가릴 여유가 없다. 우릴 살피기 위해 온 놈들이라면 결국 적으로 돌아설 확률이 높아.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모조리 죽이마.”
그믐은 팔뚝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았다.
하지만 빗물이 금세 씻겨주었고, 그건 노을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믐 같은 사람이 다짜고짜 살육을 벌이는 건, 그리고 피를 닦을 여유도 없다는 건 그만큼 초조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거의 다 왔어요!”
미친 듯이 쏟아붓는 비를 맞으며, 청년 전사들은 산맥을 주파했다.
조금 더 가면 사천과 운남의 경계가 나타나며, 오목한 산길을 달려 내려가면 영인이다.
우측 저 멀리 평야지대에 세워진 시가지가 보였다.
운남을 나와 제일 처음 마주치는 도시, 덕창(德昌)이었다.
“아…!”
산길을 달리던 여울이 주춤하며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자, 그녀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막혔어요……. 보이진 않지만, 전부 다 막혔어. 엄청난 숫자가 운남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막고 있어요!”
“……!”
이게 무슨 말인가.
전투가 끝나자마자 적색분지에서 빠져나왔다.
요원들이 사방으로 달려가고, 전서구가 나는 건 보았지만, 그건 금광에 대한 정보가 유출된 후다.
한데 벌써 여기까지 병력을 파견한 자들이 있다고?
천하제일경공의 고수라도 그사이에 여기까지 달려오는 건 불가능했다.
와족 전사들이 난감해할 때, 먼 앞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원의 용병연합입니다. 수왕이 섬서를 넘을 때부터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었죠.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저들은 뒤늦게 움직였고, 얼마 전에 운남에 들어왔어요.”
십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청년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를 잘 굴릴 것 같은 인상.
약삭빠르거나 음험한 느낌은 없었다.
굉장히 호의적인 느낌이 전해지지만….
쾌애애액―!
그믐은 지체 없이 날아올랐다.
청년의 무공은 형편없으나 은신 하나만은 제대로 수련한 듯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자, 잠깐만…!”
청년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러다 살기 어린 그믐의 눈빛을 보았고, 오금이 저려서 물러나지도 못했다.
올빼미 사냥이 날아드는 순간, 청년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비, 비아의 친구입니다아…!”
우뚝.
자연기를 머금은 손끝이 목젖 앞에서 멈췄다.
청년이 살 수 있었던 건 마른 비의 와족식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왕이나 건우 따위의 이름이 나왔다면 그믐은 가차 없이 목을 뚫어버렸을 것이다.
“후, 후아…….”
청년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믐이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그는 준비한 말을 토해냈다.
“저, 저리로 가면 안 됩니다! 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포진하고 있어요! 군길산은 부상 때문에 내려오지 않았지만, 연합의 단주들이 떼거리로 몰려왔습니다!”
“……군길산? 구름절벽에서 떨어진 그놈이 살아 있단 말이냐?”
그믐의 눈썹이 꿈틀하자, 청년은 ‘히익!’ 하며 말을 쏟아냈다.
“그, 그렇습니다! 만신창이가 됐지만, 용케 살아 돌아간 모양이에요! 아무튼 저기로는 가면 안 됩니다! 다들 전투를 치르신 상황이지 않습니까!”
청년 전사들이 설산에서 싸운 것을 알 만큼, 사내는 와족의 상황에 대해 빠삭했다.
그래서 의심스럽다.
그믐의 눈이 가늘어지자, 청년은 혼이 빠질 듯한 얼굴로 외쳤다.
“개방이든, 하오문이든, 동월루든! 덕창 일대와 운남 북부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자는 없습니다! 수년간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거든요!”
청년은 하오문 덕창의 분타주, 단이수였다.
마른 비가 들개 패거리를 쓸어버리는 바람에 덕창의 길거리를 쥐었고, 꿈에 그리던 하오문에 가입했다.
그리고 마른 비와 와족이 곤경에 처하자 돕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뒤쪽에 따라오던 놈들은 제 식구들이 눈을 돌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또 따라붙을 거예요! 지금 바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동? 어디로 말이냐?”
단이수는 운남의 경계와 덕창의 사이, 서쪽을 가리켰다.
“이대로 건너편의 산맥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위로 길쭉하게 올라온 운남의 서북부로 넘어가야 해요. 얼마 전에 싸움이 벌어졌던 매리설산 방향이죠.”
“거긴….”
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산지대다.
만년설이 덮일 만큼 높은 산맥이 가로막은 곳.
매리설산도 운남 방향으로 뚫린 남쪽에서 진입할 수 있을 뿐, 다른 곳은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제가 길을 압니다! 고난의 행군이 되겠지만, 그리로 넘어갈 수 있어요! 만약을 대비하여 운남으로 진입하는 길은 전부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믐이 단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들을 도와준 게 알려지면 난처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이수는 눈치 빠르게 그믐의 의중을 읽었다.
“비아가 아니었다면 저와 제 식구들은 여전히 억눌려 살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칼 맞고 비명횡사했을 가능성이 높죠. 비아는 아무것도 아닌 제게 따뜻한 국수를 사주고, 친구로 받아줬어요.”
어린 시절의 작은 인연으로 여겨도 그만이다.
하지만 단이수는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저희 같은 길거리 인생들은 허구한 날 의리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걸 진짜 지키는 놈은 드물죠. 저는 아직 어리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단이수의 눈에 힘이 깃들었다.
그 눈빛은 와족 전사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스치듯 지나쳤던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냥은 못 갑니다. 첩보조와 용병연합의 눈을 돌려야 해요. 저들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길 만큼 강한 분…….”
단이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려운 말을 주저 없이 꺼냈다.
“한 분이 희생하셔야 합니다. 누가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