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00화 (400/463)

400화

“제가 가죠.”

“내가 간다.”

“아니, 제가 갑니다.”

산과 그믐, 안개걸음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서는 모습에, 단이수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신 게 아닌지……. 단순히 싸우러 가는 게 아닙니다. 남는 사람은 미끼나 다름없어요. 죽을 확률이 높은….”

단이수가 심각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과 위험성까지 알고도 나선 거였다.

산이 등에 업은 마른 비를 다른 전사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목을 끌려면 난장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힘이든 체력이든 제가 적격이에요. 가장 오래 버틸 자신도 있고요. 무조건 제가 갑니다.”

그러자 안개걸음이 질세라 대꾸했다.

“넌 굼떠서 안 돼. 적들을 유인하려면 민첩해야 한다. 몸놀림, 속도, 상황 판단…. 나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어. 내가 간다.”

그믐이 어림없다는 듯이 말했다.

“애송이들. 미안한 얘기지만, 너희에겐 벅차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기에 십 년은 일러. 둘은 노을이를 보좌해라. 내가 간다.”

세 사람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단이수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끼어들었다.

“……죽을 자리라는데, 서로 미뤄야 정상 아닌가요? 대단하시네요, 정말.”

그러곤 시간이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가장 센 사람이 가는 게 확실합니다. 세분 중 누가 제일 강하시죠?”

산과 안개걸음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고, 그믐은 클클거리며 웃었다.

“나다. 늙긴 했어도 꼬맹이들보다는 훨씬 강하지. 난 살 만큼 살았어. 여러모로 이 역할은 내가 적격이다.”

“그렇군요. 그럼 어르신께서….”

그때,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범도 안 돼. 힘은 충분할지 몰라도, 존재감이 떨어져.”

“……비아?! 정신이 든 거냐!”

마른 비였다.

바위 곰 전사에게 업혀 있던 그가 땅에 발을 디뎠다.

그믐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 존재감이 떨어진다고? 허허, 이놈의 자슥이 머리 좀 컸다고 못 하는 소리가 없구먼.”

쏟아지는 빗방울이 정신을 일깨운다.

마른 비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단이수를 보며 말했다.

“이수, 오랜만이야. 그땐 소년이었는데 많이 컸네.”

“비아야…!”

자신이 그렇듯이 마른 비도 자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단이수가 감격한 얼굴로 마른 비의 손을 붙잡았다.

“인사는 나중에. 시간이 없어. 식구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움직여.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하, 하지만 넌….”

단이수는 와족에게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다.

마른 비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그의 심신이 엉망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산과 안개걸음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른 비를 말렸다.

“비아야. 넌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전투를 치르는 건 무리야.”

“맞아. 이 일은 할아범께 맡기는 게….”

하지만, 마른 비는 단호했다.

“안 돼. 적들은 바보가 아니야. 누군지도 모를 노인을 따라갈 것 같아? 금세 미끼란 걸 눈치챌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전사로서의 존재감은 부족할 리 없지만, 그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즉,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길 명성이 모자란 것이다.

단연코 와족에서 적들을 유인할 자로 마른 비보다 적합한 자는 없었다.

“여울이 누나 덕분에 체력은 제법 회복됐어. 내가 나타나면, 다들 날 주목할 거야. 내가 시간을 끌 동안 식구들을 인도해줘.”

더 이상 식구들이 쓰러지는 건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못 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마른 비는 타당한 근거를 들어 모두를 설득했고, 반론을 허용치 않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용병연합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때, 여인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사 년 만인데 인사도 안 하고 갈 거야?”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려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됐다.

“저 바보, 표정하고는. 멀뚱히 서 있을 거야? 이리 와.”

노을이 어스름에게 업힌 채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스름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지만,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굳건히 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먼 곳만 바라봤다.

“으음…….”

마른 비가 그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그러다가 심호흡을 하고, 노을과 눈을 맞추며 다가갔다.

“비아 너….”

노을이 입을 열 때, 마른 비가 먼저 말했다.

“보고 싶었어.”

“……!”

노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른 비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말은 이어졌다.

“진짜 보고 싶었어. 만나면 꼭 이 말을 하고 싶더라.”

“무,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갑자기….”

태어나서 이토록 당황한 적이 없다.

노을은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런 쪽으로는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마른 비가 아닌가?

노을은 자신이 고백을 할 작정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 마음을 전하지 못하면 영영 후회할 테니까.

무수한 죽음을 본 뒤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바보멍청이가 사내다운 얼굴로 자신의 마음을 전해온다.

노을은 말문이 콱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해. 노을아.”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노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개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가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이 순간, 노을의 눈에는 마른 비만이 가득했다.

“나, 나도….”

원래는 대차게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다.

왜 이제 왔냐고, 그동안 뭘 했냐고, 식구들이 걱정되지도 않았냐고…….

나 안 보고 싶었냐고…….

그렇게라도 해야 그간의 서운함이 풀릴 것 같았다.

한데 기껏 나온 건 들릴락 말락 한, 멋대가리 없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야수들을 호령하고, 전사들을 지휘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마른 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식구들을 부탁해, 노을아. 여행 이야기는 다녀와서 들려줄게.”

“아…….”

이 순간이 쭉 계속됐으면 좋겠다.

지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지만, 이젠 현실로 돌아올 때였다.

노을이 눈을 꾹 감았다 떴을 때, 그녀는 한 명의 여인이 아닌, 와족의 족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족장의 명령이야. 무사히 살아 돌아와. 알았지?”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족장님.”

마른 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등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별비야.”

폭우 속으로 널찍한 등이 멀어졌다.

그믐이 그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얼댔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할 거는 다 하고 가는구먼. 어리숙하던 꼬맹이가 많이 컸어. 아주 제법이야.”

와족 전사들은 마른 비와 별비가 무사 귀환하길 기도했다.

그들은 늠름한 뒷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단이수를 따라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콰르르릉! 콰쾅―!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빗줄기.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만큼 쏟아붓는 빗속에서, 마른 비는 마지막에 단이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수. 사람을 찾아줘.’

‘사람? 누구?’

단이수가 묻자, 마른 비는 대꾸했다.

‘두 명이야. 내 이름을 대고, 만금당에 물어봐. 그들의 협조와 하오문의 능력이면 찾는 게 어렵진 않을 거야.’

알겠다는 끄덕임을 끝으로, 단이수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부턴 전쟁이야.’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리라.

동쪽과 남쪽의 부산스러운 기척을 느끼며, 마른 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지금 나를 보고 계실까?

아파하고 계실까, 편히 쉬고 계실까?

싸움에 나서려는 자신을, 적들에게 쫓기는 식구들을 보면 어떤 마음일까?

‘청성, 아미, 당가…!’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황이었지만, 또렷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심장을 파고들던 칼날이.

식구들을 살해한 적의 얼굴이.

‘절대 잊지 않아. 식구들을 해친 놈들. 분지에 있던 놈들…!’

아버지는 자신의 대에서 벌어진 일을 완수했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공지량의 숨통을 끊었고,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점창의 반란세력을 몰살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과 청년들이 복수하는 걸 원치 않으실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그럴 수 없어요.’

피에는 피를!

아버지는 관용과 용서로써 점창과의 공존이라는 미래를 선물했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도, 능력도 없다.

적색분지에 들어섰던 놈들은 전부 죽인다.

식구들을 위협하는 놈들도 마찬가지.

힘과 명성. 그리고 두려움.

건드리면 죽는다는 공포를 각인시켜야 비로소 안전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른 비는 사 년간의 중원행으로 절절히 깨달았다.

‘한 번만 마음껏 울게요.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찢어지는 가슴.

어깨를 짓누르는 회한.

심장이 타버릴 듯한 분노.

그리고… 아비에 대한 그리움.

“아아, 아아아아!”

마른 비가 억눌렀던 감정을 해방했다.

사천에서 운남으로 넘어가는 경계.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절규가 울려 퍼졌다.

온갖 감정이 버무려진 그것은 포효인 동시에 흐느낌이었고, 적들을 불러 모으는 도발이기도 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마른 비의 울음을 가려주었다.

하늘이 그를 위로하듯 진한 눈물을 흘렸다.

잠적

중원 용병들의 연합체.

혈조단이 군길산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훨씬 오래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명문 단체도 존재한다.

그중 백골단(白骨團)은 잔인함과 무자비함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단주인 기주은은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카악~ 퉤! 지형 한번 더럽구만.”

얼굴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칼자국.

사선을 넘은 증거인 그것은 그의 녹록지 않은 일생을 짐작하게 했다.

기주은은 험악한 인상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는 자였고, 운남부터 사천까지 이어진 산악지형 때문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날씨도 엿 같아.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거냐!”

기주은이 하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수하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단주의 잔인한 성정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고, 그가 기분이 안 좋을 때 걸리면 그대로 황천행이다.

지형이나 날씨도 문제지만, 기주은의 기분이 최악인 건 군길산 때문이었다.

수하들은 운남으로 오기 전, 단주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절대 안 돼. 이 꼴이 안 보이나? 파병은 안 된다.’

병석에 누운 채 회의에 참석한 군길산의 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연합의 단주들이 그가 요양 중인 의원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의 행색은 십좌의 일인이라는 게 무색하게도 엉망진창이었다.

‘가면 안 된다. 혈조단이 쪽도 못 쓰고 깨졌어. 특히 그놈……. 그, 그 괴물 같은 놈! 너희가 봤어야 한다. 시퍼런 주먹이 날아오는데… 으, 으아악…!’

군길산은 말하다 말고 공포에 질려서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곤 거품을 물며 발작을 일으켰다.

심혼에 각인된 공포.

오만하기로 유명한 군길산이 겁에 질려서 떠는 건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는 자도 있었다.

‘우리 좀 솔직해지지. 의뢰금을 독식하려다가 탈이 난 건 아니고?’

야차단(夜叉團)의 단주 무석노였다.

거대한 쌍부를 무기로 쓰는 그는 겁이 없기로 유명했으며, 군길산이 뜨기 전까지는 백골단의 기주은과 함께 용병계를 주름잡던 절대 강자였다.

군길산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맞다. 수왕의 부족을 털고, 가능하면 수왕까지 잡으려던 게 본래의 계획이었지. 연합으로 들어온 의뢰비에, 수왕에게 걸린 현상금까지. 너라면 안 그랬겠나?’

돈 하나로 뭉치고, 움직이는 게 용병계의 하나뿐인 행동원리다.

그래서 군길산의 뻔뻔함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욕심을 부리다 실패한 패배자에게 싸늘한 조소를 날릴 뿐.

무석노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혼자 움직이니 실패한 것이다. 예상외로 강한 놈이 있는 모양이지만, 쪽수로 밀어붙이면 버틸 놈은 없어. 우린 갈 거다.’

와족을 치러 간 군길산과 달리 용병연합의 목표는 마른 비였다.

그랬다가 뒤늦게 어마어마한 의뢰가 들어왔고, 군길산이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어받으면 된다.

용병연합은 의뢰인이 누군지 몰랐으며, 그들이 움직일 시점에 공지량은 살아 있었다.

연합의 목표가 수왕에서 와족 전체로 수정된 순간이었다.

‘안 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가지 마라! 운남에 들어가면 안 된단 말이다! 겨우 쌓아 올린 연합을 무너뜨릴 셈이냐!’

군길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단주들은 무시했다.

특히 기주은은 대놓고 군길산을 비웃었다.

‘십좌라고 깝칠 때부터 알아봤다. 몸도 망가졌고, 혈조단도 모조리 잃었지. 넌 끝이다, 군길산. 더 이상 연합에 네가 설 자리는 없어.’

군길산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기주은을 노려봤다.

‘약한 놈들만 골라 죽이는 쓰레기가 감히 누구에게…! 팔다리 박살 났다고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으냐? 여기서 목을 뽑아줄까?’

심신을 짓누르는 살기.

곧 죽어도 십좌라고, 군길산은 기세만으로 사위를 찍어 눌렀다.

평소 그에게 두려움을 느껴온 기주은은 식은땀만 흘리다가 뒤돌아 나왔다.

‘병신 같은 새끼가 누구에게 기어 올라! 이봐, 무석노! 난 분명히 경고했다! 수왕과 그의 일족을 건드리지 말라고! 연합이 무너지면 그건 너희 책임이다!’

단주들은 싸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운남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거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망신을 당한 기주은은 의원을 나온 뒤에야 죽일 듯한 눈으로 군길산 쪽을 노려봤다.

* * *

“이리로 지나갈 거라고 하지 않았나! 왜 안 오는 거냐! 아앙?!”

기주은이 짜증이 난다는 듯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수하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그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릴 때였다.

“아아아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절규가 들렸다.

용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곧 서로를 바라봤다.

“왔다! 야만인 놈들이다!”

기주은이 칼질을 멈추고 반색을 했다.

그러곤 우렁차게 외쳤다.

“백골단! 사위를 철저히 에워싸라! 소리를 지른 놈을 잡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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