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01화 (401/463)

401화

후두두둑― 후두둑.

귓가를 긁는 빗소리가 어지럽다.

사위가 어둡고, 체온이 떨어진다.

기주은은 덤불을 헤치며 천천히 전진했다.

‘여기다. 소리의 진원지는 여기가 틀림없어!’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기주은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세 명, 앞으로 전진.’

미리 약속된 수신호가 떨어지자, 백골단원 세 명이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킨 뒤, 한껏 자세를 낮추며 발걸음을 뗐다.

꾸드득.

“……!”

발을 내딛는 순간, 비에 젖은 땅이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고, 용병들이 서로를 돌아봤다.

‘후우…….’

다행히 적에게는 발각되지 않은 모양이다.

발소리를 낸 용병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 순간!

우드드득!

그의 목이 거꾸로 돌아갔다.

이마를 닦던 손까지 함께!

“저, 적이다!”

함께 나섰던 두 명이 기겁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우둑! 우드득!

그 둘 역시 삽시간에 목뼈가 부러져 버렸다.

코앞에서 수하 셋을 잃은 기주은은 하얗게 질렸다.

“뭐, 뭣들 하고 있나! 쳐라!”

무의미한 명령이었다.

누구도 공격자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어, 어디를?!”

“단주님!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치를 찾을 수 없어요…!”

백골단원들이 기감을 끌어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느낄 수도 없다.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에게 당한 것처럼.

새카만 어둠 속엔 숲이 드리운 그림자와 빗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빠드득! 콰득―!

“……!”

또 셋이 죽어 나갔다.

기가 막힌 건 진영의 외곽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던 자들이 쓰러졌다는 것.

무슨 수를 쓴 건지 적은 기주은과 백골단의 주력을 건너뛰고 후방에 있는 자들을 살해했다.

“위다! 위를 조심햇! 적은 나무 위에 있다!”

기주은의 판단은 빨랐다.

귀신이 아닌 한 아군의 틈새를 돌파하여 후방을 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또한 공격을 할 때의 기척으로 보아 적은 하나다.

그렇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여 공중에서 목을 비튼 것이리라.

백골단이 일제히 고개를 들 때, 이번엔 진영 외곽에서 비명이 터졌다.

“컥…!”

“크악!”

그리고 이번 습격은 허공에서 행해지지 않았다.

“아, 아래다! 적은 나무 위에 있는 게 아니… 커헉!”

가슴이 뚫린 용병이 피거품을 게워내다가 엎어졌다.

돌아버리겠는 건 열 명 가까이가 당했는데 적의 그림자도 보질 못했다는 점이었다.

“뭉쳐라! 밀집 대형을 짜! 서로 등을 맞대고 사방을 주시하란 말이다!”

기주은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명령을 내렸다.

백오십에 달하는 백골단이 서너 명씩 등을 맞대고 사위를 경계했다.

“후욱, 훅…!”

“아,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기주은은 공격 시의 기척이라도 느꼈지만, 그를 제외하고 적의 존재를 감지한 자는 없었다.

심지어 부단주급조차도.

울창한 수림, 빗속에 숨은 사신이 죽음의 낫을 드리우고 있었다.

“……우, 우리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공포가 백골단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호통이 터졌다.

“개소리 지껄일 시간에 기감을 돋워라! 귀신이니 유령이니 우리가 언제 그딴 걸 믿었나!”

기주은이었다.

그는 괜히 단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돈이다! 그리고 우린 힘으로 돈을 지배해온 백골단이야! 정신 차리란 말이다!”

효과가 있었다.

용병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고, 사선을 넘어온 경험을 되새겼다.

“그, 그래! 귀신은 무슨!”

“살수다! 야만인 중에 특급 살수에 버금가는 놈이 있는 거야!”

귀신이 아니라면 대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어둠과 비.

시각과 청각, 암습의 기척을 묻어버리는 그 두 가지만 사라지면 된다.

아니, 그중 하나만 걷혀도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리 없었다.

‘시간 싸움…! 버티기만 하면 돼!’

‘운남으로 가려면 여길 통과해야 한다. 이대로 경계하며 자리를 지키면…!’

백골단이 서서히 여유를 찾아갔다.

그리고 빗속의 암습자는 숨을 고르며 적들을 주시했다.

‘지형과 빗물의 결. 적들의 호흡.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틈이 보인다.

한 번 더 손을 쓸까?

무리를 하면 이십 명은 더 눕힐 수 있을 텐데.

‘아냐. 그러면 겁을 먹어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이 정도가 딱 좋아.’

마른 비는 욕심을 끊어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봐라! 내 말이 맞지?! 경계를 펼치니 까불지를 못하잖나!”

기주은의 신이 난 목소리를 뒤로 하며, 마른 비는 백골단을 놔두고 떠나버렸다.

* * *

백골단이 암습에 발이 묶였다면, 야차단은 뻔히 보이는 기습에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추아악! 촤악!

“컥…!”

“크아악!”

커다랗고 하얀 형체가 어둠을 뚫고 튀어나온다.

번쩍하며 서너 명을 찢어놓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쫓아가 보면, 아무것도 없다.

마치 하얀 유령이 어둠에 녹아든 것처럼.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냐!”

무석노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통을 터뜨렸다.

“백호다! 수왕이 데리고 다닌다는 짐승이 분명해! 한데 이게 무슨…!”

어둠에서 튀어나오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영수라고까지 불리는 괴물이니 재빠른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은신이라니?! 짐승이 비와 어둠을 이용해서 지형에 녹아들어?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미치고 폴짝 뛸 일이었다.

위치는 가늠할 수 있다.

속도도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런데 쫓아가 보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때려잡고 싶어도 은신에 돌입하면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몸을 숨기는 게 아냐! 이건… 살수 비기나 다름없지 않나!’

검치호에게 쫓겨 독림에 숨어들었고, 살아남기 위해 숨는 법을 배웠다.

중원에 나와서도 몸을 드러낸 시간보다 은신한 채 움직인 시간이 곱절은 길다.

타고난 힘으로 적을 뭉개는 여타의 맹수들과 달리, 별비는 온갖 싸움법에 능통했다.

그중에서도 은신은 녀석의 주특기였으니, 지형과 날씨, 시간까지 등에 업은 기습은 야차단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추악! 촤아악!

“크학!”

“카하학!”

무석노가 길길이 날뛰는 사이, 후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는 질린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어, 언제 저기까지…?”

무석노가 신음을 흘리는 중에도 야차단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다.

“아아악!”

“다, 단주님! 못 막습니다! 무기가 버티질 못해요!”

“죽기 싫어! 씨, 씨발! 이거 어떻게 좀… 카학!”

이번에 하얀빛이 번뜩인 건 무석노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기습을 멈추지 않으며, 백삼십 명이 밀집한 진영을 반 바퀴 돈 것이다.

‘이런 미친 기동력이라니…!’

뻔히 보면서도 손쓸 방법이 없다.

기주은이 그랬듯이 무석노의 선택지도 정해져 있었다.

“밀집하라! 전부 한 덩어리로 뭉쳐! 무기를 세우고 전면을 방어하란 말이다! 달려드는 순간은 보이니, 그때 요격하는 거다!”

야차단이 방진을 구축하자, 공격이 뚝 멈췄다.

어둠과 비를 방패 삼아 전장을 휘젓던 사신이 자취를 감췄다.

“후욱, 훅…!”

“……가, 갔나?”

야차단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별비는 다른 곳으로 뛰고 있었다.

* * *

먼저 암습했던 적들과 달리, 여기 있는 놈들은 그럴 필요도 없다.

마른 비는 모습을 드러낸 채 적에게 달려들었다.

우드득! 뻐억! 빠지직―!

꺾고, 후려차고, 부순다.

필요한 순간, 타격 부위에만 최소한으로 흘려넣는 자연기.

오래전, 독림에서 깨달은 무의 이치다.

자연기의 효율적 운용은 완전히 마른 비의 일부가 돼 있었다.

“끄아아악!”

“모, 못 막아! 대장! 살려주십쇼!”

잔챙이들이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풍기는 기질만 비슷할 뿐 여기 있는 놈들은 앞서 상대한 놈들보다 두 수는 아래였다.

“수, 수왕! 수왕이 여기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정예들과 앞으로 나섰다.

일곱 명.

무리를 이끄는 자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수왕의 명성에 주눅이 들었으면서도 무기를 뽑았다.

예상외로 해볼 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듣던 것보다 약해! 수왕의 비기는 적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깨부순다고 했다. 하북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지쳤거나….’

명성이 과장된 것이다.

용병대장은 후자라고 봤다.

수년간 지켜본 군길산과 비교할 때, 수왕이 주는 위압감은 그에게 한참이나 못 미쳤으니까.

‘흐흐흐. 현상금은 내 꺼다!’

대장과 부대장들이 달려드는 순간, 마른 비의 등판이 돌아갔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막대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비, 빌어먹을! 속았…!”

투콰아아앙―!

천둥바위가 일곱 명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수뇌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하자, 용병단은 공포에 질렸다.

“히익! 도, 도망가!”

“백골단 쪽으로 뛰어! 이런 건 못 이긴다!”

“우, 우린 야차단 쪽으로…!”

적들을 둘러보던 마른 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백골단? 야차단?’

눈치로 보아 절반은 방금 전에 묶어둔 놈들 쪽으로, 나머지 절반은 별비가 간 쪽으로 뛰는 모양이다.

잘됐다.

그러려고 센 놈들을 먼저 친 것이었으니까.

‘똘똘 뭉쳐라.’

마른 비가 땅을 내려다보며 지형을 가늠했다.

산의 굴곡을 타고 빗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쪽.

길게 늘어선 적들 중 가장 낮은 지대에 있는 자들에게 간다.

그리고 거기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거야.’

별비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지 비명이 점점 가까워졌다.

마른 비는 적들의 위치를 가늠한 뒤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 *

“씨발! 씨바아알!”

기주은이 광인처럼 소리를 질렀다.

마른 비가 깔짝깔짝 치고 빠지는 탓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수왕은 전사가 아니었나? 뭐 하던 놈이길래 살수 비기까지 익힌 거지?!’

뒤늦게 암습자가 수왕이란 걸 알게 됐다.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눈치 빠른 기주은은 맹점을 알아챘다.

‘놈은 우리를, 이 기주은과 백골단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그러니까 암습이란 패를 들고나온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소수만 죽이고 빠져나간 것이다.

왜? 정면으론 이기지 못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주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병력을 미끼로 던져서라도 잡았어야 했어! 놈이 수왕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현상금은 자신의 것이 됐겠지.

통탄할 일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수왕에게 깨진 약소 용병단이 하나둘 합류하고, 서서히 날이 밝아오자, 기주은은 마른 비를 쫓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뻐억―!

하지만 쉽지 않다.

엄청나게 빠르며, 놀라울 정도로 추격전에 능숙하다.

기주은과 용병연합은 언뜻언뜻 비치는 마른 비의 뒷모습을 쫓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투쾅―!

“커허허헝!”

그때, 범의 포효가 산중을 울렸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이 난자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좌측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휙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악에 받친 고함이 터졌다.

“카아악! 쫓아라! 망할 범 새끼를 갈가리 찢어버려!”

눈이 벌게진 무석노가 숲을 뚫고 뛰쳐나왔다.

그의 오른쪽 팔뚝엔 거대한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는데, 수왕이 데리고 다니는 범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기주은?! 너희도 이쪽으로 왔나!”

무석노는 반가운 눈치였다.

눈인사를 하며, 기주은은 남은 병력을 가늠했다.

‘이쪽과 저쪽을 합치면… 팔백하고도 수십? 밤새 백 명 넘게 당했나?’

뼈아픈 일이지만, 상관없다.

백골단의 피해는 스물 안팎이 전부니까.

야차단도 삼십여 명이 줄었지만 건재한 듯했다.

가장 강한 용병단 두 개가 멀쩡하고, 수장을 잃은 용병들이 자신과 무석노에게 모여들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에는 이편이 훨씬 좋았다.

‘좋아! 수왕을 잡고, 그의 일족을 뒤쫓아서 몰살한다!’

매복 따윈 있을 수 없다.

수왕이 남은 이유는 그의 부족을 빼돌리기 위한 것일 테니까.

거금이 코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카아합!”

기주은이 기합을 지르며 수풀을 절단했다.

그러자 탁 트인 공지가 보였다.

뿌옇게 밝아오는 시야.

아침해가 물안개에 가려져 떠오르는 가운데, 용병연합은 마침내 표적과 마주할 수 있었다.

“후욱, 훅….”

예상이 맞았다.

수왕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피로한 기색과 들썩이는 어깨.

숨을 몰아쉬는 이족의 청년을 보자, 기주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흐흐흐. 그럼 그렇지….”

기주은이 자신만만하게 선두로 나섰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렸는데, 공지에 죽어나자빠진 오십여 명의 용병들 때문이었다.

발목까지 고여서 흐르는 핏물이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번엔 움찔하며 멈춰서야 했다.

“크르르르….”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빛.

공간이 일그러지며 집채만 한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왕을 호위하듯 감싼 맹수는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 무슨 놈의 짐승이…!’

기주은은 별비의 존재감에 움츠러들었다가, 금세 평정을 회복했다.

백호의 몸에 새겨진 자상.

그리고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어깨.

그게 기주은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크흐흐. 네 녀석도 지쳤구나.”

추가로 죽은 오십을 빼도 팔백에 달하는 병력이다.

이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체력을 회복할 틈을 주지 마라. 전군, 돌격….”

기주은이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한발 앞서 마른 비의 입술이 열렸다.

“여기까지 따라오느라 고생했어. 그럼… 전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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