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기주은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전부 죽으라고? 설마 그거 우리에게 하는 말인가? 크큭! 수왕, 수왕, 하도 시끄럽길래 살짝 쫄았는데… 겨우 이 정도였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마른 비를 비웃었다.
“벼랑 끝에 몰리자마자 정신줄을 놓는 놈이 왕은 무슨? 말해봐라. 네가 어떻게 우리를 죽인단 말이냐?”
마른 비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양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뒤에 넓게 벌릴 뿐.
파지지직―!
마주 본 손바닥 사이로 뇌광이 번쩍였다.
하늘의 광기가 수왕의 부름에 응답하니, 푸르른 빛이 지상에 강림했다.
콰르르릉―!
속성기가 뇌성벽력을 쏟아내자, 기주은의 낯빛은 뇌기보다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자, 잠깐…! 이거 설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
기주은의 눈길이 땅을 향했다.
산맥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발목까지 찰랑인다.
저지대에 우묵하게 패인 공지는 마른 비가 용병연합을 몰살하기 위해 준비한 사냥터였다.
“아, 안 돼! 전부 뛰어어어!”
마른 비의 투창은 기주은의 외침보다 빨랐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뢰창은 공지(空地) 한복판에 꽂혀 있었다.
파지지직! 즈즈즈―!
“어, 어엇? 커헉…!”
“끄아아아!”
“크륵, 끄르륵!”
감전(感電)의 개념조차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멀뚱히 눈만 끔뻑이던 용병들이 난데없는 충격에 경련을 일으켰다.
허옇게 돌아간 눈자위와 입가로 흘러내리는 거품.
훌쩍 뛰어오른 마른 비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 공지엔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성공이야!’
뢰창 본연의 목적인 물리적 타격과 음파를 완전히 배제했다.
그리고 뇌기에 모든 힘을 때려 부었다.
서리불꽃을 수련하며 연마한 속성기는 완숙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이번만큼은 뢰창(雷槍)보다는 전창(電槍)이라 부르는 게 적절하리라.
빗물 고인 공지는 수백의 목숨을 집어삼킨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수왕! 어디서 이런 개 같은 수작질을…!”
“죽여! 저놈만은 반드시 죽여라!”
전격의 범위에서 몸을 빼낸 자들도 있었다.
기주은과 무석노가 그랬으며, 눈치 빠른 상위 용병들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목숨을 구했다.
칠백에 가까운 숫자가 무기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알짜배기 전력은 건재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뜬 마른 비에게 쇄도했다.
“말했지? 전부 죽을 거라고.”
마른 비는 태연했다.
쏟아지는 비를 등지고, 싸늘한 눈으로 적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전부 멈춰.』
두쿵―!
강맹한 위압도, 솟구치는 적들을 격추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남은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허나 자세가 불안정한 적들을 움찔하게 만들 뇌력은 남아 있었으니.
야수 제어가 용병들을 휘감은 순간, 새하얀 빛줄기가 허공을 찢었다.
“커허허헝!”
지상에서 칠 장 높이, 백광(白光) 수십 줄기가 비상한다.
별비의 이빨과 발톱이 적들을 덮치자 피가 폭죽처럼 터졌다.
갈가리 찢긴 피부와 근맥이 빗물에 섞여 쏟아져 내렸다.
쩌저저정―!
“크학…!”
기주은이 별비의 발톱을 가까스로 비껴내고 신음을 흘렸다.
무석노 또한 도끼 하나를 잃었지만, 유성우의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으아아아!”
“죽어라! 이 애새끼야!”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마른 비였다.
검과 도끼가 열십자로 교차할 때, 수왕의 신형이 흩어졌다.
“아아…! 안 돼…!”
우두둑!
비격 날짐승 떨구기가 기주은의 목뼈를 부러뜨렸다.
추아아악!
종으로 그어진 손날은 비할 데 없는 참격이니, 무석노는 평생을 휘두른 도끼와 함께 두 동강 나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주은은 목이 거꾸로 돌아간 채 추락했다.
의식이 끊기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싸늘하게 빛나는 눈동자였다.
‘운남에… 오는 게 아니었어…. 군길산, 그 새끼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쿠우웅!
머리가 땅에 부딪히며 기주은의 의식이 꺼졌다.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학살의 현장이 참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철퍽!
그 위에 마른 비가 추락하듯 착지했다.
수백 명이 전격에 지져져서 꿈틀대는 가운데 허리를 세운 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
공지 바깥에 숨어 있는 자들이 신음을 토했다.
‘모, 몰살…!’
‘맙소사! 용병연합, 저 사나운 승냥이들을 단둘이서…!’
적색분지에서부터 쫓아온 중원의 첩보조였다.
단이수의 교란을 뿌리친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순간, 수십 쌍의 눈에 비친 건 전설로 기억될 남자의 등이었다.
“크, 커헉…!”
“으으, 괴, 괴물…!”
전부 죽은 줄 알았는데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다.
내력이 고강하거나, 전격의 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용병들은 살아남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백에 가까운 숫자가 꿈틀거렸지만, 그들에게 전투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숨만 겨우 붙어 있을 뿐, 치명상을 입거나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크르르….”
허공에서 적들을 분쇄한 별비가 마른 비에게 돌아왔다.
용병들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는지 별비도 꽤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마른 비와 비틀거리는 별비를 보자, 첩보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 이건… 기회다!’
‘둘 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
‘지금이라면 가능해! 어떻게든 우리 측에서 나포할 수만 있다면…!’
여기까지 오며 첩보조들 사이에서도 무수한 암투가 벌어졌다.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휴전 협정과 연대 제휴가 오고 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무리를 짓고, 마른 비의 기력이 다한 듯하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스멀거린 것이다.
요원들의 눈이 바쁘게 굴러갈 때, 마른 비가 고개를 들었다.
‘흡…!’
‘허억!’
‘으음…….’
새파랗게 압축된 불꽃.
전설이 될 사내는 눈으로 말했다.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아무런 힘도, 기세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기엔 거역할 수 없는 위압이 담겨 있었다.
‘……안 돼. 못 이긴다. 전부 달려들어도 어림도 없어….’
‘히, 힘을 회복하면 안 되는데…!’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야 하는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죽기 살기로 한꺼번에 달려들면…!’
생각만 떠다닐 뿐이다.
최정예 요원 수십 명이 있었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른 비는 눈빛만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태연하게 등을 돌렸다.
“한심한 놈들. 너희는 기회를 놓쳤어. 다시는 너희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야.”
모욕을 당한 요원들이 몸을 꿈틀거렸다.
적색분지에서 따라붙은 순간부터, 수왕과의 관계는 틀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천치가 아닌 이상 지금 뒤를 쫓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으니까.
‘놓치면 안 돼. 다신 이런 틈을 보이지 않을 거다!’
‘잡아야 한다. 지금 잡아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도 방금 보았던 눈빛이 걷히지 않는다.
마른 비가 천천히 공지를 가로지를 동안, 일대엔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공지 끝에 선 마른 비가 산맥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기부터 운남이야.”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
똑같은 풍경, 다를 게 없는 공기건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이 혈관을 채운다.
끝없이 펼친 밀림을 내려다보며, 마른 비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선언하듯 말했다.
“너흰 실패했어. 무슨 수를 쓰든 끊어냈어야 해. 내가, 아니, 우리가 운남을 넘기 전에.”
스르륵 돌아가는 고개.
슬쩍 비치는 옆얼굴에서 강렬한 눈빛이 번쩍였다.
슬픔과 살의, 분노와 회한이 버무려진 눈으로, 마른 비가 말했다.
“경계를 넘지 마. 내 식구들에게 손대지 않았더라도, 운남에 진입한 놈은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마른 비도, 요원들도 알고 있다.
지금의 경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경계를 넘을 것이다.
운남 깊숙이 침투하고, 금광을 찾아 헤맬 거다.
수왕과 그의 부족을 필사적으로 쫓을 것이다.
소문이 퍼져서 더 많은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광을 확보해야 하니까.
“우리가 돌아오면, 눈에 띄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 말을 끝으로, 마른 비가 스르륵 사라졌다.
지형에 녹아버린 듯한 은신술.
멍하니 있던 첩보조가 놀라 소리쳤다.
“이, 이런…!”
“쫓아라! 절대 놓치지 마!”
“백아는?! 아아…!”
사라진 건 별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빗발은 약해졌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둘의 흔적을 지워주었다.
요원들은 망연한 얼굴로 지평선 끝까지 뻗은 밀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 * *
향긋한 차향이 감도는 방안.
고풍스런 원탁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둘러앉아 있었다.
군산은침(君山銀針)이 식어감에도 그들은 찻잔을 들 줄 몰랐다.
아무도 말이 없자, 중앙에 앉은 남자가 입술을 뗐다.
“찬반이 엇비슷하군.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 명분의 결여와 병력 부족인가?”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은발에 가까웠다.
목소리를 들으니 노인이 분명한데, 외모는 사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온화한 표정 속에 숨은 칼날 같은 기세.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남자였다.
원탁에 앉은 자들도 하나하나가 일대종사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으나, 노인이 너무도 비범하여 빛이 바래는 듯했다.
여전히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노인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책사들이 애용하는 윤건(綸巾)을 쓴 걸로 보아 참모의 역할을 하는 자인 듯했다.
“명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성, 아미, 당가가 그들과 충돌했지요.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은 야수족의 탓이 아니라 했지만, 전쟁이 벌어졌고, 아군이 살해당한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걸 명분 삼으면….”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윤건을 쓴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수습했고, 자신의 말을 끊은 청년에게 발언을 양보했다.
“네. 그리하시지요. 봉검대주님.”
나이 지긋한 인물들 틈에서 유일하게 젊은 사내.
발언을 청한 건 점창의 공유립이었다.
“지난 몇 년간 쉬쉬했던 와족과의 전쟁에 대해 소상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제가 본산을 떠나 있어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지는 못하지만, 적색분지 대회전이 와족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공유립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파의, 정확히는 공지량 그자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심지어 본산에 남은 사문의 식구들을 협박하고, 억류하면서요! 모두가 휘말렸을 뿐이며, 그중에서도 와족은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제 목을 걸고 확언 드립니다.”
책사가 언급한 명분을 원천 봉쇄하는 말이었다.
원탁에 앉은 자들 중 절반 정도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때, 발언권을 넘겨줬던 책사가 반문했다.
“누가 시작했든, 충돌한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미심쩍은 혐의를 받는 당가는 제쳐두더라도, 청성과 아미의 제자가 얼마나 다쳤는지 들으셨을 텐데요?”
“…….”
공유립이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정도맹의 총군사.
신룡이라 불리는 제갈준이 섭선을 부치며 말했다.
“원인을 무시할 순 없지만, 과정은 더욱 중요합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지요.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결과를 내야만 합니다.”
제갈준은 힘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듣도 보도 못한 원시부족에게 구파의 셋과 당가가 밀릴 뻔했습니다. 씨를 말렸다면 모를까, 잔존 세력이 남아 있으며, 십좌에 비견되는 수왕이 합류했죠. 그들이 과연 가만있을까요?”
“…….”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와족을 옹호하는 공유립조차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청성과 아미, 당가는 와족에게 불공대천지수나 다름없을 테니까.
“세간에서 뭐라고 떠들건, 확실히 정리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