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공유립이 탁자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까마득한 무림 말학으로서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군사께서는 청성, 아미, 당가가 걱정되는 게 아니겠죠. ……금광. 산출 불가능한 가치를 지닌 금광을 탐내시는 게 아닙니까?”
공유립으로서는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갈준은 태연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연…… 하다고요?”
공유립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연하다니?
무엇이 당연하단 말인가?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피해자인 와족을 공격하는 것이?
지금 이게 정도맹 총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가?
공유립의 낯빛이 굳자, 제갈준이 ‘아!’ 하고 탄성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청성, 아미, 당가가 걱정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금광을 노리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결국 같은 말이지 않은가.
금광에 욕심이 나서 파병하되, 사천의 문파들을 돕는 걸 명분으로 세우겠다는.
와족을 몰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콰앙―!
공유립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금광을 노리는 게 당연하다니?! 그 동굴은 와족의 것입니다! 그들의 선조를 모신 무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기틀을 잡기 전부터,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그들이 대대손손 보존해온 성역이란 말이오!”
어찌나 화가 났는지 공유립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그는 정파의 심장이라는 정도맹의 군사회의에서 이따위 발언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놀라긴 일렀다.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유골을.”
제갈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들의 공동묘까지 훼손할 생각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선조들의 유해지요. 안치된 뼈들을 다른 장소로 이장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물론 그들이 곱게 물러난다는 가정하에.”
“그걸 지금 말이라고…!”
공유립은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잇지 못했다.
제갈준은 기다리지 않고 술술 말했다.
“오랫동안 점유했다고 하여 소유권이 주어지는 건 아니지요. 문서나 기록, 공증의 형태로 증빙되어야 합니다.”
“그건 한족의 법규요! 그들에게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잖소!”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공유립은 자신이 평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제갈준은 이해는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우린 한족이 아닙니까, 봉검대주님?”
제갈준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너무 당당해서 뻔뻔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공유립이 노려보건 말건, 그는 후학을 가르치는 선배의 얼굴로 말했다.
“정파의 후기지수로서 좋은 자세요,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제가 그대를 이해하듯, 이번엔 봉검대주께서도 입장을 바꿔보시지요.”
제갈준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저는 정도맹의 총군사입니다.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정사대전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요.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극한 대치는 이어질 것입니다.”
제갈준은 침묵에 휩싸인 원탁을 넓게 둘러봤다.
“제 역할은 정도맹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마음과 의협심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순 없죠.”
그의 어조는 더욱 뚜렷하고 명료해졌다.
“사파의 무리들이, 또는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금광을 두고 볼 것 같습니까? 그 엄청난 자금이 적대 세력에게 흘러 들어간다면?”
진한 한숨들이 교차했다.
고민의 깊이를 보여주듯 식어버린 찻잔을 드는 이는 없었다.
“전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욕은 제가 감당할 테니, 수장들께선 부디 현명한 판단을.”
장황하지만, 명징한 웅변이었다.
공유립은 뒤늦게 깨달았다.
제갈준은 처음부터 회의를 이렇게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는걸.
자신이 반발할 걸 알고, 그에 맞춰 연설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도.
‘신룡…. 신룡…! 이것이 내가 만나길 꿈에도 그리던 신룡의 실체였단 말인가!’
장문인의 대리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때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하늘이 내린 검’이라고까지 불리는 정도맹주와 천하제일지자 제갈준.
어린 시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거물이 아닌가.
아버지, 아니, 공지량에 의해 훼손된 정파의 기치를, 대장로들과 여 장로가 심어준 의협의 숭고함을 두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될 것이라 여겼다.
‘어리석었구나!’
너무 순진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당연히’ 금광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줄이야.
‘신념과 이익의 경계. 어떤 상황에서도 도리를 지키기에 정파인 것을. 그걸 포기한다면 사파와 다를 게 무엇인가!’
현실을 모르는 풋내기의 혈기로 보여도 좋다.
옳다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고, 그렇게 살아온 자들을 스승으로 두었다.
공유립이 끝까지 반발하려는 찰나, 묵직한 목소리가 다탁을 울렸다.
“화산은 파병하지 않겠소. 봉검대주의 뜻과 같소이다.”
공유립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적색 도복을 걸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명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병력도 부족하오. 아시다시피 본파는 환희문을 쫓는 데 남은 힘을 쏟고 있어서.”
“으음…….”
제갈준이 침음을 흘렸다.
가짜로 판명되었지만, 진시황릉이 있다고 소문났던 여산에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수왕과 척을 진다면 당장이라도 내게 검을 휘두를 제자 놈이 있어서 말이야. 어릴 때야 뚜드려 패면서 키웠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반항하면 영 쉽지가 않아. 제자에게 미움받기 싫다, 이 말이오.”
도인으로 보기 힘들 만큼 호방한 인상.
그러면서도 속세를 초탈한 느낌을 주는 노인이었다.
앓는 소리를 하지만, 누구도 그게 진짜라고 믿지 않았다.
철혈검 강유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매화전검(梅花戰劍)이라 불리는 그의 스승에게 닿기엔 아직 멀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장문인!”
공유립이 넙죽 포권하며 외쳤다.
소싯적 ‘화산이 풀어놓은 미친 개’라고 불렸던 선웅진인이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점창이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자네 아비는 영 별로였네. 한데 그렇게까지 맛이 간 놈일 줄이야. 에잉, 씹새끼……. 아, 이런 말하면 안 되나?”
각파의 수장들이 끄응,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하지만, 들을 때마다 힘들다는 느낌.
공유립이 멍하게 있다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긴요.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으응… 새끼죠.”
“크하핫! 다른 데 가서는 조심하게나. 그렇게 막 수긍하면 안 돼! 고리타분한 놈들은 ‘그래도 아비인데~.’ 운운하며 흉볼 테니!”
선웅진인은 다음에는 욕도 제대로 발음하라며 낄낄댔다.
그는 공유립을 빤히 바라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컸군. 아주 잘 컸어. 심기신(心氣身) 모두.”
경망스런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선웅진인은 거목의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공유립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본가 역시 파병에 반대하오! 시러베 잡놈 같은 사파의 종자들이나 할 짓이 아닌가!”
선웅진인이 비교적 부드럽게 불응의 뜻을 밝혔다면, 이번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우 격하게 반대를 표출했다.
파산권 팽찬.
북벌에서 두 주먹으로 원의 기마대를 휩쓸었던 팽가의 장로는 제갈준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총군사가 느낄 부담감을 모르진 않소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오! 그딴 짓을 할 거면 현판 내리고 사도맹(邪道盟)을 하나 만드시게!”
팽찬은 똑똑히 들으라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정파요! 각파의 수장들께서 계신 자리라 가급적 말을 아꼈소만, 이런 사안에 찬반이 갈린다는 것부터가 글러 먹었소이다!”
팽찬은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달변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정파의 근간을 건드리는 언급은 누구도 토를 달기 힘들었다.
“본파도 같은 생각이오.”
“본가 역시.”
“의를 놓아버린다면 정파라 할 수 없지.”
침묵을 지키던 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유혹 앞에서 갈등하던 자들이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리고 그 수는 절반을 넘어 있었다.
‘내가 성급했다. 아직 정파의 횃불은 꺼지지 않았구나!’
공유립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그는 각파의 수장들에게 연신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점창의 제자가 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그건 사 년 전, 너른 하늘이 점창을 용서하며 바랐던 풍경이 틀림없으리라.
“의견에는 동의하오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소. 군사의 말처럼 금광이 다른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끔찍한 재앙이 될 테니까.”
“차라리 수왕과 그의 부족을 돕는 건 어떻소? 그는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친분이 있다고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까지 뭘 들은 거요? 사정이야 어찌 됐든 수왕의 식구들을 죽인 건 청성과 아미란 말이오!”
“안타깝지만 이번만큼은 군사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지도.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문이 트이자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다.
차갑게 식은 찻잔이 들어 올려지고, 구파와 오대세가의 대표들이 설왕설래를 거듭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때문에 회의가 길어질 때,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견들은 잘 들었네.”
회의장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황성 침공 이후 닿을 수 없는 별이 돼버린 ‘협검’과 사도련의 지존 ‘패군’.
그 둘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투던 남자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천검(天劍) 운종학.
정도맹의 맹주이자 십좌의 일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명분. 그리고 도리. 그래, 우리는 그것 없인 움직일 수 없는 족속이지.”
묘하게 냉소적인 어투였다.
운종학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창룡검대(蒼龍劍隊)를 파견하겠네.”
“……?!”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거에 뒤집는 발언이었다.
선웅진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맹주. 지금 그 말씀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의견을 묵살하시겠다는?”
운종학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 있겠소이까, 장문인. 명분이 약하고, 병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여기 모이신 분들께서 내린 결론이 아닌가.”
운종학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견제. 다른 세력에서 금광을 차지하는 걸 막기 위함이오. 오직 거기에만 집중하도록 하지. 맹의 병력이니 특정한 문파에 부담을 지우지도, 무력이 모자라지도 않을 터.”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어쩌면 최적의 타협점일지도.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선웅진인과 눈치 빠른 수장들의 눈은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정도맹을 대표하는 무력 단체.
창룡검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건 이면의 연결고리였다.
‘맹주의 직속 세력…!’
무얼 노리는지는 뻔하다.
순수한 후기지수의 발언과 총군사의 웅변, 자연스레 이어진 수장들의 논의, 그리고 최종적인 맹주의 절충안까지…….
철저히 짜인 각본이었다.
맹주는 오늘의 회합을 밑거름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직접 참여했고, 의견까지 내놓았으니 이제 와선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다.
선웅진인의 눈길이 제갈준을 향했다.
‘군사. 그대의 작품인가.’
무서운 속도로 현실에 물들어가는 천재.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선웅진인은 제갈준이 운종학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는걸, 그의 눈가가 알아채기 힘들 만큼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정사대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다. 맹주, 무슨 속셈인 것이오?’
이런 논의를 나누는 게 과연 자신들뿐일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천하의 눈길이 한 번도 주목받은 적 없는 변방으로 모이고 있었다.
‘운남……. 겨우 전쟁이 진정국면에 접어드는 데 엉뚱한 곳에서 피바람이 부는 게 아닐지.’
정사대전의 전선이 강남의 3개 성에 걸쳐 늘어진 가운데, 소강상태를 맞이한 정도맹의 진영에서 선웅진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 *
따앙! 따앙! 따아앙―!
운남의 서남부 고산 협곡.
장엄하게 늘어진 산맥 아래로, 천험의 절벽이 입을 벌렸다.
한 치만 삐끗해도 추락할 것 같은 벽면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은 소로가 패여 있었고, 곳곳에 쉴 수 있는 간이동굴이 존재했다.
높낮이가 다른 길들이 하나로 모여, 절벽 중앙으로 이어진다.
그곳엔 장정 십여 명이 한꺼번에 드나들 만한 통로가 있었는데, 새들이나 날아오를 법한 절벽의 중심부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앙! 따앙―!
한족임이 분명한 중년인이 진지한 눈으로 망치를 내려쳤다.
그의 주위엔 운남의 소수부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은 한족 사내의 집중을 깰까 봐 입도 틀어막은 채 구경 중이었다.
아창. 운남에서 유일하게 쇠를 다루는 민족.
아창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철장들이 한족 사내의 솜씨를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아저씨. 잘돼가?”
아창족 사내들의 조심스런 행동이 무색하게도 태연히 말을 걸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모두의 질책 어린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족 사내는 집중이 깨졌는지 망치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비아냐? 내가 작업 중일 때는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매서운 눈초리로 마른 비를 쏘아본 건 단철공 왕문이었다.
마른 비는 헤벌쭉 웃더니 손에 든 무언가를 건넸다.
“받아. 내 거는 이걸로 만들어줘.”
왕문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뭐냐, 이게? 짐승의… 이빨?”
마른 비의 팔뚝보다도 두껍고 긴 송곳니.
슬쩍 만졌을 뿐이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거기에 더해 무지막지한 기운이 서려 있다.
놀란 왕문의 표정을 즐기며, 마른 비가 말했다.
“칼이빨의 송곳니야. 내 무기는 이걸로 만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