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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04화 (404/463)

404화

“칼이빨? 설마 금 영감이 이야기하던 검치호 말인가?! 이걸로 무기를 만들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소재다.

왕문이 멍하게 있자, 마른 비가 물었다.

“왜? 불가능할 것 같아?”

왕문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호통을 쳤다.

“불가능이라니! 누구에게 그따위 소릴…!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바로 이 시대 최고의 철장, 왕문이다!”

왕문은 성질 한번 부리고는 금세 얌전해졌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검치호의 이빨을 홀린 듯이 내려다봤다.

“세상에 이런 재질이…! 이게 정말 생물의 뼈가 맞나? 만년한철(萬年寒鐵)만큼이나 단단해! 그리고 이것… 설마 내공인가?!”

검치호가 주무기로 사용하던 신체의 일부.

거기에 깃든 자연기의 잔흔.

왕문이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아냐……. 이건 중원의 내공이 아니야.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기운……. 마치 외기를 그대로 빨아들인 것 같은…!”

왕문은 고개를 들어서 마른 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비아, 너의 기운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허나 몸이 떨릴 만큼 사납고 흉포해. 이건 네가 불어넣은 게 아냐. 설마… 이것…!”

‘검치호가 살아생전에 운용하던 기운’.

격동하는 바람에 끝맺지 못한, 생략된 말이었다.

“진짜 대단하네, 아저씨. 슬쩍 보는 것만으로 거기까지 알 수 있는 거야? 과연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해.”

마른 비는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가 아니면 누구도 다룰 수 없을 거야. 날 위한 무기를 만들어줘. 부탁해도 되지?”

도리어 이쪽이 간청할 일이다.

철장으로서 이런 희귀한 재료를 다루는 건 꿈같은 일이니까.

왕문은 여기까지 이를 때의 여정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이 됐다.

“단이수란 꼬맹이가 날 찾아왔을 때는 정말 짜증이 났지. 내 위치를 알려준 금 영감한테 따지려 했어. 허나 네게 벌어진 일을 듣고, 곧바로 짐을 챙겼다.”

차분하게 말하던 왕문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설산을 넘을 땐 후회했지. 여기서 뒈지는 게 아닌가 싶었어. 겨우 편해지나 싶었는데 끝도 없는 밀림이 나타나더군. 정신 나간 크기의 맹수들이 출몰하고 말이야.”

평생토록 뱉을 욕을 운남에 와서 다 퍼부었다.

천신만고 끝에 서남부 끝자락까지 내려왔더니, 이번엔 하늘을 가린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오자마자 작업을 시키고 말이야. 너 인마, 진시황릉에서 목숨을 구해준 것만 아니었음 다 때려 치고 돌아갔을 거다. 썩을 놈 같으니라고.”

말과 달리 왕문은 진하게 웃었다.

사람을 피해 평생을 산간벽지에서 살아온 그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호감을 표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네게 벌어진 일을 듣고, 금 영감은 눈물을 흘렸다. 힘내란 말을 전해달라더군. 여산 사건 이후, 영감은 평생토록 해온 일을 그만두었어.”

진시황릉 발굴 작업은 고증자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남았다.

온 천하를 기만한 사기극은 만금당의 평판을 떨어뜨렸고, 평생토록 그를 밀어준 당주조차 내부 반발에 부딪혀 지원을 끊기에 이르렀다.

역사에 남을 발굴에 성공하고도 인생을 허비한 한량이자, 가문의 치부로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질 텐데 꿋꿋이 잘 견디고 있더군. 더 이상 진시황릉 때문에 피가 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대. 참으로 대단한 영감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금복인은 힘든 와중에도 마른 비를 걱정했다.

자금줄이 막힌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한철을 긁어모았고, 왕문 편에 들려 보냈다.

“한철은 귀한 재료다. 돈이 나올 곳이 없는 금 영감이 이만큼 보내온 건 대단한 거야.”

작은 전낭 두 개를 채울 정도의 부피.

만금당의 재력을 감안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잘만 정련하면 괜찮은 무기 한 자루는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마른 비의 주문이 엄청나다는 데 있었다.

“팔십 명이 쓸 무기가 필요해. 남은 전사들을 전부 무장시킬 거야.”

“팔십 명분의 무기라…….”

중원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치며, 마른 비는 깨달았다.

공격력을 높이고, 방어를 견고히 할 병기의 중요성을.

앞으로 벌일 일을 감안할 때, 숫자가 적은 와족으로서는 반드시 무기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한철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점인데…….

“만들어주마. 팔십 개 전부 통짜 한철에 버금가는 강도로.”

왕문은 자신 있게 대꾸했다.

“사람 제대로 고른 줄 알아. 내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기껏해야 질이 안 좋은 철로 일회용 병기를 만드는 데 그쳤겠지.”

왕문은 자신만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무인이 예기치 못한 도약의 발판을 얻는 것처럼, 나 같은 야공(冶工)에게도 기연이 존재하지.”

비단에 쌓인 물건은 진시황릉에서 획득한 간장검의 파편이었다.

“천 년이 지나도 녹슬지 않게 하는 가공기술. 청동임에도 철을 베어버리는 절삭력. 신공(神工) 간장은 시대를 초월한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금속 본연의 내구도와 강도를 향상시키는 것.

바로 합금(合金)과 압축, 그리고 ‘덮어씌움’ 기술이었다.

춘추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간장검에는 무기 제련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기술이 모두 배어 있었다.

“하나 이상의 금속과 비금속을 섞는 ‘합금술’과, 밀도를 높이는 ‘압축술’. 그 두 가지는 이미 극한까지 터득했다. 내게 부족한 건 바로 ‘덮어씌움’이었지.”

합금술과 압축술로 강고한 뼈대를 만들고, 실제 무기가 부딪치는 표면에만 한철을 입힌다.

겉에 씌운 ‘막’이 깨지지 않는 한 와족의 무기가 상할 일은 현저히 줄 터였다.

“이 기술이면 금 영감이 준 한철만으로도 팔십 명의 전사들에게 굉장한 무기를 쥐여줄 수 있지.”

왕문의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자신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 중인 중원의 장인들은 또 한번 좌절을 맛보리라.

왕문은 감탄과 탄성을 기대했지만, 마른 비는 시큰둥했다.

“합금? 압축?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왕문의 표정이 애처로울 만큼 일그러졌다.

“이봐. 비아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냐 하면…… 무기 제련술을 몇 백 년은 앞당길 혁명적이고도 기념비적인….”

마른 비는 콧바람을 길게 내쉬며 물었다.

“아무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 그래….”

“그럼 됐어. 멋지네, 아저씨.”

마른 비가 엄지를 척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왕문은 답답하고 억울했다.

“시대를 앞선… 내 이름을 역사에 남길 위대한….”

왕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얼대다가 왁! 소리를 질렀다.

“이래서 무식한 것들하고는 말을 섞으면 안 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도 모르고, 이따위 반응이라니!”

“철은 있어?”

마른 비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왕문은 꼭지가 도는지 부들부들 떨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충분하다. 아창족이라고 했나? 네가 여기로 오라고 한 이유를 알겠더군. 이들은 광석을 보는 안목이 있어.”

아창족이 보금자리 삼은 절벽 밑엔 순도 높은 철광석이 매장돼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정련 기술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건 가르치면 해결될 일이다.

제련과 정제, 그리고 야금(冶金).

왕문은 마른 비를 위해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기술을 아낌없이 풀었다.

아창족의 철장들이 왕문의 작업을 지켜보던 이유였다.

“두 달. 두 달만 다오. 너희 부족의 전투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주마.”

왕문의 장인혼이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진정 뜨겁게 하는 건 따로 있었으니.

“진심으로 고맙다. 기를 다루는, 멸종한 고대종의 송곳니라니. 인류 역사에서 이런 재료를 손보는 건 나밖에 없을 거야.”

왕문의 눈빛이 번쩍였다.

검치호의 이빨이 주는 감촉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던 기억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내 너에게 세상에 다시없을 병기를 만들어 주리라.”

마른 비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잘 부탁해. 아저씨.”

* * *

아창족이 터전으로 삼은 절벽 뒤편.

산맥의 정상 부근에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바닥이 비칠 만큼 투명한 물이 못을 이루고, 흘러넘친 물은 아래로 흐른다.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폭포수가 드리운 물길은 젖줄이나 다름없었다.

참방. 주르륵―.

만월이 수면에 내려앉은 가운데, 물을 긷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흔든다.

봉긋한 가슴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반짝이며 빛났다.

찰랑이는 머릿결과 붉은 입술.

내쉬는 숨결조차 관능적이다.

새하얀 달빛을 머금은 나신을 본 순간, 마른 비는 숨이 멎어버렸다.

“흡! 크, 크흠…!”

왠지 소리라도 내야 할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몰래 훔쳐본 꼴이 되지 않았나.

터질 듯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마른 비가 말했다.

“미, 미안! 노을아. 씻는 줄 모르고….”

황급히 등을 돌린 채였다.

등에 시선이 꽂히며 나긋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왔어?”

‘으아, 미치겠네…!’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고백을 했던 게 떠올랐다.

설산을 넘은 식구들이 먼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당도했다.

하지만 뒤늦게 몰려온 상실감 때문에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슬픔에서 헤어난 뒤에는 몸을 추스르기 바빴다.

몇 번 마주쳤어도 별다른 어색함은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마른 비는 그제야 노을과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로?”

노을이 태연하게 물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볼 때, 계속 씻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아…! 무기! 무기 때문에 왔어!”

마른 비가 어버버하며 대꾸하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 노을이 물었다.

“무기? 그거 때문에 온 거야?”

알몸을 봐서일까?

패기 넘치게 고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른 비는 귀까지 빨개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그래. 일전에 이야기한 그거 말이지?”

전사들에게 병기를 쥐여주자고 할 때, 마른 비는 말했다.

검치호의 이빨 중 일부분을 노을에게 주겠다고.

그건 마른 비 나름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전력 증강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노을은 족장이며, 마른 비, 그믐과 더불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다.

어떤 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마른 비가 생각하기에 무기의 재료로서 검치호의 송곳니보다 훌륭한 소재는 없었다.

최상의 무기를 최고수에게 쥐여주는 것.

마른 비가 왕문과 헤어지자마자 노을에게 달려온 이유였다.

“고맙지만, 괜찮아. 나도 좋은 걸 구했거든.”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른 비가 헛바람을 집어삼킬 때, 노을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아귀엔 새하얀 예기를 띠는 맹금류의 발톱이 들려 있었다.

“칼바람이 줬어. 네 이야기를 듣더니, 말릴 틈도 없이 다짜고짜 뽑더라. 그런 흉포한 물건은 쓰지 말래. 자기 게 훨씬 좋다나 뭐라나.”

운남에 이름을 알린 각성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전사는 맹수가 자랑하는 신체의 일부를 받는다.

그건 굴복의 상징인 동시에 위대한 전사임을 나타내는 증표였다.

너른 하늘의 목걸이와 그믐의 팔찌, 우둔한 땅의 코걸이와 매서운 눈의 귀걸이가 그랬다.

하지만 노을은 칼바람의 발톱을 거절했었는데, 반려 관계로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른 비의 제안을 들은 칼바람이 대뜸 자신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이다.

“으으… 아팠겠다.”

마른 비가 생으로 발톱을 뽑는 고통을 상상하며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부드러운 감촉이 등에 와 닿았다.

“계속 이런 이야기나 할 거야?”

사고가 정지하고, 세상이 멈췄다.

살포시 몸을 기댄 노을의 살결은 부드러웠다.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천천히 뒤돌았다.

그러곤 날아가려는 이성을 붙들며, 품을 뒤적이다 뭔가를 꺼냈다.

“이게… 뭐야? 나 주는 거? 선물이야?”

노을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런 쪽으로는 둔탱이에 머저리나 다름없어서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선물이라니…!

마른 비가 준비한 건 직접 잡아서 건조시킨 사향이었다.

“중원엔 이런 것들이 있더라고. 황궁에 머물 때, 시비들이 만드는 법을 알려줬어. 노을이 너한테 꼭 주고 싶더라.”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오래도록 참아온 마음이 봇물처럼 터졌다.

두 사람 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하아….”

떨리는 손길.

요동치는 가슴.

하얗게 번지는 월광 아래,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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