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05화 (405/463)

405화

* * *

“싫습니다.”

단단한 체구의 사내였다.

키는 작지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꽉 짜인 근육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총채주의 오른팔이자, 녹림 최고의 권사.

호살권 초패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바위에 걸터앉은 사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모든 게 컸다.

얼굴, 덩치,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이목구비까지.

눈빛은 보는 순간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잠시 멈칫했던 사내가 손에 든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발밑에는 대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범이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총표파자(總瓢把子). 나는 운남에 가지 않을 거요.”

진산투왕(震山鬪王).

녹림십팔채의 총채주, 마맹산을 일컫는 말이다.

세인들은 산적 따위에게 왕이 가당키나 하냐며 진산부(震山斧)로 격하시켜 부르지만, 초패가 보기에 그는 왕의 칭호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여산에서 보았던 야수의 왕처럼.

초패가 마른 비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을 때, 천하 산적들의 두령으로 군림하는 남자가 씹던 고기를 뱉었다.

그가 허리를 세우자, 우람한 흉근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상하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마맹산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초패를 직시했다.

그러곤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건가? 아니라고는 하지 마.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형제의 의를 맺으며 술이 담긴 표주박을 기울인 게 이십 년 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초패는 한 번도 ‘싫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정식으로 내린 명령을 거부하니 의아할 수밖에.

“때가 되면 말해드리리다. 그냥 믿고 기다려주면 고맙겠소.”

마맹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초패를 뚫어져라 보다가 한숨을 쉬었고, 먹다 만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진시황릉도 가짜다, 수왕이 사파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지도 않았다, 미친놈처럼 뭔가를 찾아 헤매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것도 아니다…….”

마맹산이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그는 초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기를 우물대다가 꿀꺽 삼켰다.

“이봐, 초 호법. 아니, 아우. 묻지 말아달라기에 그리했네.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어. 운남? 그깟 거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꿀꺽, 꿀꺽.

마맹산은 표주박에 담긴 독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곤 통나무 같은 팔뚝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만, 혼자 끙끙대진 않았으면 좋겠군. 천하의 호살권이 똥 마려운 개 마냥 낑낑대는 걸 보기 힘들다, 이 말일세.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란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신에게도 숨기며 혼자 동분서주하는 것인가.

일일이 털어놓지 않아도 좋다.

코흘리개 시절, 녹림 제패에 나서기 전부터 모든 걸 함께 해왔는데,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서운한 것이다.

마맹산은 심통이 난 얼굴로 정수리를 벅벅 긁었다.

‘허헛, 참. 이런 면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질 않는군.’

초패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산적 두목의 정석처럼 생긴 남자가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늘어놓으니 실소가 날 수밖에.

투박한 언행에 담긴 염려가 고마울 뿐이다.

초패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고맙소, 총채주. 아니, 형님.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꼬리를 잡는 대로 다 말씀드릴 테니.”

정파와 사파를 상잔시켜, 녹림의 형제들을 살해한 놈들.

강유가 그렇듯이, 초패 역시 여산을 나온 뒤부터 환희문을 쫓고 있었다.

진시황릉이 실존한다는 건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다.

목숨을 빚졌고, 그에 대한 답례로 굳게 약속했으니까.

녹림의 특성상 황릉이 실재한다는 걸 알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다.

그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마맹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환희문에 대한 복수는 분명 함께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사도련 가입과 그에 따른 정사대전 파병으로 여력이 없어. 확실히 꼬리를 잡고, 전쟁이 마무리된 뒤에 본격적으로 들이친다.’

마맹산의 성격상 환희문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전쟁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복수에 나설 것이다.

그럼 겨우 이뤄놓은 연합이 백지로 돌아간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녹림의 안전을 구하려면 든든한 아군을 만드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자네가 안 간다니 어쩔 수 없구만. 독 채주를 보낼 수밖에.”

“독 채주?! 설마 흑록채(黑綠寨)의 독고길을 말하는 겁니까?”

초패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마맹산이 죽은 호랑이의 살점을 뜯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 금광 이야기를 듣더니 눈이 뒤집혀서 지원하더군. 자네를 보낸다니까 찌그러졌는데, 안 간다니 허락해야지 뭐.”

초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필 그 지저분한 놈을……. 파병을 안 할 수는 없는 겁니까?”

마맹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산에 다녀온 이후, 자네가 수왕을 가깝게 여기는 건 눈치챘네. 허나 아우, 공사는 구분하도록 해. 우리의 본업이 약탈임을 잊은 건 아니겠지?”

마맹산은 우두둑 소리가 나게 고개를 꺾더니 말을 이었다.

“산악전과 임전(林戰)은 우리의 전문 분야야. 운남으로 몰려가는 놈들이 지형을 읽을 길잡이를 요청했네. 그것만으로도 쏠쏠하긴 한데, 거기서 그칠 수 있나.”

마맹산이 히죽 웃었다.

파병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이 있는 듯했다.

아무리 초패라도 독립적인 산채를 운용하는 채주들을 말릴 수는 없었고, 마맹산의 뜻이 저렇다면야 파병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안타까움 섞인 우려를 표할 뿐.

“쉽지 않을 거요. 내가 본 수왕은 천하를 논할 만한 강자였소. 간다는 놈들을 뚜드려 패서라도 말리고 싶지만… 안 듣겠지.”

마맹산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가 가지 않는 이유는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련주가 한번 보자더군.”

“패군이 말입니까? 왜죠? 형님께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마맹산은 심기가 불편한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폭룡 늙은이와의 관계 때문이겠지. 앙숙이었던 놈들이 한배를 타게 됐으니, 무신경하기로 유명한 련주라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닐까?”

“으음……. 그럼 수로맹주도 같이 불렀겠구려.”

진산투왕과 폭룡.

오래전 장강과 산자락이 만나는 접경지역에서 우연히 만나, 칠 주야에 걸친 혈전을 벌인 바 있는 두 사람이다.

사소한 시비로 시작된 말다툼이 대전으로 번졌고, 녹림 최강이라는 진산채와 장강 무적이라 불리는 폭룡채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내야만 했다.

“안 되겠군. 거긴 나도 따라가겠소.”

초패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마맹산은 기꺼운지 반색을 했다.

“오오! 그럴까? 오랜만에 같이 길을 떠나겠구만! 좋았어! 이리 오게, 아우! 한잔하라고!”

제아무리 녹림 최강의 사나이라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 * *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진지한 논의를 거듭하고, 마맹산이 초패와 술잔을 기울이는 시각, 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천하 태평한 자가 있었다.

험난한 협곡, 올려다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비탈길에 타오를 듯한 적색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팔짱을 끼고 편안한 자세로 앉은 중년인의 앞에는 한 남자가 벙 찐 얼굴로 서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진짜 그렇게 전하라고요?”

사연문.

사도련 제일호법이자 연무검이라 칭송받는 검객.

그의 표정은 눈앞에 있는 사내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적발의 중년인은 어처구니없어 하는 사연문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곤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간다는데 말릴 이유가 있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사연문은 복장이 터질 듯한 얼굴로 외쳤다.

“련주님! 전쟁 중이라는 걸 잊으신 거 아닙니까?! 정도맹 놈들은 지금도 칼을 갈고 있단 말입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말을 이었다.

“우린 녹림 같은 도적 떼가 아닙니다! 하고 싶은 걸 전부 허용해줄 필요 없단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력한 규율로…!”

하지만, 련주는 손을 저었다.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나와 자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밀린다 싶으면 우리가 나가서 다 쓸어버리면 돼.”

“하…!”

이런 점이 련주의 매력이지만, 거대 집단을 이끄는 수장으로선 최악이다.

근엄하기로 유명한 사연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전 모릅니다. 밀리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튈 거요. 분명히 말했으니 나중에 욕하지 마십쇼.”

그러곤 등을 돌리며 중얼댔다.

“강기도 제대로 운용할 줄 모르는 떨거지들이 무슨 수로 수왕을 잡겠다고……. 그나마 정예에 속하는 방파들이 제정신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때, 련주의 몸 전체가 꿈틀댔다.

그를 어깨에 이고 비탈길을 오르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굴 잡아? 수왕?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

사내는 땀이 범벅이 된 채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사연문을 재촉했다.

“아… 중구! 너와 수왕은 각별한 사이였지?”

사연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최근에 천하를 달군 소식을 전해줬다.

철중구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눈이 커지더니, 급기야는 노성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개새끼들이 미쳤나! 감히 누굴 건드린다고?!”

친구가 겪은 일이 마음 아픈지 철중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간다! 비아야! 지금 당장 달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철중구는 도까지 뽑아 들며 외쳤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가리, 박아.”

흥분해서 날뛰던 철중구가 움찔했다.

그러곤 날렵하게 뒷짐을 지며 머리를 비탈길에 꽂았다.

그의 옆에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나동그라진 련주가 있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 날 패대기친 거야. 맞지?”

어디 던진다고 날아갈 사람이던가.

그냥 자기가 알아서 엎어졌다.

그러곤 자세도 풀지 않고 저러고 있다.

철중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아, 쫌! 사부! 대장! 아니, 련주님! 나 가야 한단 말이오! 친구가 힘든데 달려가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내자식이랄 수 있겠소!”

철중구는 눈만 힐끔 돌려서 아래를 보며 외쳤다.

“니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내 말이 맞냐, 틀리냐?!”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형님!”

비탈길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내가 똑같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철중구가 엎드리는 순간, 다 같이 엎드린 것이다.

그들의 팔다리에는 사슬로 연결된 철구가 매달려 있었다.

사도련에서도 싸움에 잔뼈가 굵은 자들만 모아 만든 투견대였다.

“그래. 의리, 좋지. 그런데 말이다. 중구, 네가 가버리면 나랑 사 호법은?”

“……?”

련주는 천천히 몸을 뒤집으며 앉았다.

팔짱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네가 훌쩍 떠나면 나랑 사 호법은 어쩌라고? 우리 둘이서 저 흉험한 정도맹 놈들과 싸우란 말이냐?”

“아, 아니…! 아까는 둘이면 충분하다면서요?”

철중구는 기가 막히는지 컥컥댔다.

련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중얼댔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럼 간다는 놈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말리랴? 내가? 나 패군인데?”

철중구는 머리를 박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아! 몰라! 알아서 하십쇼! 전쟁에서 그만큼 굴려먹었으면 됐지, 뭘 더 시키려고! 잘 싸우는 놈들 쌔고 쌨잖소! 나 하나 빠지는 게 무에 대수라고!”

무력 하나로 사파의 하늘이 된 남자.

태호천이 씨익 웃었다.

“너 없으면 심심해. 너만큼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한 놈이 없거든.”

철중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 말처럼, 태호천은 자신을 놀리는 데 재미가 들려 있었다.

다른 놈들 앞에서는 있는 대로 무게를 잡으면서 자신한테만 이러는 것이다.

항상 고분고분히 따랐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

철중구는 눈을 부릅뜨며 대들었다.

“갈 겁니다. 가야 한다구요! 금방 다녀오겠소!”

“흠. 그렇단 말이지?”

폭발하듯 번지는 기세.

태호천이 몸을 일으키자, 철중구는 하늘 끝까지 치솟은 붉은 사자의 환상을 보았다.

“도는 쓰지 않겠다. 도강 대신 수강. 전력을 다한 일격이다. 한 번이라도 받아내면, 보내주마.”

붉은 사자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뻗쳐올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를 상기시킨다.

철중구는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도를 고쳐 쥐었다.

“시펄.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좋소! 팔 잘려도 탓하기 없습니다?”

쿵! 쿠쿵―!

사지에 매달려 있던 철구들이 끊어졌다.

철중구의 몸 주위로 월등히 붉어진 기운이 스멀댔다.

“카아압!”

장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적사자기.

피처럼 붉은 기운을 향해 철중구가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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