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 * *
사사삭―
바람이 흐르고, 풀이 쓸린다.
그림자가 지나칠 때마다 숲이 들썩였다.
갈지자로 달리던 무언가가 수풀에서 튀어나온 순간!
“크아앙!”
맹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표범이 그림자의 목덜미를 물었다.
“캬항…!”
밤의 정적을 찢는 울음.
사슴은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숨이 끊어졌다.
“크릉, 킁…!”
콧바람을 몰아쉬던 표범이 턱에 힘을 더했다.
우두둑.
목뼈 부러지는 소리는 섬뜩했다.
표범은 주위를 살피더니 사냥감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르릉….”
“……?!”
대여섯 걸음쯤 옮겼을까?
낮게 내리깔린 울음에 표범의 고개가 돌아갔다.
“쿠허엉!”
바윗덩이 같은 앞발이 상체를 후려쳤다.
표범은 목 위가 통째로 날아갔고, 부르르 떨다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
“꾸엉! 꾸어엉!”
습격자는 집채만 한 불곰이었다.
표범과 달리, 놈은 사냥에 성공하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힘을 자랑했다.
힘차게 울부짖는 불곰을 보며, 나무 위에 있는 자가 중얼거렸다.
“먹고 먹힌다. 완전히 야생 그 자체로군.”
이마에 커다란 점이 있는 사내였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야수들의 사냥을 내려다봤다.
불곰은 먹이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지도 않고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능한 행동.
저놈이 이 산의 최상위 포식자가 분명하리라.
으적, 우적.
육질을 씹는 소리와 함께, 건너편 나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동하자. 저런 놈 주위에 있으면 좋을 게 없어.”
점박이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살다 살다 짐승의 눈치까지 보게 될 줄이야…….”
투덜거림과 달리, 사내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나뭇가지에 착 붙은 채 흐르듯 나아간다.
대여섯 그루의 나무를 순식간에 건너뛰고,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동을 지시했던 사내도 바짝 따라붙어서 옆에 안착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주변을 확인한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넓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도 가도 산과 밀림뿐이다. 이래서야 원….”
“동감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아차 하는 순간 방향 감각이 사라지더군. 마치… 무한히 반복되는 진법에 갇힌 기분이야.”
중원의 환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중원오악(中原五岳)?
지형은 그쪽이 험난할지 몰라도, 식생의 분포와 규모, 기후 같은 자연조건은 운남이 단연 압도적이다.
중원에서 ‘크다’고 감탄을 터뜨릴 나무들이 여기선 발길에 차인다.
사내들을 더욱 곤란하게 하는 건 식물만큼이나 거대한 동물들이었다.
“조심해라.”
‘으직!’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쭉 뻗은 손아귀에는 작은 공만 한 모기가 잡혀 있었다.
동료가 손을 닦는 걸 보며, 점박이 사내가 투덜댔다.
“냅 둬, 그냥. 너무 많아.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릴 거다. 난 그냥 피를 내주고 말겠어.”
어림없는 소리다.
이만한 모기가 떼로 달려든다면 남아나는 게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이건 시반문(翅斑蚊)의 일종이었다.
“학질(虐疾 : 말라리아)을 옮기는 모기다. 균을 지닌 것들에게 물리면 무인이라도 위험할 수 있어.”
“학질이라고?”
점박이 사내는 그제야 긴장한 기색이었다.
규격 외의 맹수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벌레들도 도통 평범한 게 없다.
얼마 전엔 짐승을 통째로 삼키는 식물까지 봤다.
점박이 사내는 머물면 머물수록 운남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기운 빠진 말투로 묻자, 한참 후에 답변이 들려왔다.
“……찾아야지. 어떻게든.”
말이 그럴 뿐, 힘이 없는 건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한 게, 수왕을 눈앞에서 놓친 게 세 달 전이다.
용병연합을 몰살한 수왕은 그날 이후 자취를 감춰버렸다.
마치… 숨어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북부부터 시작해서 중부와 남부를 샅샅이 훑었어. 귀주 쪽에서 진입한 조들은 동부와 서부를 가로질렀지.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본문의 첩보조가 전부 투입됐는데도 말이야.”
‘샅샅이’라고는 하지만, 무척이나 헐거울 수밖에 없다.
운남은 산서와 하북을 합친 것보다도 넓으니까.
심지어 경계나 표지로 삼을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도시라고는 대리와 곤명뿐.
특징적인 산과 강을 기준으로 잡아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해변에 나뭇가지 몇 개 꽂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점박이 사내의 말투는 체념에 가까웠다.
“웃대가리들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거겠지. 전체를 뒤져선 답이 안 나온다는 걸. 야수족을 찾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쪽에 병력을 투입했어야 했어. 금광은 남부에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다.
정사지간에 속한 금혈문(金穴門)의 요원들을 한숨짓게 하는 건 또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몰려들고 있어. 적색분지에서부터 수왕을 쫓은 세력들의 황금 시간대는 끝났다.”
이제는 발견해도 문제다.
나중에 진입한 자들도 결국 자신들처럼 남부에 병력을 집중할 것이고, 그럼 언젠가는 찾게 되어 있다.
힘센 놈들이 개입하기 전에 빠르게 선점을 하고, 연합이나 제휴, 거래를 통해 지분을 확보했어야 했다.
금광을 독식할 만한 힘이 없는 금혈문에게는 그 방법뿐이었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이득이니까.
하지만 이젠 그조차 물 건너간 일이었다.
“욕심이 문제지. 일단 찾고 보자는 거야. 그럼 어떻게든 발을 걸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두 사람이 보기에는 그것도 어려웠지만, 문주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점박이 사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 사도련 휘하의 병력이 진입했다더군. 녹림이 주축이 돼서 지도를 그리는 모양이야.”
“녹림? 허어… 세상에 해만 끼치던 놈들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그렇다면 지금 알려진 세력 중 금광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사도련이다.
그들은 정도맹처럼 명분을 따지지도, 힘을 쓰는 데 머뭇거리지도 않으며, 심지어 독식할 만한 힘까지 갖추고 있었다.
“정도맹은 창룡검대를 출격시켰대. 사도련이 금광을 집어삼키는 걸 놔둘 수는 없다는 거겠지.”
“창룡…! 빌어먹을. 이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냐?”
사실이라면 진짜 빠져야 할 때가 왔다.
정파나 사파라면 어느 한쪽에 붙기라도 하겠지만, 정사지간에 속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정식으로 건의를 올려보자. 더 머물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겠어.”
“동의한다. 수왕의 말도 마음에 걸려. 운남의 경계를 넘지 말라고 했잖아. 자기들이 돌아오면 눈에 띄지 말라고도….”
점박이 사내가 마른 비의 말을 떠올릴 때였다.
푸우욱.
차가운 쇠붙이가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어? 어어…?”
점박이 사내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대화를 나누던 동료의 눈이 커졌다.
스걱.
“커, 커컥…!”
숯을 칠한 검날이 동료의 목젖을 갈랐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남자가 추락하려는 두 사람을 낚아챘다.
“이따위 것들을 첩보조라고 키운 건가? 금혈문의 수준도 알 만하군.”
싸늘한 눈빛을 지닌 남자였다.
복면을 뒤집어쓴 그는 금혈문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에 걸친 뒤에 그들의 옷에 피를 닦았다.
“일살(一殺). 주변 정리가 끝났습니다. 두런두런 떠드는 멍청이들이 둘이나 더 있더군요.”
야행복을 걸친 자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일살이라 불린 자까지 총 일곱 명.
이들의 정체를 아는 자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단 일곱 명만으로 특급의 칭호를 획득한 살수들.
야행칠살(夜行七殺)의 맏형, 일살이 비릿하게 웃었다.
“완전히 거저먹는군. 운남 남부에서 눈에 띄는 놈들을 모조리 정리하라……. 숫자도, 대상도 지정하지 않고 말이지.”
“심지어 힘이 부치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죠. 선수금까지 두둑하게 넘겨주며 말입니다.”
온갖 청부를 받아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의뢰인은 자신의 정체를 묻지 말라고만 했다.
돌아가는 상황과 눈치로 짐작건대 정파 쪽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사천의 문파 중 하나인 듯합니다. 미행을 염두에 뒀는지 여기저기 쏘다니긴 했지만, 제 추적을 뿌리칠 순 없었죠.”
이살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직접 올 수는 없는 상황인데, 다른 놈들이 먹는 건 배 아프고……. 뭐 그런 것 아니겠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던지.”
뭐든 상관없다.
자신들은 일을 마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사도련이 밀고 들어올 때까지만 머물다가 빠진다. 그놈들과 엮였다간 살아남지 못하니까.”
일살과 이살이 대화를 나눌 때, 일곱 명 중 가장 외곽에 선 자가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마지막에 한 말…….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듣기로 수왕은 암습이 통하지 않는다던데. 탈명회주가 보자마자 청부를 포기했다지 않습니까. 혹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살이 눈살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막내야. 넌 너무 조심스러운 게 탈이다. 수왕은 끝났어. 아마 지금쯤 운남을 넘어 땅끝까지 도망갔을 거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돌아온다고……. 운남에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도 남겼지 않습니까?”
일살의 어조에선 짜증이 짙게 묻어났다.
“헛소리다. 식구가 다 죽고, 힘에 밀려 도망가며 허세를 부린 거야. 그리고, 운남 전체가 제 영역이라도 된다더냐?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칠살의 건너편에 있던 육살이 조소했다.
“나타날 거면 벌써 나타나겠죠. 꼬리를 말고 도망친 지 세 달이나 됐지 않습니까? 일살의 말씀이 맞습니다. 멀리 도망갔거나,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서 잠적해버….”
퍼어억―!
수왕을 비웃던 육살의 머리가 날아갔다.
거대한 도는 육살의 머리통을 날리는 걸로도 모자라 근처에 있던 오살까지 휩쓸었다.
“아, 아닛?!”
“웬 놈이냐!”
야행칠살, 아니, 야행오살이 도가 되돌아가는 궤적을 따라 몸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엔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괴인이 웃고 있었다.
“이따위 놈들이 특급 살수라고? 인기척도 못 느끼고 몸을 훤히 드러낸 채 수다나 떠는 것들이? 요즘 강호의 애새끼들 수준이 어떤지 안 봐도 훤하구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리는 노인이었다.
반 토막 낸 불곰의 앞발을 쥐고, 생고기를 씹는 그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저 도는…!”
성인 남성의 상반신만 한 도신(刀身).
톱날처럼 삐죽삐죽하게 갈아놓은 칼날은 베는 순간 피부를 걸레짝으로 만들 게 틀림없다.
대형 거치도를 보는 순간, 일살은 악명 자자한 전대의 거마를 기억해냈다.
“광혈마(狂血魔)…!”
살인, 강간은 물론이고 식인까지.
삼십 년 전, 결국은 무림공적으로 몰려 잠적해버린 인물이다.
천마신교의 정통 마교도가 들으면 쌍심지를 켜겠지만, 중원에선 저런 자들을 싸잡아 마인(魔人)으로 분류한다.
금광에 대한 소문은 삼십 년간 잠적했던 전대의 거마까지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강한 놈은 먹고, 약한 놈은 먹힌다. 아주 단순한 이치야. 노부는 점점 운남이 마음에 드는구나.”
표범은 사슴을, 불곰은 표범을.
산의 주인이었던 불곰도 광혈마에겐 먹잇감에 불과했다.
금혈문도들을 죽인 야행칠살 또한 다를 바 없으리라.
하지만 일살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미친 늙은이가 세상 바뀐 걸 모르는구나. 혼자서 우릴 상대하겠다고?”
기습에 당했을 뿐이다.
다섯 명이 합공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야행오살이 어둠에 녹아들 때, 괴소가 울려 퍼졌다.
“클클클. 누가 그러디? 내가 혼자 왔다고?”
“……!”
그 순간, 악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최소 사십에 달하는 병력.
일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림 전체에게 쫓길 때도 혼자 다니던 인간이 무리를 지었다고?!’
심지어 풍기는 기운으로 볼 때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야행오살의 얼굴에 암담함이 내려앉자, 광혈마가 킬킬대며 웃었다.
“가지고 놀아. 먹어도 좋고. 생고생을 하며 내려왔는데 몸보신 좀 해야지.”
수하로 보이는 자들이 입맛을 다셨다.
‘이, 이것들! 진짜로 사람을…!’
먹어본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 왜 안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진짜 마인들이었다.
금광 쟁탈전에 예상치 못한 세력이 끼어든 순간이었다.
“별의별 놈들이 다 들어왔네.”
그때,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내공을 쓴 것도 아닌데 귀에 또렷하게 박힌다.
광혈마가 흠칫하더니 번개처럼 뒤돌며 거치도를 휘둘렀다.
“카아아악!”
쩌어엉―!
새하얀 권갑이었다.
주먹부터 팔꿈치까지를 완전히 감싸는 순백의 무구(武具).
하늘의 빛을 담은 기운이 신병의 표면을 타고 일렁였다.
태산처럼 버티고 선 육체에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번쩍이니, 광혈마는 야생에 군림하는 대호의 환상을 보았다.
“수, 수왕…!”
일살의 경악은 절대적인 포식자를 마주한 먹잇감의 절규라.
원수들을 방치한 채 잠적한 지 석 달.
영겁 같던 침묵을 뚫고, 마침내 수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