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07화 (407/463)

407화

반격

“이놈이… 수왕이라고?”

일살의 비명을 들은 광혈마가 주춤대며 물러났다.

그러다가 실책을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핏덩이에게 위축돼서 뒷걸음질을 치다니?

한때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웠던 자신이?!

“이노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거마가 포효했다.

광혈마는 거치도를 움켜쥐었고, 타오르는 분노로 본능적인 두려움을 눌렀다.

“카아악!”

혈왕출세(血王出世).

과거 구파의 주력 검대를 궤멸했던 광혈마의 성명절기다.

붉은 강기 다발이 솟구치며 사위를 뒤덮자, 흉악한 마귀의 형상이 떠올랐다.

내공을 유형화하는 걸 넘어 심상을 그려내는 단계.

과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인다운 한 수였다.

“끔찍한 악취가 진동을 해. 너 뭐 하는 놈이야?”

붉은 강기가 덮쳐오는 데도 마른 비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무공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 자체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악기(惡氣).

무수한 사람을 보았지만, 이토록 더럽고 추악한 냄새를 풍기는 자는 처음이다.

마른 비가 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너랑은 말을 섞을 필요도 없겠어.”

와족의 기예도, 고절한 깨달음이 담긴 몸짓도 아니었다.

오른팔을 휘저었을 뿐인데, 광혈마 필생의 절기가 와해됐다.

혈왕출세가 낱낱이 해체된 순간, 마른 비의 왼 주먹이 전진했다.

후아아악―!

공간을 뚫어버릴 듯한 정권.

극도로 응축된 자연기가 새파란 살의를 뿌렸다.

가슴에 구멍이 난 광혈마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광혈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떨리는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콸콸 쏟아지는 핏물이 눈에 들어온다.

입을 벌린 채 부들부들 떨던 그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마, 말도 안 된다……. 이런, 이런 애송이에게 내가…!”

절곡에 숨어 힘을 키운 지 이십 년.

다시 세상으로 나오려는 찰나, ‘그분’을 만나 처참하게 패했다.

그리고 강제로 ‘궁’에 끌려가 다시 십 년을 절치부심했다.

거기엔 자신처럼 강호무림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마인들이 득시글거렸는데, 도저히 한 데 섞일 수 없는 자들을 묶어둔 건 한 명의 절대자였다.

‘십 년 만에 궁주의 인정을 받아 세상으로 나왔다……. 본궁의 위대한 행보가 시작되는 순간인데…!’

첫 임무를 받아들고 환호했다.

누구도 자신들을 막지 못하리라 여겼다.

한데 나오자마자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을 만나다니…!

“복수를…! 커헉…! 본궁의 형제들이 네놈을 갈아 마실 것이다!”

광혈마가 할 수 있는 건 비루한 저주를 퍼붓는 것뿐이었다.

혈혈단신 독불장군처럼 지내온 그가 ‘형제’ 운운하는 건 대단히 이질적인 광경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노마(老魔)의 읊조림 따위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자태가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수왕.

좌중의 이목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야수의 왕에게 쏠려 있었다.

“쓸 만하네.”

마른 비가 양팔을 감싼 백색의 무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왕문이 들었다면 얼굴이 벌게져서 호통을 쳤으리라.

그걸 차고도 고작 그따위 감상밖에 늘어놓지 못하냐고.

마른 비는 두 달 전, 왕문이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선택해라. 네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마른 비가 의아해하자, 왕문은 덧붙였다.

“모든 걸 만족하는 병기란 없다. 하나의 무구에 모든 걸 담으려고 하면,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되고 말아.”

그제야 무엇을 선택하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은 오래전부터 준비돼 있었기에, 주저 없이 대꾸했다.

“방어력. 내게 필요한 건 그거야. 난 모두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싶어.”

뢰창, 서리불꽃, 올빼미 사냥, 천둥바위, 불벼락…….

공격력은 지금으로도 차고 넘친다.

적들의 기예를 상쇄하고, 날카로운 병기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도구.

지금 자신에게 절실한 건 그것이다.

마른 비가 답하자, 왕문이 웃었다.

“여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말했지. 언젠가는 병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거라고. 좋은 선택이다. 내가 봐도 너에게 부족한 건 그것이야.”

마른 비는 바랐다.

최전선에서 식구들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기를.

운남의 자연과 소수부족을 지키는 방벽이 되기를.

중원의 북부를 가로지르며, 북방의 침공으로부터 한족을 지키는 저 장성(長成)처럼 말이다.

“이번엔 네 기운을 불어넣지 않겠다. 송곳니에 깃든 검치호의 기운만으로도 충분해. 오히려 걱정이 될 지경이다. 너무 강력해서 네가 다룰 수 있을지.”

말만 그럴 뿐, 왕문은 전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른 비를 믿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물건을 만들든 그가 완벽하게 다룰 것이란걸.

“비아 네게 날개를 달아주겠다. 세인들은 말할 것이야. 백아가 수왕의 검이라면, 왕문의 역작은 수왕을 완성시킨 방패라고. 내가 너를 무적의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했다.

천하팔대병기의 서열을 뒤바꿀 신병이.

이날 이후, 중원인들에게 수왕의 송곳니이자, 백열갑(白熱甲)이라 불릴 불세출의 무구가.

“가라. 의(義)와 명분은 너희에게 있다. 온 천하가 적으로 돌아서도 망설이지 마. 비아 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너의 뒤에 설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고마워. 아저씨.’

인연이라고 해봤자 각자의 목적에 따라 잠시 동행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관계가 이어져 이렇듯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른 비는 천하제일명장이 선물해준 권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앞서 내뱉은 평을 수정했다.

“훌륭해. 내게 이보다 꼭 맞는 무기는 없을 거야.”

처음 착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권갑에선 광포한 힘이 꿈틀거렸다.

검치호가 생전에 지녔던 한이 고스란히 깃든 것처럼 불길하며 난폭하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 힘을 애써 제어하지 않았다.

평야에서 날뛰는 야생마를 놔두듯 자유롭게 풀어둔 것이다.

‘천천히 어울리는 거야.’

자연 그대로.

검치호의 흉포한 기운을 마음껏 날뛰게 두고, 필요한 순간에 뻗어나갈 방향만 제시한다.

과거라면 모를까, 제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의지 없는 힘 따위가 마른 비의 심신을 침범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과는 상상 이상.

검치호가 남긴 힘의 잔흔은 전대 거마의 성명절기를 일격에 깨뜨릴 만큼 막강했다.

“쿨럭, 쿠헉…!”

원통한 눈으로 휘청대던 광혈마가 뒤로 넘어갔다.

그가 쓰러진 순간, 사나운 기세가 솟구쳤다.

“형니임…! 개고생 끝에 겨우 사바세계에 나왔는데 이렇게 가면 어쩌우!”

“카아악! 죽여라! 토막을 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어! 놈의 뼛조각도 남기지 마라!”

악인들끼리도 의리란 게 있는 걸까?

광혈마를 따라온 마인들이 광분하며 날뛰었다.

그들은 야행오살을 내버려 둔 채 일제히 몸을 돌렸고, 마른 비를 향해 솟구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너도 받은 걸 시험해봐야지, 별비야?”

“커허허헝!”

마른 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얀 빛줄기가 숲속을 누볐다.

나무 위에서 떨어진 별비는 번개처럼 기동했고, 녀석이 지나칠 때마다 두 동강 난 적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짐승의 앞발이 낸 상처라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고 깔끔한 일격.

마치 숙련된 검사가 베고 지나간 것 같은 절단흔이었다.

〔흥. 왕문이란 인간, 솜씨가 제법이야. 생각보다 쓸 만하군.〕

별비는 입에 날카로운 단검을 물고 있었다.

아니, 별비의 덩치가 커서 작게 보일 뿐 그건 여느 검사들이 쓰는 검과 비슷한 크기였다.

손잡이는 별비의 이빨이 꽉 물리게끔 들쭉날쭉한 홈이 나 있었으며, 날은 그 어떤 보검보다도 날카로웠다.

마른 비의 권갑처럼 흉험한 기운이 스멀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빠르게 베고 지나갈 때는 유용하겠어.〕

별비가 고개를 기울여서 우측 다리에 묶어놓은 혁갑에 검을 수납했다.

녀석은 자신만의 소유물을, 마른 비와 함께 쓰러뜨린 검치호의 유물을 갖게 된 점에 흡족한 듯했다.

마른 비는 별비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족장께서 새로운 재료를 구하는 바람에 송곳니가 남는다. 이걸로 뭘 만들어줄까?’

왕문이 묻자, 마른 비는 부탁했다.

그믐의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칼바람과 달리 어둔 날개는 자신의 발톱을 뽑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플 것 같아서.

‘수십 년을 붙어 지내면 뭘 하나. 썩을 놈 같으니라고.’

그믐은 툴툴댔지만 전혀 서운한 눈치가 아니었다.

칼바람이 특이한 것이지,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생으로 뽑는 게 좋을 리 없으니까.

노을이 그랬듯 그건 그믐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노인장께서 원하시는 무기가 작다 보니 여전히 재료가 남는다. 이걸로는 뭘 만들까?’

거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재료가 남았는데,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마른 비나 노을, 그믐 정도 되는 전사가 아닌 한 검치호의 기운을 다스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산과 안개걸음조차도.

‘음……. 그럼 칼을 만들어줘. 고기나 썰어먹게.’

왕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세상 단 하나뿐인 재료를 가지고 도축용 칼을 만들라니.

하지만 마땅히 쓸 데도 없었고, 버리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다.

그때 왕문의 눈에 들어온 게 별비였다.

‘저놈 싸울 때 일일이 입 벌려서 물어뜯지? 그건 효율이 안 좋아. 속도와 무게를 살려서 베고 지나갈 수 있게 검을 만들어주마.’

물론 주목적은 마른 비를 위한 도축용 칼이었다.

하지만 짐승을 베든 인간을 베든 소기의 목적에는 부합하는 꼴이니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맹수 전용 검이 탄생했는데, 제작자와 재료가 원체 뛰어나다 보니 위력도 기가 막혔다.

〔흐흣. 다 죽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십 명을 쓸어버린 별비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칼집이 된 것도 모른 채 즐거워하는 걸 보니 귀여우면서도 미안했다.

마른 비가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튀엇! 사방으로 흩어진 뒤에 집결지에서 만난다!”

일살의 외침이었다.

마른 비와 별비의 힘을 목격한 그는 하얗게 질렸고, 도망갈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른 비가 생각에 빠진 틈을 타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운남에 들어온 적을 한 놈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별비야.”

〔맡겨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별비가 날아올랐다.

고개를 기울인 별비는 검사가 발검하듯 화려하게 검을 뽑았다.

그러곤 순식간에 다섯 방향을 가로질렀다.

“컥…!”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깔끔하게 양분된 몸뚱이가 떨어져 내렸다.

앞발로 후려치는 게 더 편할 텐데, 별비는 굳이 다섯 명을 일일이 추월하며 검으로 베었다.

〔후…….〕

별비는 고개를 흔들어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에 검을 수납했다.

혁갑에 검이 꽉 맞물릴 때까지 넣고, 우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다.

늠름한 눈빛은 덤이었다.

‘무지하게 마음에 들었구나.’

마른 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박수를 쳤다.

“훌륭해. 멋졌어. 우아해.”

별비는 ‘뭘 이 정도로.’ 하는 태도로 새침하게 걸어갔다.

와족 전사들이 남부에 퍼진 적들을 요격하러 간 방향이었다.

별비의 뒤를 따르며, 마른 비는 생각했다.

그간의 일들을 겪으며 자신도 많이 달라졌다고.

‘시체를 앞에 두고 웃다니……. 예전 같으면….’

욕지기가 치밀었으리라.

하지만 이들에겐 아무런 연민이 들지 않았다.

‘악인과 살수라서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적색분지 대회전 이후로, 마른 비는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변한 걸 느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이면서도 이를 악물어야 했던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피에는 피를.

적으로 마주했다면 가차 없이 손을 쓸 것이다.

‘최소한 복수가 끝날 때까지는.’

심호흡을 한 마른 비가 눈을 빛냈다.

거기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살의를 불태우는 청년이 있었다.

“이쪽이야, 별비야.”

운남의 남쪽을 한 덩어리로 봤을 때, 마른 비가 나타난 곳은 서쪽에 해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발길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자. 사도련을 맞이하러.”

‘금광 쟁탈전’.

중원의 사서에는 그리 기록되지만, 동월루의 후신인 삭월은 달리 명명한다.

‘수왕제위등극전(獸王帝位登極戰)’이라고.

수왕과 와족의 명성을 천하에 떨칠 행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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