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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08화 (408/463)

408화

* * *

밀림은 고요했다.

남방 특유의 넓은 잎사귀와 후덥지근한 기후.

종횡으로 얽힌 덩굴 식물들이 시야를 가린다.

빽빽하게 들어찬 식물 군락은 야생 동물들의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다.

평소 같으면 활발히 움직일 짐승들이 숨을 죽인 채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외인들 때문이다.

운남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복장을 한 자들이 밀림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지형에 녹아든 채 무언가를 찾는 인간들 때문에 야생 동물들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파파팟―!

정적이 깨진 건 달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북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산불을 피해 달아나는 노루처럼, 청년 한 명이 필사의 질주를 감행했다.

아니, 그건 질주라기보다 도주로 보는 게 옳았다.

“헉, 허억…!”

흰색 무복과 왼쪽 가슴에 새겨진 ‘월(月)’자 문양.

중원의 정세에 해박한 자라면 그것이 청월각(淸月閣)의 상징임을 알 것이다.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정파의 세력 중 제법 이름이 알려진 청월각의 제자가 뒤를 힐끔거리며 내달렸다.

“우오오!”

그의 뒤에선 도끼를 든 거한이 쫓아오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사내는 고함을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였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다가왔다.

도끼를 휘두르면 청월각 제자의 머리에 닿을 거리.

풀숲에 숨은 짐승들이 곧 터져 나올 비명에 대비하며 몸을 움츠렸다.

“……?”

짐승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자고 따라붙은 거한은 청년을 해치는 게 아니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음풍곡(淫風谷)…!”

청년이 거한을 힐끗거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의 어조에선 긴장과 적대감이 묻어났다.

거한 역시 청년을 곁눈질하더니 빠르게 외쳤다.

“청월각…! 빌어먹을! 운 좋은 줄 알아라!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대번에 머리통을 쪼개줬을 테니까!”

청월각이 정파라면, 음풍곡은 사파의 중견 방파다.

감숙성에 위치한 두 집단은 이권 문제로 얽혀 있었고,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인 사이였다.

‘머리통을 쪼개준다.’는 말을 듣고 청년의 표정이 변하자, 거한이 황급히 외쳤다.

“이 새끼야! 허튼짓 하지 마라! 일단은 휴전이다! 지금 싸우면 둘 다 죽어!”

청월각의 청년은 언짢은 듯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거한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지금은 음풍곡 따위와 드잡이질을 할 때가 아니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휘아아악―!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죽자고 달리던 두 사람의 고개가 일시에 돌아갔다.

“와, 왔다…!”

“으아아! 빌어먹을! 젠장!”

청년과 거한이 서로를 바라봤다.

생존에 대한 염원이 적대감을 억눌렀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좌우로 찢어지며 달려 나갔다.

눈빛만으로 통하는 친구처럼, 이 순간만큼은 청년과 거한의 뜻이 합치한 것이다.

쾌애애액―!

황색 빛줄기가 눈부신 속도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우측으로 꺾었다.

거한이 달려 나간 쪽.

청년은 웃었고, 거한은 울상이 됐다.

“시팔! 내가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거한은 도주를 포기했다.

어차피 따라잡힐 거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힘을 전부 끌어올려서 도끼에 실었다.

칙칙한 기운을 머금은 도끼가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챙강―!

하늘 높이 날아오른 도끼날.

두터운 날붙이를 쪼개버린 건 다리였다.

“이, 이럴 수가…!”

한탄 섞인 비명이 거한의 유언이 됐다.

곧게 뻗은 다리가 음풍곡 사내의 머리를 터뜨렸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경갑(脛甲).

섬전 같은 질주와 각법을 선보인 건 안개걸음이었다.

“흠…….”

안개걸음이 정강이를 감싼 가리개를 내려다봤다.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합금과 압축의 기술을 가미했다고 했나?

그 위에 한철을 덧씌웠다나 뭐라나.

도통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한족 대장장이의 장담처럼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건 사실인 듯했다.

“확실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아. 이거라면….”

난전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발차기를 쏟아낼 수 있다.

도끼 같은 중병을 가뿐히 박살 내는 강도라니.

안개걸음이 경갑을 쓰다듬으며 중얼댔다.

“쓸 만하네.”

퍼어억―!

건너편에선 청월각 청년의 가슴이 꿰뚫렸다.

아직은 병기를 쓰는 게 어색한지 산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게 보였다.

재질만 다를 뿐 마른 비처럼 주먹부터 팔꿈치까지를 감싸는 권갑.

정교하게 세공된 그것은 손 전체를 보호하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산은 팔을 휘둘러보고, 무게를 가늠하는 등 조정을 마친 후에 씨익 웃었다.

“좋아. 나쁘지 않아.”

왕문이 들었다면 헛웃음을 흘렸으리라.

중원에서 그의 손을 거친 무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하지만 와족 사내들의 반응은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죄다 밋밋하기만 했다.

안개걸음이 주위를 둘러볼 때, 나무표범 전사가 다가와서 보고를 올렸다.

“여든여섯 명. 빠져나간 놈은 없습니다. 북쪽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전사 역시 안개걸음과 같은 경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색채의 대비 때문일까?

푸른 한철에 눌어붙은 피가 오늘따라 유독 붉게 느껴졌다.

“좋아. 이동한다.”

안개걸음과 산은 전사들과 함께 나아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동쪽이었다.

* * *

“모조리 쓸어버려라.”

운남 최남단.

산맥의 정상에서 검은 질풍이 휘몰아쳤다.

하늘을 뒤덮은 암운이 내리꽂히자, 숨어 있던 맹수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야수의 포효가 산맥을 울리고, 산사태처럼 밀어닥친 뿔과 발톱, 이빨이 인간의 육신을 찢어발겼다.

백 마리가 넘는 야수들이 북진을 시작한 순간, 산맥이 피에 잠겼다.

“삐아아악―!”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두 마리의 거조였다.

어둔 날개와 칼바람.

검은 구름이 일차적으로 산맥을 휩쓸고, 설산의 바람이 뒤를 따랐다.

그에 이어 길짐승들이 지상을 갈아엎으니,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크아악!”

“사, 살려…!”

“우리는 정파요! 수왕과 북벌에서 함께 싸운 사이란 말이오!”

중원인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짐승들과 달리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존재.

맹수들을 거느린 채 우두커니 선 노인은 오금이 저리는 살기를 흘렸다.

까가각.

노인이 손가락을 비비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소재를 짐작하기 힘든 수투(手套).

소리로 보아 무척이나 단단한 재질이 분명한데, 천으로 된 장갑처럼 얇고 투명하다.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팔을 꺾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음은 물론이었다.

노인은 수투가 어색한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파인 게 뭐가 어쨌단 말이냐? 결국 네놈들도 금광을 노리고 온 것이잖나.”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비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운남을 휘젓던 놈들이 이제 와서 정파 운운하는 꼴이라니.

정파건 사파건 마교건 간에 운남에 들어온 이상 모조리 척살해야 할 적일 뿐이다.

반려수들이 적을 휩쓰는 걸 보며, 그믐이 움직였다.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말거라.”

아이들을 추슬러야 해서 참았을 뿐, 심장을 태울 듯한 살의에 휩싸인 건 그믐도 마찬가지였다.

인고의 시간을 건너 마침내 반격의 때가 왔다.

노장이 가세한 순간, 살육의 비가 내렸다.

“하, 합세해! 힘을 합쳐라!”

“진영을 떠나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금광이 남부에 있다는 말 때문에 여긴 산과 안개걸음이 담당한 지역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분포해 있었다.

삼백에 가까운 무인이 저항을 했지만, 그믐이 이끄는 반려수 부대를 막을 순 없었다.

“크악!”

“카아아악!”

검치호의 송곳니로 만든 수투.

그믐의 올빼미 사냥은 병기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며 적들을 유린했다.

뚝, 뚝…….

손을 털 필요도 없었다.

핏방울이 수투의 표면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몰살의 현장을 둘러본 그믐이 반려수들을 이끌었다.

“이동하자꾸나. 동쪽으로.”

그믐 역시 수투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음……. 맨손보다는 낫구먼.”

* * *

“진절머리 나는 동네야.”

뱀을 닮은 눈초리와 얇은 입술.

흑록채의 채주 독고길의 운남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밀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평생을 산과 숲에서 지내온 그이지만, 운남의 자연과 기후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느낌이 온다. 며칠 안에 단서가 나올 거야.”

하지만 고생이 끝나는 것도 머지않았다.

동쪽으로 진입하여 지도를 그리며 전진한 지 한 달.

이제야 겨우 운남 동부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이 끝났다.

삼 일 전 운남 남부에 들어섰고, 이제는 지형에 익숙해진 터라 빠르게 기동 중이었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지형에서 금광은 산맥과 산맥이 맞닿는 지점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흐흐흣.”

독고길은 자신을 따르는 병력을 뒤돌아본 뒤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녹림십팔채 휘하 칠백여 명!’

열여덟 개 산채 중 열네 개에서 각기 오십 명의 정예들을 차출했다.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진산채를 제외하면, 녹림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이토록 강한 병력을 지휘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도련 휘하 수십 개 군소방파들의 연합이 천여 명.

그놈들이야 오합지졸이고,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 숫자면 정파와 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힘이었다.

‘창룡검대가 왔다고 했지?’

정도맹을 대표하는 무력 단체이자, 맹주 직속의 세력.

머저리 같은 정파 놈들이 또 그놈의 명분 타령하다가 의견이 어긋난 모양이지만, 독고길은 확신했다.

맹주가 금광을 포기할 리 없다고.

그가 보기에 사도련의 지존인 패군과 달리 천검은 철저하게 잇속을 챙기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뱃속에 구렁이가 아홉 마리는 들어찬 늙은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내려보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반대하여 파병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제압할 만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

제아무리 정예라 해도 고작 백오십에 불과한 병력으로 자신들을 막을 순 없다.

독고길은 정사대전이 끝나기 전에, 그리고 맹주가 수를 쓰기 전에 금광을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겠지?’

창룡검대는 최정예다.

이런 지형에서는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넓게 퍼져라! 수일 안에 금광에 접근할 것이야! 지금부턴 일급 경계 태세로 전환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놈들이 나타나면, 전부 쓸어버리도록!”

“오오오! 알겠습니다! 채주!”

녹림도들이 환호했다.

산적이라 멸시당하며 살아온 나날들.

이제는 공을 세우고 사도련의 주축으로 우뚝 설 일만 남았다.

그들은 인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채 전진했다.

그러던 순간, 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냐, 저건? ……백호?”

평생 가도 한번 볼까 말까 한 게 흰 호랑이다.

그 귀한 짐승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희한한데, 모습은 더 기이했다.

고개를 하늘로 쳐든, 매우 건방진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입에 검을 문 채로.

독고길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손으로 비볐다.

“내가 헛것이 보이나?”

검을 입에 문 백호라니?

심지어 새하얀 검날에 푸른 광채가 어린 게 척 봐도 굉장한 보검이다.

녹림도 전체가 멈춰선 가운데, 백호가 검을 수납했다.

“…….”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몰라서 모두가 멍청히 있자, 백호는 잘 보라는 듯 우아하게 검을 뽑았다.

“가르릉, 가릉.”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다.

범도 저런 소리를 내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다.

홀로 천 명이 넘는 인간을 침묵시킨 별비가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어때? 멋지냐?〕

녹림도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비한 걸 다 보여준 별비가 눈빛을 바꾸며 포효했다.

“커허허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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