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409화 (409/463)

409화

솜털까지 곤두세우는 울부짖음!

별비가 하는 짓을 멍하게 보고 있던 자들이 기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잊고 있던 것들을 기억해냈다.

“푸른 눈, 어마어마한 덩치……. 기를 다루는 백호…!”

최근 중원을 떨쳐 울린 사내와 연관된 말이 아닌가!

신음이 녹림도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수왕…! 모두 조심해라! 저건 수왕과 함께 다닌다는 영수다!”

알아채는 게 늦었다.

별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그들의 사고를 늦춘 것이다.

비명이 터진 순간, 나무줄기가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녹림의 진영 한복판에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휘리리릭―

돌풍이 부는 음향은 죽음의 전주였다.

녹림도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을 때, 돌개바람이 적진을 난자했다.

빠바바바박!

턱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으스러졌다.

쇄골이 내려앉고, 갈비뼈가 박살 났다.

걸리는 걸 모조리 깨부수는 폭풍과도 같은 권각에 녹림도의 전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피가 안개처럼 번지는 가운데, 야생의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 수왕…!”

“정말로 돌아온 건가…!”

혜성처럼 등장해, 황제를 지키고 마교의 칠대장로 중 한 명을 처단한 남자.

천하를 제패한 원의 대장군들을 격침시켰으며, 서달의 요청으로 장성을 넘었다.

거용관의 성문을 박살 내는 것으로 시작된 남하.

하북에서부터 운남까지 이어진 질주는 무림사에 길이 남을 행보였다.

그에게 덤볐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얼마이며, 쇠락한 문파가 몇 개인가.

마른 비는 몰랐지만, 석 달 전 용병연합을 몰살한 일은 그를 전설의 반열에 올려놨다.

“으, 으으…….”

“수왕이라니……. 이놈은 안 나타날 거라고 했잖아…!”

명성만으로 적들의 기세를 꺾는다.

십좌나 구파의 수장들이 그런 것처럼.

아니, 현시점에서 수왕의 이름은 천검이나 패군을 능가할 정도였다.

“뭘 쫄아서 빌빌대고 있나! 정신 차리지 못해!”

공포의 전염을 막은 건 독고길이었다.

독고길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두 자루의 낫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옆을 돌아봐라! 전부 아군이다! 반면에 놈은 하나야! 머리를 굴려서 생각이란 걸 해보란 말이다! 이게 지려야 질 수가 있는 싸움인지!”

머릿수가 주는 안정감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왕은 절망적인 전력 차이를 몇 번이나 극복한 전례가 있는 남자였다.

“독 채주. 수왕은 용병연합 칠백 명을 한자리에서 전멸시켰다고 했소. 교어채의 전선도 침몰시켰다지. 총표파자나 초 호법 같은 강자가 없는데 우리끼리 수왕을 잡을 수 있을지….”

독랑채(壁岳寨)의 부채주가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독고길은 그 말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나보고 나서라는 건가?!’

열네 개 산채에서 오십 명씩 긁어모은 병력.

기본적으로 이들은 독고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약자들을 상대로는 신나게 날뛰어도, 강자 앞에서는 대번에 기세가 꺾인다.

그걸 만회하고 사기를 올리려면 수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야 하는데…….

문제는 독고길도 마른 비 앞에 나설 용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는 교묘한 언변으로 위기를 타파했다.

“잡을 수 있다! 놈은 순수한 힘으로 용병연합을 잡은 게 아니야! 듣지 않았나! 함정을 파고, 괴상한 능력으로 감전시킨 거다! 우리는 그런 얕은수에 당하지 않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독고길은 녹림도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난전으로 간다! 물량으로 밀어붙여! 지칠 때까지 달라붙어서 체력을 갉는 거다! 우리의 장기를 보여줘라!”

독고길은 별비에 대한 대처도 잊지 않았다.

“사도련의 무인들이여! 앞으로 나서서 짐승을 막아주시오! 야만족 놈은 이 독고길과 녹림의 형제들이 막겠소이다!”

“오오오오!”

“좋소! 해봅시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지!”

병력이 움직이는 걸 보며, 독고길은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꼬맹아! 뭐 하다 이제 왔는지는 몰라도 책임감이 없는 놈이구나! 네가 버리고 간 계집들은 잘 주워 먹었다!”

도발.

초패가 독고길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더러운 음담패설, 부모와 친인까지 능멸하는 언사는 독고길의 주특기였다.

평소의 언행도 실제로 난잡했지만, 적과 싸울 때면 이런 식으로 신경을 긁는 도발을 하곤 했다.

으지직! 빠각!

마른 비는 달려드는 적들을 가볍게 분지르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독고길 쪽으로 돌아갔다.

‘좋아! 걸렸어…!’

운남에 들어와서 여자는커녕 인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허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주의를 분산시켜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게만 하면 성공이니까.

독고길이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카하하! 아주 맛있는 별미였다! 살이 야들야들한 게 본좌의 물건이 비명을 지르더구나!”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적색분지에서 뒈진 게 네 애비란 소문이 있던데……. 그러게 왜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거냐? 야만인이면 야만인답게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어딜 감히….”

되는 대로 지껄이던 독고길이 주춤했다.

마른 비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를 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격장지계가 안 통해? 어린놈의 평정심이 어떻게 이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안광.

마른 비가 독고길을 향해 돌아섰다.

“자, 잠깐! 막아! 막아라…!”

본능적인 주절거림이었다.

독고길은 그 말만 남긴 채 잽싸게 물러섰고, 그게 그를 살렸다.

콰아앙!

단거리 돌진기, 번갯불.

연달아 펼친 극속의 비기가 적진을 꿰뚫었다.

대도도, 도끼도, 쇠도리깨도 막지 못한다.

백열갑을 앞세운 마른 비의 돌진은 새하얀 질풍과 같았다.

“크아아악!”

“카악…!”

독고길의 명에 따라 흑록채의 산적들이 나섰으나, 희생자만 늘릴 뿐이다.

허나 그의 근방엔 녹림의 정예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 깊게 파고든 마른 비는 더욱 강한 적들에게 둘러싸였다.

“후웁!”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의도한 바다.

마른 비는 주먹을 쥔 채 양팔을 맞댔고, 자연기가 뻗어나갈 궤적을 상상했다.

그러곤 그 길을 따라 백열갑에 깃든 검치호의 기운을 인도했다.

“합!”

날뛰어라!

애뢰산을 평정했던 그때처럼.

하늘의 실수로 세상에 던져져, 외로이 스러져간 고대의 생물이여!

〔커허허헝!〕

환청일까?

산맥을 쩌렁쩌렁 울리던 검치호의 포효가 들리는 듯했다.

문을 열어젖히듯 좌우로 팔을 휘두르자, 시퍼런 자연기가 빛을 뿜었다.

후아아악―!

반구형으로 번지는 소멸의 파동.

마른 비의 순정한 자연기와 달리, 난폭하고 흉악한 기운이었다.

검치호의 기운이 지배하는 반경 오 장의 공간은 입자까지 분해시킬 절대사지가 되었다.

휘아아악― 쩌엉!

기운이 대기로 흩어졌을 때, 그곳에 남은 건 완전한 무(無)의 세계였다.

“뭐, 뭐냐, 저게?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독고길의 경악은 그럴 만했다.

본능에 몸을 맡겼을 뿐, 마른 비조차 이런 게 가능할지 몰랐으니까.

‘내 기운은 조금도 소모하지 않았어. 대단한데, 이거?’

왕문은 말했다.

마른 비를 무적의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그 장담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백열갑의 위력은 대단했다.

‘기운이 전부 소진됐구나!’

힘을 한껏 쏟아내자, 백열갑 표면에 일렁이던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기에 떠도는 자연기를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수복하고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상대할 수도 있겠어.’

이천에 가까운 병력.

혼자서 이 숫자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리라.

권갑을 얻기 전엔 단호히 고개를 저었겠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검치호의 힘이 없더라도 그렇다.

자연기를 주입하지 않아도 적들의 병기를 수수깡처럼 부러뜨리는 강도.

마른 비는 자신이 굉장한 선물을 받았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별비도 있어. 한번 해볼까?’

마른 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랬다가 고개를 저으며 힘을 풀었다.

설령 할 수 있더라도 그래선 안 되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움직이지 마. 계획대로 간다.’

과연 지금 운남에 진입한 놈들이 전부일까?

그럴 리 없다.

이들이 전멸하더라도 중원 무림은 계속해서 병력을 보내올 것이다.

문명인들의 탐욕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그것이 마른 비가 지난 사 년간의 여정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꿈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부순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해. 우릴 건드리면 죽는다는 걸 각인시키는 거야!’

마른 비는 전투 자세를 풀었다.

그러곤 감각을 조율하여 자연기마저 꺼뜨렸다.

힘이 빠진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별비야.”

푸화하아악―!

이름을 부르자, 피분수가 터졌다.

입에 검을 문 채 망아지처럼 날뛰던 별비가 재깍 달려왔다.

사도련 무인들을 일직선으로 베어 넘기는 돌파.

별비의 뒤편으로 양단된 몸뚱어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불렀나?〕

별비는 노련한 검객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연기를 하고 있던 마른 비는 하마터면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재미 들렸네. 신났어, 아주.’

마른 비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별비의 등에 올라탔다.

경이적인 힘을 목격하고, 감히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적들을 내버려 둔 채.

“가자.”

마른 비가 이동을 지시하자, 별비가 비장한 눈으로 대꾸했다.

〔좋다. 내 너를 약속의 장소로 옮겨 주리라. 보여주마. 새롭게 터득한 참격을! 전율해라. 내 솜씨 앞에서!〕

‘맙소사…….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오백 년 전에 살았던 검사들이나 쓸 법한, 곰팡내 풀풀 나는 말투다.

별비는 우렁차게 울부짖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사도련의 무인들이 막아섰지만, 둘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마른 비가 등 돌리는 걸 보고서야 독고길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심각한 착각에 빠졌다.

“수왕이 도망친다! 아까 그 기술을 쓰고서 힘이 빠진 거야!”

그러고 보니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혼을 빼놓을 한 수를 선보였지만, 그런 게 여러 번 가능할 리 없었다.

독고길의 수준으로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른 기의 조율을 간파하는 건 불가능했다.

“쫓아라! 수왕을 잡을 절호의 기회다! 놈을 잡아서 금광의 위치를 캘 것이다!”

“오… 오오오!”

사파의 무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용기백배하여 마른 비의 뒤를 쫓았다.

“녹전단! 출격하라! 전속력으로 수왕을 쫓아!”

화산파 매화검수에 비견되는 녹림의 정예.

독고길은 아껴둔 비장의 전력까지 모조리 풀었다.

엄밀한 진형을 갖춘 채 전진하던 사도련이 마구잡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엄청나구나.”

그늘이 겹겹이 내려앉은 수풀 속.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에는 고풍스런 청룡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내가 몸을 숨긴 언덕은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는데, 수풀과 짙은 그늘 덕분에 아래쪽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찰과 염탐을 하기에는 최상의 위치.

사내의 뒤에 정렬한 백오십의 무인 중 견장을 단 사내가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대주님. 일순간 선보인 기운은 맹주님이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분께는 못 미치지만 말입니다.”

정도맹 창룡검대의 대주.

비류무정검(飛流無情劍) 혁운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부대주. 그건 수왕의 기운이 아니야.”

“……?”

검치호의 기운을 마른 비의 것이라 착각한 부대주와 달리 혁운상은 정확히 짚어냈다.

“너무 거칠고 난폭하다. 아마도 병기의 힘을 빌린 듯해. 맨몸으로 싸운다고 들었는데 신병을 손에 넣은 모양이군.”

혁운상의 눈은 별비의 등에 올라탄 마른 비를 쫓고 있었다.

그가 눈살을 좁히며 말했다.

“힘이 빠졌다. 하긴 터무니없는 힘이었지. 허나 저 정도로 탈진한다면 우리의 상대가 될 순 없다.”

혁운상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독고길이 그랬듯이 그도 마른 비가 힘을 숨긴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허나 둘 사이엔 엄청난 거리가 있었고, 가까이 있을 경우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도련이 움직입니다. 따라갑니까?”

부대주가 고개를 돌릴 때였다.

혁운상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빛살 같은 속도로 검이 뽑혀 나왔다.

“웬 놈이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