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스가각―!
검기가 나뭇가지를 절단했다.
잘린 가지와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뻥 뚫린 틈으로 내리쬐는 햇빛.
허나 인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주님. 뭔가 발견하신 겁니까?”
창룡검대가 자세를 낮추며 발검 자세를 취했다.
기감을 끌어올리며 사위를 훑었지만, 걸리는 게 없다.
혁운상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무 위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위화감을 느꼈는데?”
부대주는 ‘짐승과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혁운상을 믿었고,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무언가가 있다! 기감을 끌어올려서 주위를 살펴라!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
감각의 그물이 퍼질 때였다.
창룡검대의 끝자락에서 비명이 터졌다.
“컥…!”
“아악!”
대원 두 명이 피를 뿜으며 무너졌다.
그들의 가슴을 꿰뚫은 건 무표정한 사내였다.
“음?!”
“뭐냐? 살수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 묻은 수투였다.
푸른 광택을 띠는 그것은 색채와 질감으로 미루어볼 때 한철로 제작한 듯했다.
놀라운 건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점이다.
천으로 짠 장갑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
신의 경지에 이른 철장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두 번째로 이목을 끈 건 사내의 형체였다.
“저게… 무슨 조화냐? 보일 듯 말 듯 한 허깨비처럼…….”
“은신술인가?”
창룡검대가 눈을 비볐다.
분명한 건 환영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첩시킨 기감이 사내의 존재를 잡아내고 있었으니까.
한데 시야에 담고도 흐릿하게 보이는 건 뭐란 말인가.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은신술의 고절한 경지가 틀림없었다.
“그 복장. 야수족이군. 살수 비기를 터득한 자까지 보유하고 있는 건가?”
혁운상이 검을 겨누며 물었다.
검은 수리의 수장.
어스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각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엄청난 실력의 살수다! 조심해라! 기감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혁운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이 터졌다.
“아악!”
“컥…!”
“후방이다! 뒤쪽에서 적들이…!”
어스름은 스스로 미끼가 됐다.
아군이 접근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검은 수리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암습을 성공시켰다.
“혼자가 아니었나!”
혁운상이 이를 빠드득 깨물었다.
“밀집해라! 적들이 파고들 틈을 주지 마!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켜라!”
암습을 저지하기 위한 최선의 지시였다.
하지만 어스름과 검은 수리 전사들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었다.
“못 이긴다. 무리하지 말고 빠져라.”
스스스슥―
십여 명의 적을 해치운 검은 수리들이 등 돌려 달아났다.
그들은 숨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서 거리를 벌렸다.
뒤로 물러서며 밀집했던 창룡검대는 멍한 표정이 됐다.
“이놈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어스름도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혁운상은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동료를 잃은 창룡검대가 분노에 휩싸였다.
‘놈들이 도망친 방향은?’
수왕과 사도련은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반면 암습자들이 달아난 방향은 서쪽이었다.
‘유인은 아닐 확률이 높다. 탐색 중에 우릴 발견하고 간을 본 거야!’
그렇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전속력으로 따라붙어서 대원들의 복수를 갚은 뒤에 사도련을 쫓으면 된다.
아니, 몇 놈을 생포하여 금광의 위치를 캐면 굳이 녹림의 수색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리라.
혁운상이 선두로 나서며 외쳤다.
“기동진(機動陣)! 저놈들을 잡아서 금광의 위치를 캘 것이다! 절호의 기회니까 절대 놓치지 마라!”
창룡검대는 숨을 한번 들이켤 시간에 진형을 변환했다.
그리고 검은 수리의 뒤를 쫓아 전속력으로 숲을 헤치기 시작했다.
* * *
“빌어먹을! 더럽게 빠르구나!”
독고길이 고함을 내질렀다.
눈앞에 어른대는 희끄무레한 형체!
백호는 숲속을 날 듯이 달려갔다.
죽어라 달려서 따라잡으면 멀어지고, 겨우 따라붙으면 또 거리가 벌어진다.
그 아슬아슬한 간극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녹전단과 함께 선두로 나선 독고길은 점점 초조해졌다.
‘조금만 더! 수왕이 기력을 회복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수왕의 힘이 빠졌을 거라는 예상은 맞았다.
바닥을 쳤던 기운이 서서히 차오르는 게 느껴졌으니까.
백호의 등에 올라탄 수왕은 수시로 뒤를 힐끗거렸다.
그리고 그 얼굴에선 다급함이 묻어났다.
‘잡을 수 있어! 수왕을 잡을 수 있단 말이다! 이 독고길이 천하를 발칵 뒤집어 버리는 거다!’
녹전단도 같은 생각이었다.
십좌급의 무인을 잡을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수왕이 만전의 상태라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추격이 이어질수록 확신이 들었다.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게 차오르는 기운.
수왕은 무서운 속도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쫓아! 쫓아라! 무조건 잡아야 한다! 명성을 날리고 금광까지 확보할 기회란 말이다!”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속여 넘기기는 쉽다.
무엇보다 마른 비의 자연기를 조절하는 실력이 기가 막혔다.
화아아악―!
숲을 지나자, 시야가 열렸다.
운남 생물들의 식수원.
독고길을 기다리는 건 거대한 늪이었다.
‘얕다!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가슴이 잠길 정도!’
독고길은 순식간에 늪지대의 수위를 파악해냈다.
숲을 달릴 때는 매복에 대한 걱정을 뿌리칠 수 없었는데, 여긴 탁 트여 있으니 그런 염려를 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다! 여기서 잡아야 해!”
독고길과 녹전단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며 늪을 내달렸다.
그들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을 때, 별비가 돌아섰다.
“잘 따라오네. 지형을 읽는 눈이 상당해.”
마른 비가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희한한 건 늪의 한복판인데 가라앉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뭐냐, 저건? ……악어?”
별비와 등에 올라탄 마른 비가 두둥실 떠올랐다.
둘을 수면까지 밀어 올린 건 거대한 악어였다.
“어서 와. 운남의 늪은 처음이지?”
급속도로 차오르는 기운.
독고길과 녹전단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내공이…!”
“설마… 함정?!”
마른 비는 대답 대신 눈을 번쩍였다.
『보금자리를 침입한 놈들이야. 집어삼켜.』
광범위 언령이 늪을 휩쓸었다.
그러자 늪지대 곳곳에서 맹수들이 몸을 일으켰다.
수백에 달하는 악어와 하마 떼.
늪의 주인들이 주둥이를 벌리며 포효했다.
“쿠어어어!”
“꾸아악! 카악!”
사방에서 덮쳐오는 거수들의 물결에, 녹전단이 하얗게 질렸다.
“당황하지 마라! 그래봤자 미물에 불과한 것들이다! 발을 디딜 곳을 찾아! 크기만 컸지, 이따위 것들 전부 베어 넘기면…!”
독고길이 녹전단을 독려할 때, 바람이 훅 끼쳐왔다.
“아까 뭐라고 했지? 다시 말해봐.”
여인들을 입에 올린 너저분한 도발.
그것도 용서할 수 없지만, 이놈은 아버지까지 욕보였다.
애써 참았을 뿐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마른 비가 분노를 드러내며 쇄도하자, 독고길은 사색이 됐다.
“으, 으아아아!”
쇄겸십육세(鎖鎌十六勢).
독고길을 채주의 자리에 올려놓은 무공이었지만, 수왕의 일격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뻐어어엉!
한 방.
백열갑을 두른 정권은 두 자루의 낫을 부수는 걸로도 모자라 독고길의 머리까지 날려버렸다.
뻐버버벅―!
피가 뿌려지기도 전에 녹전단 다섯 명의 머리통이 박살 났다.
반응조차 할 수 없는 발차기 연격.
녹전단은 그제야 자신들이 범에게 달려든 하룻강아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독 채주!”
“뭉쳐! 힘을 집중해서 놈을…!”
추아아악―!
소리를 지르던 녹전단원의 머리가 날아갔다.
별비가 마른 비의 뒤를 따르며 앞발을 휘두른 것이다.
가슴까지 물에 잠긴 그들은 반응이 한 박자 느릴 수밖에 없었다.
“헛! 독 채주가…!”
“이게 무슨 상황이냐? 녹전단이 짐승들에게 둘러싸였어!”
지나온 숲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녹전단에 비해 경공이 떨어지는 녹림의 본대와 사도련의 무인들이 당도한 것이다.
그들의 선두가 숲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 목소리가 들렸다.
“정예들이 분단됐다! 와족, 돌격하라!”
들불 같은 기세가 일었다.
숲의 동쪽에 매복해 있던 전사들이 몸을 일으키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을 이끄는 건 열 손가락에 조도(爪刀)를 찬 여인이었다.
“하아앗!”
할퀴고, 가르며, 찌르고, 벤다.
한 치의 낭비도 없이 휘둘러지는 수격은 차라리 예술에 가까웠다.
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는 지점부터 골무처럼 손가락을 감싸서 보호하는 무기.
끝부분이 독수리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아래쪽에 날이 달린 그것은 노을의 장기를 살리도록 특수 제작된 기문병기였다.
추아악! 서걱! 스가각―!
휘두르는 대로 잘려 나간다.
칼바람의 기운이 담긴 발톱은 노을의 자연기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적들을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대단해! 진짜 예리한데, 이거? 그 사람, 굉장한 실력자였구나!”
왕문이 흡족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족 사내들과 달리 노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리도 간다! 전부 쓸어버려라!”
북쪽에서 내려온 건 산과 안개걸음이었다.
오랜 친구라는 걸 증명하듯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은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사파 무인들을 거꾸러뜨렸다.
“꼬맹이들에게 질 수 없지. 가자, 어둔 날개.”
맹수의 울부짖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그믐은 반려수 부대를 통솔하여 우왕좌왕하는 적진을 깨부쉈다.
한 명 한 명의 신체조건과 장기를 살리도록 맞춤 제작한 병기.
천하제일철장이 심혈을 기울인 무구는 와족 전사들의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야수족이다! 포위당했어…!”
“유인과 매복이라니! 이놈들, 미개한 야만인이 아니었나!”
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운남은 와족의 터전이자, 그들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전장이었다.
반려수까지 합해봐야 이백이 될까 말까 한 전력.
하지만 와족은 천육백에 달하는 사파 무인들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커허허헝!”
서쪽에서 들려온 포효!
뒤이어 나타난 사내는 사파 무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맙소사! 수왕…!”
일기당천(一騎當千). 만부부당(萬夫不當).
새하얀 권갑은 뚫리지 않는 금성철벽과 같았다.
포탄처럼 날아든 권격이 지형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녹전단을 내버려 두고 숲에 진입한 마른 비는 단신으로 서쪽 전선 전체를 뭉개버렸다.
“마, 막아라…!”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지휘자가 죽었고, 최정예는 발이 묶였다.
심지어 정신없이 달려온 바람에 진형마저 엉망진창이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조여든 와족의 돌진은 사도련의 진형을 찢어발겼다.
“피해라! 돌격 범위에서 벗어나!”
독랑채의 부채주가 절규했다.
여기저기서 잡다하게 끌어모은 병력.
이럴 경우 지휘체계가 잡히지 않으면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다.
와족의 힘에 질린 사도련은 분분히 몸을 날렸고, 그 결과 열십자(十) 형태로 분단돼 버렸다.
“후욱, 훅….”
그리고, 열십자의 중앙에서 와족이 만났다.
정도맹을 유인하러 간 어스름과 열 명의 검은 수리를 제외하면 모든 전사가 한곳에 모인 것이다.
『피해는?』
마른 비가 언령으로 묻자, 노을이 답했다.
『한 명도 없어. 반려수들이 경상을 입은 게 전부야.』
나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중원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전사 한 명 한 명은 천금보다 귀중한 전력이었다.
『이제는 적들도 정신을 차렸어. 지금 빠져야 해.』
짧게 치고 빠지는 유격전.
최종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병력을 운용해야 한다.
그게 와족 수뇌부의 결론이었다.
『숫자를 더 줄이지 않아도 될까?』
노을이 묻자, 마른 비가 고개를 저었다.
『어스름 아저씨가 간 쪽. 정도맹 병력을 직접 살폈어. 하나하나가 최정예야. 녹전단이라는 놈들보다도 월등히 강해. 더 이상 죽이면 무게추가 기울 거야.』
양측의 균형을 맞추고, 교착 상태에 빠뜨린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묶어둔다.
영묘를 깨끗이 비우고, 근처까지 적들을 유인한 이유였다.
『비아, 네 말이라 따르긴 했지만, 난 걱정이 돼. 저들이 정말 우리 생각대로 움직일까?』
정도맹과 사도련의 뿌리 깊은 반목을 모르는 노을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마른 비가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분명히. 저 둘은 절대로 타협 따윈 하지 않아. 힘의 크기가 비슷하면, 금광을 발견하는 대로 으르렁대며 그 앞에 머물 거야. 그리고 각자의 진영에 연락해서 추가 병력을 파견하겠지.』
거기까지 이르려면 최소 두 달 가까이가 걸린다.
그건 방심하고 있을 원수들의 뒤통수를 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사이 복수를 끝내고, 바글바글 모인 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그 정도의 힘을 보이면 다신 누구도 운남을, 와족을 넘보지 못하리라.
“비켜.”
마른 비가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사도련 무인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내 말 안 들려? 길 열라고. 다 죽을래?”
사도련 무인들이 독랑채의 부채주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길을 열라는지 모르지만, 수왕과 부딪치지 않는다면 그게 최선이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그들은 자존심이니 치욕이니 하는 걸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냥… 간다는 말이오?”
부채주가 묻자, 마른 비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어느 한쪽이 몰살할 때까지 해보고 싶어?”
결코 그럴 리 없다.
방금 전의 돌격으로 보건대 싸울 경우 전멸하는 건 자신들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비, 비키겠소…….”
정도맹이었다면 죽더라도 싸웠으리라.
책임질 사람이 죽고, 명예보다는 실리를 우선시하는 사도련이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온갖 집단에서 모인 난잡한 구성이라는 점도 협박이 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저벅, 저벅.
뒤를 쫓다가 된통 얻어맞고, 꼬리를 내린 채 깨갱대며 길을 비켰다.
사도련은 유유히 걸어가는 와족을 보며 뒤늦게 수치심이 밀려왔지만,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전속력으로 북진할 거야. 어스름 아저씨도 지금쯤이면 정도맹을 떼어냈겠지.』
직접 확인하고 준비한 도주로니 확실할 것이다.
검은 수리들을 놓친 정도맹은 사도련을 찾을 거고, 곧 금광을 발견하겠지.
마른 비가 와족 전사들에게만 들리도록 언령을 퍼뜨렸다.
『원한을 갚을 시간이야. 가자. 사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