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 * *
전각 처마에 매달린 등롱이 어둠을 살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빛이 일렁였지만, 가주전(家主殿)에는 어둠이 침범치 못했다.
야간에 집무를 볼 때면 기껏해야 등잔불 한두 개를 사용했던 전대 가주와 달리, 현 가주는 전각 전체를 밝히는 걸 선호했다.
마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길거리에 경계를 위한 등롱이 띄엄띄엄 걸린 것과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마치 가주전만 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광경.
검소했던 당천기와 달리 당건휘는 이런 식으로 가주의 권위를 드러내길 즐겼다.
“후우……. 답답하군.”
가주전 꼭대기에 위치한 집무실.
원래는 검은색과 당가를 상징하는 진녹색의 조화로 예스런 멋을 풍기던 그곳이 화려한 색으로 넘쳐났다.
당건휘가 가주가 되자마자 한 일이 그것이었다.
사천의 이름난 화공들을 불러 모아, 안팎으로 휘황찬란한 그림을 그리는 것.
여백도 남기지 않고 다채로운 색을 채워 넣은 벽면은 호화롭기보단 난잡해 보였다.
눈이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방의 중앙에서, 당건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콱 메는 것 같군. 창문을 좀 여시게.”
손을 모은 채 시립해 있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창가로 다가간 그가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당건휘는 그제야 속이 좀 뚫리는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총관.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는가?”
“예. 가주님. 아직은 별다른 소식이…….”
창문을 열었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전서구가 날아온 게 일다경 전이다.
그사이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을 리가 없잖은가.
적색분지에서 돌아온 이후, 가주는 넉 달째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시시때때로 운남의 동향을 살피며 새로운 소식이 없냐고 묻는다.
초췌한 얼굴과 시뻘겋게 충혈된 눈.
지금 당건휘의 모습은 수년간 강박증과 불면증에 시달린 환자처럼 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허나 아주 작은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 되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볼까?”
반복해서 소식을 묻는 건 그렇다 치자.
총관을 미치게 하는 건 바로 이거였다.
했던 말을 무한정 반복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동 없는 상황을 보고하라는 것.
처음 한두 달은 버틸 만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총관은 자신의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금광에 대한 정보를 접했는데, 청성과 아미의 압박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는 게 답답하겠지…….’
병력은 병력대로 잃고, 공지량과 작당 모의를 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증거를 남기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대 가주의 희생으로 되찾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을 뻔하지 않았나.
허나 눈치 빠른 자들은 구린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운가를 멸문시킨 과거의 행보까지 트집 잡으며, 고리눈을 뜬 채 당건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얻은 건 없는데 잃은 건 많으니 초조할 거야. 나라도 가주님을 이해하고 보필해야….’
이십 년 전부터 당가의 내외부를 담당해 온 총관은 돌아버릴 것 같은 순간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충직한 무인은 당건휘가 조바심을 내는 또 하나의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강남에서 날아온 연통……. 운가를 멸문시켰을 때부터 은비대주와 원로들의 서신이 쇄도했다. 그걸 전부 무시해왔어.’
가주에 대한 예의 때문에 정중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지만, 그건 질책에 가까웠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냐는 추궁이나 다름없다.
가주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녹수대가 적색분지에서 내내 얼굴을 펴지 못했듯이 수왕에 대한 당가 인물들의 감정은 호의 일색이었다.
그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당문휘나, 수왕의 행보에 찬탄을 금치 못했던 원로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적색분지 대회전에 참전하여 야수족을 몰살했을 때, 당문휘는 가주에게 막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정사대전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복귀하여 멱살을 잡았을 게 선할 정도로.
‘은비대주와 원로들이 조만간 복귀할 거라는 서신이 왔다. 빠르면 한 달. 그들이 당도하면 옴짝달싹 못 할 텐데 움직일 방도가 없으니…….’
식솔들은 모르지만, 총관은 알고 있다.
공지량과 협잡을 벌인 것은 물론이고, 적색분지 대회전 이후 당건휘가 벌인 추잡한 짓들을.
예컨대 운남의 남부를 혼란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해 살수들에게 의뢰를 한 일 등을 말하는 것이다.
끝까지 반대했지만, 당가를 위해서라는 명분과 협박이나 다름없는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총관은 직접 움직여서 살수들을 만나야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내 분명 상황을 정리하자고 말했을 텐데?”
‘아차…!’
핏발 선 눈이 총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극도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지금의 당건휘는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할 화탄과 같았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잠을 못 자서 잠깐 조는 바람에….”
총관은 머리를 흔들어서 잡념을 털어내고 황급히 말했다.
“수왕과 그의 일족이 사도련의 병력을 급습한 지 한 달……. 처음엔 그들을 끝장낼 수 있는데도 사라진 이유를 다들 궁금해했습니다만, 이제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 무릎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 사도련의 숫자를 줄여서 창룡검대와 힘의 균형을 맞췄지.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말이야.”
수왕이 그전까지 보인 모습은 전략전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장에 난입해 병력을 움직인 적은 있으나, 현묘한 운용이나 체계적인 지휘가 아니라 힘을 앞세운 돌파였으니까.
“남부에 퍼진 놈들을 일거에 쓸어 담고, 사도련을 유인했습니다. 병력을 매복시킨 뒤에 전격적인 급습으로 전장을 휘저었죠.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고, 병력 손실 없이 빠져나가기까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 수였습니다.”
중원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체술과 맹수를 부리는 능력.
마른 비는 한 달 전의 전투로 힘센 야만인일 뿐이라고 폄하하던 자들의 평가를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의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금광이 발견됐죠. 처음엔 실수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 역시 수왕의 노림수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금광을 찾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운남이 뒤집혔다.
아니, 천하가 뒤집혔다.
금광석이 지표면에 훤히 노출될 정도로 매장량이 풍부하고, 순도는 입을 떡 벌릴 만큼 높다.
운남을 수색하던 자들이 남부로 달려갔다.
긴가민가하던 중원의 세력들도 다급히 병력을 파견했다.
어떻게든 한쪽 발이라도 걸칠 요량으로.
하지만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그건 ‘금’이 아니라 ‘금광’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채굴, 정제, 가공, 운반……. 엄청난 장비와 인력을 투입해야 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운남은 어설픈 무인들 따윈 한 끼 식사로 여길 맹수들이 들끓죠.”
발견은 했는데, 그 뒤가 막막하다.
어처구니없게도 욕심에 눈이 멀어서 거기까지 염두에 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일단은 찾고 보자는 마음이 먼저였을 것이다.
“수왕은 꿰뚫어 본 겁니다. 어차피 발견될 테니 위치를 알려주고, 그리로 모여들게 한 거죠. 어느 한쪽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힘의 균형을 맞춘 채.”
“자신은 숨어서 훤히 노출된 자들을 파악하고 말이지.”
사도련과의 일전 이후 누구도 수왕을 목격한 자가 없었다.
운남은 제집이나 마찬가지니,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게 뻔하다.
정파와 사파가 충돌하여 공멸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지.
순한 걸 넘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뒤에 비상한 머리를 숨기고 있는 놈이었다.
“네. 그래서 더더욱 움직이지 못합니다. 엄청난 인원이 모였지만, 정도맹과 사도련을 중심으로 뭉칠 뿐 칼부림 한 번 나지 않았죠. 다들 두려운 겁니다. 수왕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구도 이런 교착 상태가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대부분은 수왕이 은거하거나 멀리 도망갈 거라고 여겼다.
한데 갑자기 나타나서 입맛대로 판을 짜놓고 잠적해버릴 줄이야.
마른 비가 보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군웅들의 심리적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영악한 놈이야……. 수백 번을 들었지만, 들을수록 열불이 치솟는군. 금광은 내 거였다. 그건 원래 내 것이 될 예정이었다고!”
당건휘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총관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대화.
이제는 내뱉는 단어와 소리를 지르는 시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아졌다.
총관이 미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을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가주님! 긴급 전서입니다! 서신을 봉한 밀랍에 맹주님의 직인이 찍혀 있습니다!”
“뭣이라?!”
전서구를 담당하는 대원의 보고에 당건휘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직감했다.
상황을 변화시킬 무언가가 시작되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정도맹주가 자신에게 서신을 보낼 리가 없었다.
“이리, 이리 가져와라! 그걸 당장 내게 가져와!”
당건휘는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거기엔 정사대전이 끝나는 대로 맹주 본인이 직접 움직일 것이며, 그때 힘을 빌려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힘든 상황을 위로하며, 당건휘의 결백을 믿는다는 것과, 청성과 아미의 압박을 걷어주겠다는 약속까지.
이건 둘만의 비밀이라는 말과 함께.
당건휘의 입이 귀에 걸렸다.
“후하! 후하하하! 이것 보게, 총관! 맹주께서 나와 본가의 역량을 정확히 알고 계셨어! 그렇지! 대량 살상에 있어 본가만큼 뛰어난 집단이 또 있던가!”
탐욕 때문에 스스로를 진퇴양난에 빠뜨린 당건휘와 달리 총관은 앞뒤를 가늠할 정신은 남아 있었다.
당건휘가 미친 듯이 웃어젖힐 때,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맹주가? 우리에게? 운남으로의 파병은 군사회의에서 부결된 걸로 아는데 직접 움직인다고?’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지금 당가에 쏟아지는 눈길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방패가 돼주겠다고?
뭐? 둘만의 비밀?
당천기 때부터 크고 작은 일을 맡아온 총관은 음험한 계략의 악취를 맡았다.
“가주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하지만, 거절하셔야 합니다. 맹주는 속을 알 수 없는 분입니다.”
당건휘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러곤 무시무시하게 눈을 치떴다.
총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단호히 말했다.
“그동안 가주님의 뜻을 따라왔지만, 이건 아닙니다. 자칫하면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을 수 있어요. 냉정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은비대주와 원로들이 도착하면 대책 회의를….”
“닥쳐라! 네놈이 감히 누구 면전에서 그따위 망발을…!”
댕! 댕! 대앵―!
“음?!”
“뭐냐…!
당건휘가 욕설을 퍼붓기 직전, 침입을 알리는 타종이 울렸다.
* * *
“수왕님.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당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자락.
요새나 다름없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복면을 쓴 여인이 물었다.
와족의 전사들이 정렬한 가운데, 선두에 선 마른 비가 대꾸했다.
“아냐. 딱 맞췄어. 이수가 용케 누나를 찾았네. 와줘서 고마워.”
여인은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복면 위로 매력적인 눈웃음이 번졌다.
마른 비가 단이수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둘 중 한 명.
왕문에 이어 달려온 건 색광신투 차유람이었다.
“어머? 고맙긴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있기, 없기?”
차유람이 마른 비의 가슴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른 비와 나란히 서 있던 노을이 눈을 치켜떴다.
‘뭐 이런 불여우 같은 년… 아니, 여자가?’
와족 사내들이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하자, 차유람이 배시시 웃었다.
“와! 수왕님 식구들은 하나같이 야성적이네? 일 끝나면 마을에 놀러 가도 돼요?”
전사들을 둘러보던 차유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길은 산에게 머물러 있었다.
“어머! 어머! 이 근육이랑 덩치 좀 봐! 저기요. 당가 뽀개고 나면 우리 집에 국수 먹으러 올래요?”
“으, 응?”
산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지팡이가 튀어나오더니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여울이 특유의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누구신지 모르지만, 죽고 싶어요?”
여울이 고개를 들어서 산을 올려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정신 차려, 오빠.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지 않으면.”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래서 더 무섭다.
와족 전사들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냥 미친 사람인가?’
노을이 중원 칠대 기인에 대해 알 리 없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차유람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런……. 임자가 있는 분인 줄 몰랐네. 미안해요!”
차유람에 대해 아는 마른 비는 혼자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주 웃어준 뒤에 장난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그 유명한 당가의 기관진식을 돌파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