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기관진식? 그것 때문에 이 여자를 부른 거야?”
마른 비에게 추파를 던진 일 때문에 차유람에 대한 노을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차유람이 와줄지 알 수 없어서 아직 그녀에 대한 소개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응. 규가 그랬어. 당가를 힘으로 돌파하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수준 높은 기관진식이 펼쳐져 있대. 중원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라.”
당가에 직접 들어가 봤지만, 경계가 삼엄하다는 걸 느꼈을 뿐 거기까진 감지하지 못했다.
그땐 무림에 대한 경험도, 기관을 살필 안목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유람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많은 문파들이 기초적인 기관 정도는 설치하지만, 당가는 심해요. 핏줄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본가의 방비에도 심혈을 기울이죠. 정파 중에서 본거지에 성벽을 둘러놓은 건 저들밖에 없을걸요?”
노을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걸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요?”
마른 비가 대신 대꾸했다.
“누나는 중원 최고의 해체 전문가야. 실력은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왜 네가 대답을 대신하는데?’
노을이 마른 비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차유람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과 ‘누나’라는 표현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지낸 사 년.
그동안 만난 여인들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어진 뒤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일지도.
하지만 노을은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고, 마른 비를 굳게 믿었다.
‘흥!’
노을은 콧바람 한번 뀌는 걸로 소소한 질투를 깨끗이 털어냈다.
그러곤 비탈에 서서 당가를 내려다보는 차유람의 옆에 섰다.
“기관진식……. 서적에서 읽었어요. 외부의 침입을 방비하거나, 안에 들어선 자를 가두는 데 사용되는 덫. 기계장치와 진법을 혼용한 함정을 말하는 거죠?”
차유람이 끄덕이자, 노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건 없는데……. 정말로 저기 무언가가 감춰져 있나요?”
차유람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성문을 뚫어져라 보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천망발도진(天網拔刀陣)을 개량한 진법 같아요. 본래는 인간이 펼쳐야 할 공격을 기관이 대신하고요. 튀어나오는 건 십중팔구 비수……. 상정한 범위 안에 생명체가 들어오면 발동되는 형식이에요.”
차유람이 검지를 들어서 성벽을 가리켰다.
“성벽은 더 위험해요. 높이가 상당하지만, 무인이라면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겠죠? 그게 진짜 노림수죠. 저 위는 절대사지예요.”
여느 성벽과 다를 바 없지만, 차유람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진법과 어우러져 빽빽하게 설치된 기관들이.
거기에 더해 성벽 위를 지키고 선 무인들.
고요해 보이는 그곳은 범의 아가리나 다름없었다.
“뛰어넘으려는 순간, 성벽 틈에서 비수가 쏟아질 거예요. 성벽 위도 마찬가지죠.”
그때, 마른 비가 끼어들었다.
차유람의 합류가 늦어지자 나름대로 강구했던 수단을 꺼내놓은 것이다.
“공중은 어때? 누나가 오지 않으면 공중으로 침투하려고 했거든. 우리에겐 새가 있어. 많은 수를 보낼 순 없지만, 열다섯 명 정도는….”
전대 전사들이 쓰러지는 바람에 새를 반려수로 둔 전사의 숫자는 확 줄어 있었다.
그중 사람을 운반할 정도의 거조는 손에 꼽았다.
어둔 날개와 칼바람이 무리를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열다섯 명.
하지만 최정예를 보낸다면 기관을 무시하고 적의 심장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마른 비의 생각이었다.
“와… 내가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 죽일 셈이에요?”
차유람이 황당한 얼굴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나름 괜찮은 작전이라고 여겼던 마른 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당연하죠!”
차유람은 단호하게 말했다.
“성벽까지 쌓은 인간들이 공중 침투를 대비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바로 뒤가 산인데.”
마른 비는 몰랐지만, 그건 무림사에서 간간이 시도됐던 방법이었다.
“산이나 봉우리를 배후에 둔 문파에 공중으로부터 침투하는 것. 초대형 연(鳶)을 이용한 전격 기습전이죠. 서너 번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런 전례는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당가는 시도됐던 방법을 등한시할 집단이 아니었다.
공중 화망은 물론이고, 중앙에 위치한 가주전은 모든 종류의 기습을 상정한 방비가 갖춰져 있었다.
“수왕 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숫자로는 당가를 꺾을 수 없어요. 열다섯 명에게 무너질 정도면 지금의 명성도 없었겠죠.”
“음……. 일리 있는 말이야.”
차유람은 경각심을 일깨운 뒤에 성벽 위를 가리켰다.
“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경계병들이에요. 이상한 점이 느껴지나요?”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린 반면, 노을은 즉각 대꾸했다.
“경계병이 순찰을 돌지 않네요. 저 정도 숫자로는 모든 곳을 방비할 수 없어요. 사각을 메우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전부 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군요.”
차유람이 이채를 띠며 씩 웃었다.
“맞아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아니, 적절한 표현이 아니네요.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면 안 되는 거군요. 보초들이 서 있는 자리가 기관을 해체할 수 있는 곳 맞죠?”
차유람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관에 대해서 알아요?”
“그럴 리가요. 유추한 거예요. 짐작할 만한 단서를 주셨잖아요.”
차유람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노을에게 돌아서 있었다.
“그럼… 저들이 움직이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도 알겠어요?”
이번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노을이 답을 내놓았다.
“생물체……. 천망발도진이란 진법이 생명체를 감지하다고 했죠? 인간 대신 기관이 공격을 하고요. 그럼…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는 거군요. 범위에 들어서면 저들도 공격을 받는 게 아닐지….”
“세상에…! 훌륭해요!”
차유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당가가 사활을 걸고 설치한 기관진식.
슬쩍 보고 듣는 것만으로 맹점을 찾아내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저것. 뭔가 이상해요. 왜 망루를 저런 식으로 세워 놓은 거죠? 저것도 기관의 일종인가요?”
차유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진짜 모르는 거 맞아요? 아니지. 저건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배운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군요.”
차유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정확해요. 성벽도 위험하지만, 진짜 문제는 저 망루예요.”
차유람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감시탑을 가리켰다.
생각 없이 봤을 때는 큰 위화감이 없었지만, 듣고 보니 묘하다.
성벽 뒤에 미세한 차이로 들쭉날쭉하게 배치된 그것은 왜 나란히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다가오는 자를 감시하기에 좋은 형태는 아니죠? 보초병도 기껏해야 망루당 한 명.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노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여기까지 눈치챈 것만 해도 경악할 일이다.
차유람은 이제야 말할 기회를 얻었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한 명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에요. 아니, 정정하죠. 저 보초병들은 미끼예요.”
“미끼라고요? 아…! 설마?”
차유람이 흠칫했다.
눈치로 볼 때 노을은 감을 잡은 듯했다.
차유람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천재라는 족속이 진짜로 있긴 있구나…….’
왠지 주눅이 드는 걸 느끼며, 그녀가 말했다.
“네. 망루야말로 천망발도진의 진짜 노림수예요. 성벽을 넘은 적을 몰살할 기관. 아마도 저 안에는 엄청난 양의 비수가 저장돼 있겠죠.”
지면에서부터 삼 장 높이의 목재 망루.
짐작건대 적이 범위에 들어온 순간, 감시탑에 숨겨진 비수가 폭사 될 게 틀림없다.
차유람이 성벽을 절대사지라고 표현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성문부터 성벽, 망루까지 이어진 거대 진식.
기관과 연계된 그것은 당가를 수호하는 금성철벽이나 다름없었다.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저희는 분명 성벽을 넘었을 거예요. 비아가 초청한 이유가 있었네요.”
노을이 따스한 눈으로 차유람을 바라봤다.
처음엔 그냥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쪽 분야의 대가였던 것이다.
노을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와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그럼 침투로를 어디로 잡아야 하죠? 성문도 만만치 않게 위험한 것 같은데….”
차유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안으로 움푹 들어간 구조……. 허락받지 않은 자가 다가가면 사방에서 비수가 쏟아지겠죠. 기관도 기관이지만, 더 위험한 건 저들이에요.”
차유람이 성문 앞에 서 있는 무인들을 가리켰다.
거기엔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당가의 수비대가 포진해 있었다.
“은영대(隱映隊). 은퇴한 전대 무인들이에요. 원로원을 제외하면 가장 막강한 자들이죠. 당가는 은비대와 녹수대 출신의 노고수들이 야간 경비를 맡는 게 전통이에요.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문파나 세가에선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죠.”
백전을 경험한 전대의 무인들.
평생을 일선에서 뛰다가 물러난 고수들이 취약한 야간의 수비를 담당한다.
기관진식에 더해 저런 자들이 경계를 서니 단단할 수밖에.
무림에서 당가를 철옹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느낌인데……. 그래도 우린 저기로 가야 해.”
가만히 듣고 있던 마른 비가 성문을 가리켰다.
차유람은 이번에도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느낀 거예요, 수왕 님?”
마른 비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꾸했다.
“난 기관이니 진법이니 하는 건 몰라. 하지만 기운이 저리로 모이는 게 느껴져. 그게 아마 진법의 흐름이 아닐까?”
요컨대 결이다.
진법을 구동하는 기운의 결.
마른 비가 보기에 당가를 둘러싼 기관진식의 핵은 동서남북에 위치한 성문이었다.
‘진법의 흐름이 느껴진다고? 세상에……. 이 둘은 대체…!’
슥 보는 것만으로 그런 걸 느낄 수 있다면 세상천지에 위협적인 진법이 없으리라.
물론 천망발도진이 기기묘묘한 상승의 진법은 아니다.
허나 외부에서 핵을 찾아낼 만큼 허술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놀랠 노자네요. 맞아요. 우린 성문으로 가야 해요. 준비하세요, 수왕 님.”
핵의 위치를 알아낸 건 놀랍지만, 그것만으로 기관진식을 파훼할 순 없다.
진법을 해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면밀한 파훼법을 따르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부수거나.
‘무력으로 돌파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여기서 쓸 방법이 아니야. 가능한 곳까진 정공법으로 간다.’
차유람이 기관 해체를 위한 철제 도구들을 손가락 사이에 끼며 말했다.
“절 엄호해요, 수왕 님. 믿어도 되죠?”
사위가 어둠에 잠긴 밤.
성문 앞에 피운 모닥불이 시야를 밝힌다.
당가의 북쪽 성문을 담당하는 은영대의 조장 당중걸은 미동도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예순에 가까운 그는 과거 은비대의 부대주를 맡을 만큼 노련한 무인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둠을 노려보는 그에게 조원인 당원영이 물었다.
“형님. 저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근무 중이다. 조장이라고 불러라.”
당원영이 입을 삐죽이더니 고쳐 말했다.
“예, 조장님. 밤새도록 전각 전체를 밝히는 가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중걸은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유치한 과시욕이지. 자신의 위치를 훤히 드러내는 위험한 행동이기도 하고. 허나 상관없다. 무르익으면 나아질 것이고, 위험은 우리가 막으면 돼.”
그는 그제야 당원영에게 슬쩍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가주‘님’이라고 불러라.”
“예, 예. 아무렴요.”
뚱하게 서 있던 당원영이 들릴 듯 말 듯하게 말했다.
“문휘가 가주가 됐어야 하오. 운가부터 시작해서 적색분지 전투까지……. 건휘 저놈, 언젠가 사고 한번 크게 칠 것이오.”
“이놈이 그래도!”
호통을 친 당중걸이 엄한 어조로 질책했다.
“우린 장로도, 대주도 아니다. 그저 세가의 성문을 지키는 수비대일 뿐.”
요컨대 판단을 내리거나 의견을 개진할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상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믿고 맡겨야 한다.
당원영과 달리 당중걸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아, 거 말도 못합니까? 갑갑한 건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시우. 예전에 사파 놈들과 싸울 때도 그것 때문에….”
말을 잇던 당원영이 흠칫 멈췄다.
그러곤 눈을 커다랗게 떴다.
“거기 서라! 웬 놈이냐!”
당원영이 번개처럼 비수를 빼 들며 외쳤다.
어둠을 뚫고 접근하는 인영.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보건대 여인이었다.
중원 중부의 양식으로 보이는 무복은 여기저기가 찢겨서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여, 여기가 당가 맞죠?”
붉은 입술과 화려한 이목구비.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살려주세요! 사내들이 저를, 저를…!”
여인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연신 뒤를 돌아보던 그녀가 당원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